원전 판도라 프로젝트 AAA, 개작 작업 미야,
스토리 공동 소유권자 엑토플라즘과의 상호 합의에 의해 공개, 아울러 이 글의 전반적 권한은 미야가 가집니다.


강. 해. 지. 고. 싶. 다. 살. 기. 위. 해. 서. 난. 강. 해. 져. 야. 만. 한. 다.
................................... 달빛과 함께 춤 추는 악마... 월광(月光)


『씨팔. 제르가디스, 쥐새끼 같은 놈. 엄청 처먹기나 하는군. 더러운 자식.』
잠시 빈틈을 보이는 그 찰나같은 사이에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작은 아이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멀건 빛깔의 미지근한 감자 스프를 떠먹던 중에 날벼락이 쳤다. 아이는 그대로 접시 안으로 코를 박았다. 당황한 꼬마의 입에서 부그르르 거품 이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고릴라 사내는 그 반응이 엄청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있는 힘을 다해 제르가디스의 작은 머리통을 꾸욱 눌러댔다. 미친 사람인양 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콧속으로 으깨진 감자 덩어리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버둥거려 보았다. 숨이 막히면 곧 죽는다. 최소한 재채기라도 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억센 손아귀는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비비고, 누르고, 다시 좌우로 힘을 줘가며 마구 비볐다. 코가 접시바닥에 단단히 눌려 아팠다. 아니, 아픈 것도 모를 지경이다. 접시 안쪽에서 얼굴은 보라색 나팔꽃처럼 새파랗게 변해갔다.

『살려줘요, 하고 징징거리며 빌어봐라. 이 빌어먹을 쥐새끼야.』
아냐, 내 이름은 쥐새끼가 아냐... 아이는 펑펑 눈물을 흘려가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숨조차 쉴 수 없는데 목소리가 나올 리 만무하다. 작은 어깨만 미친듯이 요동을 쳤다.
『벌벌 떨지만 말고 울부짖어봐, 개처럼 멍멍 짖어보라구, 이 새끼야.』
아냐, 난 개가 아니야. 난 제르가디스야. 제르가디스... 내 이름은 제르가디스야.

절로 꺽꺽 소리가 나왔다. 이제 곧 죽을 거다. 하필이면 감자 스프에 빠져 익사하게 되다니, 그의 나이 겨우 여섯. 참으로 허망한 최후가 아닐 수 없...
아직은 인생 종막이 아니었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헉헉헉! 뷜터스씨. 가져오라 하신 술 가져왔어요! 자요. 여기요!』
『넌 기어서 다녀오냐?! 이지스! 이 망할 자식. 왜 이렇게 늦었어! 빨랑 와, 얼어 죽을 놈아!』
제르가디스의 머리를 내리 찍던 잔인한 손아귀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추었다. 사, 살았다?

힘들게 버둥거리며 코와 입속으로 가득 들어 찬 감자 파편을 뱉어냈다. 누군가 급히 달려와 등을 두둘겨 주며 토해내는 일을 도와주었다. 여전히 숨쉬기가 어려웠던지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손으로 급하게 얼굴을 긁어댔다. 손톱에 걸려 뭉그러진 야채가 한움큼이나 쏟아져 내렸다.

『지저분한 놈. 밥도 혼자 못 먹고 컥컥대긴... 우라질. 더러운 놈.』
술병을 건네받은 뷜터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의 관심사는 아이로부터 멀어졌다. 좋은 소식이었다.
포옹, 뚜껑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술을 마시는 동안, 그가 술에 취해 이 세상을 잠시 떠나있는 동안, 당분간 아이들은 참새가 흘린 눈물방울만큼의 조그마한 평화를 맛보리라.
『뭘 보는 거야?! 너희들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 나. 썩 꺼져!』
『네, 네. 알았어요, 뷜터스씨.』
천둥같이 고함 치던 사내에게 이지스는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리곤 기침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제르가디스를 끌다시피 해가며 방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대답만 하지 말고 빨랑 나가아아아!!』

서둘러 문을 닫아서 천만 다행이었다. 빈 술병이 낮은 타원형의 궤적을 그리며 아이들을 향해 날아왔다. 다행스럽게도 술병은 나무 문에 부딪쳐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이지스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한층 더 힘 주어 제르가디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손가락으로 코를 후벼 꼴사나운 감자를 긁어내는 일에 성공한 아이는 두말없이 이지스의 손에 매달려 두 다리를 열심히 움직였다.
차가운 공기가 허파 가득히 차오르자 아이의 두 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르가디스는 조금이라도 더 달콤한 공기를 들이마시고저 크게 입을 벌렸다.

『휴우, 아직도 가슴이 다 벌렁벌렁하네. 그치? 제르가디스.』
이지스는 질끈 눈을 감으며 작은 아이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땀이 흥건한 그의 손바닥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얼굴 역시 식은땀 투성이었다.

자신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 밤...
죽을 만큼 무시무시한 어둠 속을 뚫고 유령 투성이의 저 깊은 지하실 아래로 기어 내려가 커다란 술병을 끄집어 내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지스는 어둠을 싫어했다. 소년의 옆구리로부터 시큼한 체취가 풍겨나왔다. 그것은 꼭 유령이 발라놓은 침 냄새 같아 끔찍스러웠다. 후우, 하고 소년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저어, 고마워. 이지스가 아니었다면 큰일날 뻔했어.』
『그러기에 조심하라고 그랬잖아. 특히 뒷모습을 보이면 안돼. 그랬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머리통이 날아가 버릴 거야. 죽어서 헛간 뒤켠에 아무렇게나 묻힐 거라구. 비석도 없이 말이야. 알겠어? 절대 뒷모습 보이면 안돼.』
『응응, 알아 들었어. 나도 잘 알고 있어. 이지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벽장 구석으로 기어들어가 조용히 무릎을 둥글게 말았다. 이곳이 아이들의 유일한 안식처다. 가만히 기척을 죽이고 있으면 안전하다.
『얼굴 들어봐, 제르가디스. 형편 없구나... 이리 와. 내가 침 발라줄게.』
혀를 내밀어 부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욱씬거리는 통증을 호소하는 꼬마의 콧잔등을 살살 핥았다.
부스럭 소리가 나면 뷜터스가 또 화를 낼 거다. 조심해야 한다. 뷜터스가 술을 다 마시고 뻗기 전까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제르가디스는 이지스의 팔에 가만히 손가락을 걸치고 두 눈만 깜빡거렸다.
촛불 하나 밝히지 않은 어두운 방 안으로 하얀 달빛만이 가득했다.
흐르는 달빛... 춤 추는 하얀 달빛...
아이는 몸을 움추리며 이지스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기억에 없어.』
소곤거리는 제르가디스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개미 같았다.
『응?』
생채기 투성이의 뺨 위로 침을 발라주던 이지스가 살짝 떨어져 나갔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건지...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아. 그 전에 어떤 사람들과 살았는지, 내 엄마 아빠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무 것도 모르겠어. 하나도 몰라.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여기로 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아.』
『글세. 엄마, 아빠라... 나 역시 그런 건 가져 본 기억이 없는데, 제르가디스. 여기로 오기 전까지 날 데리고 살던 할망구 이야기로는 난 악마가 낳은 자식이라고 하더군. 악마가 제 애비랑 붙어서 날 만들었다는 거야. 뭐, 그거야 난 모르는 이야기이고... 아마 태어나면서부터 고아였겠지.』
이지스는 입술을 뾰로퉁하게 말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고아... 그렇다면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건 누구일까? 응?』
『아마 사신이겠지. 우리의 죽음을 원하는 사람들. 우리의 존재를 원치 않는 인간들, 도망갈 수도 없는 이곳에 우릴 집어 던진 사람들... 사신 말이야.』
이지스의 말라 빠진 팔이 아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하지만 죽으면 안돼. 살아서 보란 듯이 복수를 하는 거야. 살아야만 해.』

어둠 속에서 이지스의 검은색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거렸다.
소년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살아야만 한다.
강해져서... 복수를 하자.

『씨이팔∼!! 술 가져와! 수우울!!』
와장창창, 하고 물건들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서로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이지스의 몸이 덜덜 떨리다 못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몸을 공처럼 말아도 기분 나쁜 떨림을 숨길 수가 없었다.
무섭지 않다. 난 무섭지 않다. 난 강하다...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소년은 필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저기서 발광하고 있는 것은 죽음의 사자가 아니다. 저것은 원숭이다. 금화 몇 푼을 받고 어른들로부터 필요 없다고 거부받은 비루먹은 아이들을 데려와서는, 자칭 보호자랍시고 호들갑을 떨다가, 결국은 교묘하게 사고로 위장하여 아이들을 처리하곤 하는 인간 도살자가 아니다. 손바닥이 심벌즈 인양 마구 박수를 치며 잔뜩 충혈된 새빨간 눈동자로 사람을 위협하는 것에 무척이나 재주가 뛰어난 원숭이일 뿐이다. 하나도 무섭지 않다. 저건 원숭이다, 원숭이... 질퍽질퍽하게 앉은 자리에서 흥건히 오줌이나 싸대는... 커다란 숫놈 원숭이일 뿐이다.

『이지스, 이 개 같은 놈! 술이 모질라잖아! 카아악, 퉤!』
쿵쿵 소리가 들렸다. 흡사 부셔 버리겠다는 힘찬 기색으로 머리를 벽에다 들이박고 있는 모양이었다. 암컷 원숭이를 부르는 고함도 간간이 질러가면서 말이다. 오늘은 증세가 한층 더 심각하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성을 질러댔다. 하얀 달빛에 악귀가 날뛰고 있다.

『소름끼쳐. 뭔가 불길해.』
이지스의 두 눈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불행하게도 이지스의 예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쾅쾅 하고 장정 서너 명이 힘을 합해도 들기 어렵다던 통나무 궤짝을 집어던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사방으로 부러진 파편들과 물건들이 어지럽게 날아가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서 깨달았다. 오늘 밤엔 커다란 보름달이 떴다. 마귀가 발작하기에 더도 말고 딱이다.

이지스는 다짐하듯 제르가디스에게 말했다.
『살아남는 거야. 죽으면 안돼. 무조건 살아서... 복수를 하자.』
마침내 문이 열리면서 징그러운 그림자가 나타났다. 씩씩대는 숨소리가 천둥이 울려 퍼지는 하늘과도 같았다. 한쪽 손에는 술병을, 그리고 다른 쪽 손으로는 묵직한 몽둥이를 쥔 뷜터스는 으르렁대며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돌렸다.
『우씨. 이놈의 쥐 새끼들이 어디로 가 숨었나... 으히히히.』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뷜터스가 다가왔다. 비야흐로 사냥의 시작이었다.
달빛 아래서... 사내가 다리를 벌리고 섰다. 몽둥이가 휙휙 소리를 내며 가뿐하게 그의 손아귀에서 춤을 추었다. 제르가디스는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엉덩이를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는 벽이다. 앞에는 몽둥이를 든 악마가, 뒤로는 벽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월광. 달빛. 하얀... 미치광이들의 신이다. 달빛이 모든 걸 미치게 만들었다.

『히이익!』
『빌어먹을! 제르가디스?! 뛰는 거야! 무조건 뛰어!』
이지스가 찢어져라 외쳤다. 제르가디스의 손을 붙잡고 잽싸게 튀기 시작했다. 좁은 방구석에서 큰 대자로 두 팔과 다리를 쫘악 벌리고 선 사내를 지나쳐 문 밖으로 도망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허나 고주망태가 다 되도록 술을 마신 뒤라 뷜터스는 자기 몸 가누기도 버거운 상태였다. 그러니 용기를 잃으면 안된다. 이지스는 태클이라도 하는 축구 선수처럼 몸을 납작하게 낮춘 채 우선은 제르가디스의 작은 몸을 뷜터스의 바지 가랑이 틈새로 잽싸게 밀어 넣었다. 뒤로 호박씨 까는 포즈... 나이스! 뷜터스가 오잉 소리를 내는 사이에 제르가디스의 작은 몸은 건너편으로 훌렁 미끌어졌다.

『뒤돌아보지 말고 빨리 도망 가! 도망쳐! 어서!』
아이를 건너편으로 용케 밀어낸 소년이 앙칼지게 소리 질렀다.
『요놈의 쥐새끼 같은 자식이 감히 나에게 알을 까게 만들어?! 넌 이제 죽었다.』
그는 가랭이 틈새로 날아가버린 아이는 거들떠 보지 않았다. 대신 눈 앞에 펼쳐진 식탁으로 눈을 돌려 가냘픈 나무토막처럼 생겨 먹은 이지스를 움켜잡았다.

하얀 달빛 아래서...
제르가디스는 그리하여 볼 수 있었다.
미친 고릴라가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붉은 빛을 한 소년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서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몽둥이가 이지스의 얼굴 한 가운데를 직격했다.

『악마의 자식!』
『으아악!!』

비명은 단 한 번 들렸다.
단지 그뿐이었다.
제르가디스는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어가 얼른 두 귀를 틀어막았다.

하얀 달빛 아래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거대한 그림자와 작은 그림자... 작은 물살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연약한 수초처럼 정신없이 움직였다. 위 아래로, 그리고 다시 좌우로.

『망할 쥐 새끼! 속이 다 뒤집혀진다. 제 에미를 닮아 사악한 것! 망할 쥐 새끼! 다 죽어랏! 네 엄마는 제 아비랑 붙어먹은 더러운 화냥년이었다구. 미친 년이었어. 그러니 얘야? 너도 그냥 지옥으로 가버리렴. 너 같은 건 살 이유가 없어.』
뷜터스는 이미 정신을 잃은 이지스의 몸을 두어번 더 패대기질을 한 다음에 반대쪽 벽을 향해 휙 집어 던졌다.

작은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달빛 아래서 멍한 눈빛을 띈 이지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야말로 멍해서... 아무런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검정색의 눈동자.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한 줄기 붉은 핏물이 그의 셔츠자락을 물들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소년의 입술은 살짝 곡선을 그리며 슬그머니 올라가 있었다.
『이지스!!』
제르가디스는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살아남는 거야. 무조건 사는 거야. 그리고 강해져서... 반드시 복수를 하자.』
반대편에 선 소년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들은 아직 지지 않았다. 승부는 지금부터다.
달빛과 함께 악마가 춤을 추었다.
그의 나이 아직 여섯, 단순히 살기 위해 그들은 힘을 갈망했었다...
월광.



*** 이지스는 아직 죽은게 아닙니다. 착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하이텔 슬레동에 올린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7년이나 8년 전에 쓴 글이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