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티브는「달의 아이」


입구 근처로 자리를 잡은 제로스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그는 환하게 웃기부터 했다. 주변으로 수십 개의 전구가 일시에 불을 밝혔다. 촉촉하고도 화사하다. 그리하여 토끼는 송곳니 돋아난 호랑이 앞으로 태연자약하게 걸어가 앞발을 흔들며 안녕∼♡ 인사를 했다.
『어이, 제로스? 오랜만에 본다.』

호랑이는 당연히 눈썹 찌푸리고 고민을 한다. 장담할 수 있다. 저 토끼는 태어났을 적부터 머리에 나사 하나 빠진 불량품임이 분명하다. 반의 반쪽 엘프가 저주받을 마족에게 친근감을 어필하며 방긋방긋 웃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 무시라? 오랜만?
『어제도 봤잖아요.』

제로스의 냉정한 말대답에 가우리의 얼굴빛이 확 달라졌다. 뭐? 어제도 봤다고? 정말로?!
그러나 당혹감은 잠시다. 토끼는 뇌가 작다. (신이시여!) 때문에 가우리는 아차 싶어하는 표정을 그저 0.3초 가량만 달랑 유지했을 뿐이다. 핫핫핫, 그랬던가. 난 잘 모르겠는데. 가우리는 사람 좋게 웃으며 핏기 가신 뺨을 도로 살구빛으로 채색했다. (저게 능청이 아니라는 점에서 제로스는 진실로 할 말을 잊었다)

『응? 그런데 너 지금 뭐하고 있냐?』
『으아악! 에비∼!! 절대로 안됩니다. 저리로 가십시오, 쉭쉭!』
제로스는 정색하여 가우리를 밀어냈다. 악수나 한 번 하자고 다가온 사람의 어깨를 힘 주어 확 떠다미는 법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느냐 항의해도 하는 수 없다. 우리의 토끼 군이 섭섭하다며 풀 죽은 표정을 지어도 그렇게 한다.

『방해하지 말아요.』
『이봐, 너무하잖아. 그렇게 인상 찡그리다니. 난 그저 네가 가슴에 껴안고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는... 그놈의 치즈 생크림 케이크가 참 맛있어 보인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네가 염려하고 있는 것처럼 한 입만 달라거나 그러진 않을 거라고.』

그러면서 침은 왜 꼴깍꼴깍 삼키고 있는데?
마족은 표독스런 눈빛으로 가우리를 노려보았다.
『못 줘요.』
제로스는 딱 잘라 선언했다. 없는 돈 있는 돈 긁어 모아「달의 아이」카페에 가서 손수 사가지고 온 치즈 케이크다. 쇼나라는 이름의 그 집 종업원이 엄지손가락 내어 밀고 보증까지 한 불멸의 역작이었다. 때문에 제로스는 여느 때와는 달리 대놓고 신경질을 부렸고... 정말로 한 입 달라는 소릴 하지 않았음에도 가우리를 떠밀었다.

사실 까놓고 얘기해서 달라는 소리를 안 하고 있으면 뭐 하느냔 말이다. 손가락을 착 들어 환상의 케이크를 주욱 훑으려 하고 있음에랴. 아차 하다간 케이크 위로 꽤나 깊이가 나가는 밭고랑이 하나 만들어지게 생겼다. 제로스는 펄쩍 뛰면서 가우리의 흉악한 음모를 재빨리 분쇄했다. 쉽게 말하자면 귀족 자녀들을 훈계하는 베테랑 가정교사의 위엄으로 손가락을 탁 쳐내었다.

『경고하는 데... 그 흉악한 손가락 빨리 치워요.』
『우웅. 제로스... 너 정말 진득하게 짜구나.』
당연하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쪽쪽 빨아대는데 짜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포기하세요.』
완강하게 버텼다. 발로 밀었다. 팔로 가렸다. 쉭쉭, 물렀거라.

가우리는 크게 낙담해서는 고개를 떨구었다. 눈시울이 눈에 띄도록 붉어지긴 했지만... 얌전히 뒤로 물러섰다. 뒤돌아 터벅터벅 걷는 그의 모습이 쓸쓸한 느낌을 자아냈으나 겨우 그런 걸로 가을 낙옆을 헤치며 정처없이 걷는 노란 바바리 코트의 중년 남자를 떠올리진 말자. 한적한 겨울 바닷가를 걸어가며 담배 하나 입에 문 재수생을 생각하지도 말고. 100번 선을 봤으나 죄다 딱지를 맞은 노처녀의 짜증스러운 심정도, 지하철에 올라타는 순간 깜빡 잊고 부엌 싱크대 수도 꼭지를 잠구지 않았음을 떠올린 40대 아줌마의 초조감도 여기선 언급하지 말자. 겨우... (겨우?) 치즈 케이크다.

『치사하다, 제로스.』
『누가 할 소리!』
『원망 천 번 할 거야.』
『만 번이라도 하쇼. 이건 못 준다니까요.』

가우리는 손을 털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갔다. 차게 식힌 엽차 한 잔 떠다 놓고, 쫄쫄 굶는 신세를 한탄하며, 물 한모금 마셨음에도 갈증이 채 가라앉지 않음을 절실하게 느껴가며 그냥 앉았다.

리나가 마기사 상점에 가서 구멍 뚫린 망토를 수리하고 오겠다며 외출한지 이제 반나절.
가우리는 마흔 일곱번째로 건너편에 자리한 벽시계의 분침을 확인했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은 했으나 역시 많이 늦고 있다. 가우리는 지루하다는 기색을 감추지도 못한 채 발가락을 연신 꼬물거렸다.
『리나도 참. 내가 지적했던 그대로 진작에 세탁소를 찾아 갔으면 이렇게 늦진 않을 터인데.』
찢어진 천을 수리하는데 왜 마기사 상점을 찾는답시고 난리법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고로 수박을 사려면 과일 가게에 가야만 하는 법. 축구공을 진열해 놓은 스포츠 용품 가게에 가보았자 수박은 구경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일반 상식이다. 마기사가 옷을 꿰매준다? 미싱 돌리고 드륵드륵? 오우, 노. 일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리나의 귀가는 당연히 늦어질 수밖에 없다. 가우리는 척 소리가 나도록 양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놓았다. 박박 우기며 세탁소 이야기를 꺼내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만...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고도 리나는 맨날 신경질이지. 못 말린다니까.』

《쾅---!!》
누가 뭐랬나. 빨강 공룡이 대지를 쿵 박찼다. 벌컥 문이 열렸다.
『나쁨 놈의 자식! 망토 수리비에 금화 다섯 개?! 실력도 변변찮은 시골뜨기 마기사 주제에. 순 바가지 같으니라구. 젠장!』
목소리가 우렁찼다. 역시 지금의 리나는 저기압이 맞았다.

입구 쪽으로 가까이 해서 자리를 잡았던 제로스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드디어 막이 올랐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노고를 아까지 않으며 정교한 무대 장치를 마련해 두지 않았던가. 생각 같아서는 손바닥이라도 싹싹 비벼보고 싶었다. 희색이 만연하여 어깨를 활짝 펼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헤헤헤. 그럼 확인해 보자.

저쪽의 가우리는 닝닝한 엽차 한 잔 달랑 테이블에 올려놓은 상태.
제로스는? 특제 치즈 케이크와 함께. 준비한 디저트용 접시도 둘, 스푼도 둘.
좋을시고, 좋을시고!

원래 대로라면 리나는 두고 볼 것도 없다며 곧장 가우리가 앉아있는 좌석으로 걸어가 버린다. 야속할 정도로 그냥 가버린다. 한눈이라도 팔면 소원이 없겠건만 이놈의 여편네는 여관 문을 박차는 바로 그 순간부터 오직 가우리만 찾는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모르시다시피, 가우리는 엘프의 피를 이른 사내답게 눈부신 금발 머리카락의 소유자다. 그것도 허리를 덮는 장발이다. 어두운 촛불 아래서도 순도 99.9%의 순금인양 번쩍번쩍 빛을 뿜는다. 앉은 키 크겠다, 돋보이는 빛을 가졌겠다... 머리카락 보인다 꼭꼭 숨어라 해도 문 열기가 무섭게 가우리는 잘 보였다. 고로 에너지 낭비는 일절 없다. 척 보고 거기로 간다. 가우리 곁으로 가서 털퍼덕 앉아버린다. 물에 빠진 제로스가 사람 살리라 손을 흔들어도 구명 보트는 가까이 오지 않는다. 저 어두운 강물 밑바닥으로 꼬르륵 가라앉기 일보 직전이라고 해도 리나는 고무 튜브를 던져주지 않는다. 죽든지 살든지, 그것은 마족의 팔자. 그녀는 차별대우를 무섭게 했다. 한국인이 화교 멸시하는 거랑 일본인이 재일교포 밟아대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제로스는... 이제껏 깨끗하게 무시만 당해왔다.

《오늘은 그냥 지나쳐 가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요》
일부러 달각 소리를 내어 접시를 움직였다. 그럼 맛있는 케이크를 먹어봅시다∼♬.
원래 달짝지근한 거라면 사죽을 못쓰는 제로스다. 초컬릿 아이스크림에 딸기쨈에 바닐라 푸딩에... 따뜻하게 덥힌 우유에다가 커다란 스푼으로 설탕을 퍽퍽 집어 넣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며 그걸 저어 마시는게 제로스의 취향이다.
한 입 먹고 싶은 나머지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로 주먹을 올려놓고는 수절 과부처럼 손톱으로 자기 살점을 마구 쥐어뜯는 고행을 자처했던 일도 이젠 끝이다. 제로스는 최대한 우아하게 손목을 움직여 달덩이 모양의 케이크를 반으로 싹뚝 잘랐다. 조심조심... 나이프를 사용해서 접시로 반달 케이크를 잘 올렸다. 입안으로 침이 고였다. 좋은지고, 좋은지고. 안면에 미소가 한 가득이다. 제로스는 리나의 뜨거운 시선을 최대한 만끽하며 스푼을 쥐기 이전에 잠시 뜸을 들였다.

이럴 때 템포 조정은 상당히 중요하다. 당기고 놓고, 밀고 땡기고. 그는 허겁지겁 케이크를 집어 삼키는 식의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세상 일이라는 건 다 순서가 있는 법이다. 포도주를 마실 적에는 그 향기를 먼저 코로 즐기고, 다음으로는 좋은 포도주를 골라내어 자신을 대접한 주인을 짧막하게 칭송하는 것이 적당하다. 숭늉 마시듯 후륵 마셔버리고는「좋은데요?」라고 말해서는 순서가 틀린다. 여성에게 구애의 뇌물(...)을 바치는 행위도 이와 많이 다르지 않다.
파란 정원지기 새는 둥지 앞마당에 파란색 정원 석을 늘어놓고는 암컷에게 감상의 시간을 제공한다. 맘에 드십니까? 그럼 한바퀴 돌아보십시다. 수컷 정원지기 새는 구석에 틀어박혀 가여울 지경으로 발발 떨면서도 암컷을 향해 날개짓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신 멀찍이 떨어져 암컷의 결정을 얌전히 기다린다. 구구 울지도 않는다. 그건 점잖치 못하니까. 그저 뜨거운 눈빛을 보내며 암컷이 자신의 집과 정원을 마음에 들어해 주길 기도하고 또 기도할 뿐이다.
제발 날 선택해 주오. 그리고 나의 알을 낳아주오.

제로스는 바짝 긴장해서는 스푼을 쥔 오른손을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다가 일단 중지... 또 다시 시간을 끌고... 이리 와서 보고 가요. 내 정원이 마음에 드시나요?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요. 나... 노력 많이 했다구. 수컷 파란 정원지기 새는 떨리는 마음으로 암컷을 흘끔 쳐다보았다.

웬일이니, 웬일이니! 지금 이 순간, 암컷 정원지기 새는 언제나처럼 쿼터 엘프에게로 곧장 가지 않았다. 조금은 주저하는 기색으로 제로스가 준비한 앞마당으로 슬그머니 내려섰다. 날개를 접고는 구구구 울었다. 약간은 떨어진 위치였지만 안쪽으로 더 다가올 확률은 크다.
제로스의 눈이 불을 뿜었다. 그는 양손을 주먹 쥐고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맛있어 보이죠? 그럼요... 특제 케이크예요. 그는 필사적으로 케이크를 강조했다.
보시라, 드시라, 나에게로 안기시라!
그의 노력은 보답 받아 리나가 한 걸음 더 그에게로 걸어왔다.

.......... 그런데.
리나는 저기압.

암컷 정원지기 새는 수컷 새가 준비한 문제의 푸른색 정원석을 집어다가 훌렁 뒤돌아 가버렸다. 부담없이 그렇게 했다. 양 손으로 케이크 접시를 끌어안더니만 사뿐사뿐 경쾌한 발걸음으로 잘도 날아가 버렸다. 제로스의 턱이 툭 떨어지든 말든 관심도 없다. 그녀는 가우리 앞으로 접시를 탁 내려놓고는 그대로 착석해 버렸다.

일단 앉았으니 다음으로는 먹자 타임.
가차없이 스푼으로 그 표면을 후벼팠다. 크게 그 조각을 떠서는 입에 넣었다.
이.럴.수.가.
제로스는 그대로 굳어져 돌이 되었다.

『리나. 그렇게 맘대로 가져와도 되니?』
저편에서 가우리가 가만히 속삭였다.
리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때서. 제로스 녀석이 달콤이를 눈앞에 두고 안 먹는 게 이상하잖아. 딸기쨈 병 속에 얼굴을 처박은 화려한 전적을 가진 주제에 먹기를 망설여? 스푼을 쥐고 머뭇거린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분명 탈 났어. 그러고도 먹을까 말까 고민을 하고 앉았으니... 불쌍하잖아. 그러니 이쪽에서 알아서 서둘러 고민의 싹을 제거해 줘야지.』
『으응... 하긴. 제로스 표정이 아까부터 영 이상하드라.』

잠시 파랗고 붉은 시선이 테이블로 고개를 박아버린 제로스에게로 와서 박혔다.
약 1초의 시간 뒤, 그들의 눈망울은 곧장 원위치로 복귀했다.
『봐. 지금도 이상하지? 시푸러둥둥한 꼬락서니가 꼭 제르가디스 같잖아.』
『음.』
『속이 이상할 적엔 이런 류의 음식은 먹으면 크게 탈 나. 그냥 우리가 맛있게 먹어주는 게 녀석을 위한 일이야. 그러니까 가우리? 옆구리 떼어다가 녀석 몫으로 남겨둘 생각일랑 하지도 마셔. 소용 없다구. 아깝잖아.』
리나의 주장은 단호했다.

그래도 우리의 아빠 가우리... 친절한 마음에 식당 주인에게 새 접시를 하나 청한다.
『에이. 그래도 저렇게 소리 내어 막 우는데... 리나? 쬐금 남겼다가 주자.』
그러면서 가우리는 깨끗한 부분만을 골라 새 접시에다가 담았다.
『조금만이라면 별 무리 없이 소화해낼 수 있겠지. 아무리 배가 아파도 말이야.』

남의 모피를 훌렁 벗겨간 주제에 토끼는 밤이슬에 감기 걸리면 곤란할 거라면서 풀로 지은 옷을 내어 밀었다. 베시시 웃으면서 약간은 부끄럽다며.
제로스는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는 한 입에 잡아먹었으면 여한이 없겠으나...
문제는 토끼의 배후령으로 무적의 티라노사우르스 공룡이 자리를 잡았다는 점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