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도 안되는 사투리 표기는 무시하여 주셔용.


『흐음. 조금 기다려보슈. 그래! 생각난다, 생각나!』
고된 노동의 댓가로 여관집 안주인의 종아리는 퉁퉁 부어 있었다. 손가락 크기도 거진 소시지만 하다. 그런 손을 시커먼 앞치마에 문지르다 말고 짧막하게「앗!」비명 질렀다. 지금만큼은 사큰사큰 쑤시는 무릎 통증도 다 잊어먹었다. 제자리에서 껑충 뛰는데 솔직히 마룻바닥의 안녕이 심각하게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동의를 구하려는 걸까? 이어 그녀는 밀가루 반죽이 떨어지는 손을 휘둘러 한참 맛있게 감자 수프를 떠먹던 죄 없는 단골 손님의 어깨를 세차게 후려갈겼다.

『아이슨, 댁도 기억나슈? 왜 있잖아유. 비가 추적추적 오던 날에 어린애 하나 데리고 우리 집에 왔었잖유.』

이 어연 호들갑 떠는 코끼리란 말이냐.
아이슨은 들고 있던 수저를 테이블 밑으로 떨어뜨림과 동시에 쿨럭대며 기침을 터뜨렸다. 일명 솥뚜껑 펀치의 효과다. 그렇게 세게 후려쳤으니 당연히 사래 들린다.
허겁지겁 손수건을 찾던 사내는 원망을 가득담아 안주인을 올려다 보았다.
듣자하니 먹는 개도 건들지 않는다던데.
남자는 쌍씸지를 곤두세웠다.

『봐라. 빨랑 식사 주문이나 받지, 엉뚱하게 신관 나으리랑 수다 떨면서 왜 멀쩡한 날 때리고 지랄이랴? 평소 악 감정이라도 있었나, 이거 먹다 체하면 책임질깅가!』
『씰데 없는 걱정. 체하긴 왜 체하겠슈. 하여간 아이슨도 기억하지유?』

쟁반에 받치고 나온 엽차를 테이블에 쾅 소리나도록 - 정말로 쾅! 소리였다 - 내려놓은 안주인은 이쪽에 앉은 제로스와 저쪽에 앉은 단골 손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원래 이런 종류의 인간은 괜찮다 싶은 수다꺼리가 생기면 있는 얘기, 없는 얘기, 알아서 척척 까발리고 보는 법이다. 올록볼록 살이 튀어나온 두툼한 옆구리로 손을 얹어가며 호흡을 가다듬는 저 자세를 보라. 시골 아낙네의 전형적인 입심을 몸소 보여주마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있지 않는가. 산적떼를 상대로 술 팔아먹던 관록이다. 그녀는 침 튀겨가며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엄청나게 예쁘장한 계집아이를 품에 숨겨가지고 왔었슈. 망토 속에서 고개만 쏙 내미는데 인형인줄만 알았다니까유. 하여간 그 날은 비가 좀 내렸으니까... 망토자락으로 잘 싸가지고는 무슨 봇짐처럼 가슴에 안고 있더구만유. 나이도 어려 보이는 총각이었는데 자기는 홀딱 젖었으면서도 애는 엄청 잘 보살피더구만유.』

그녀는 다시금 감동하였다.
그 고귀한 희생 정신이라니!

흰 옷의 사내는 최대한으로 등을 구부려 자신의 몸을 일종의 빗물막이 방패로 삼았다. 옆에서 보면 흡사 노틀담의 꼽추 저리가라였다. 그런 자세로 산 하나를 넘었다는게 가능한지 아닌지는 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노력한 보람은 있어 품에 안은 아이는 물방울 하나 묻지 않았다. 물에 젖은 생쥐로 변한 사내는 정작 허리도 세우지 못하고 입구 바로 앞에서 철푸덕 쓰러졌지만... 굉장하지 않은가. 안주인은 성스러운 교회 종소리를 들었다며 두 손을 꼬옥 모아 쥐었다.

『다들 본받으슈.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남정네들은 가슴에 십자가 긋고 회개하시라고요. 댁은 지 새끼 귀한 줄도 모르고 막 아무렇게나 굴려대지유? 그럼 못∼씨유.』
『얼라. 내가 내 자식 굴리는지 안 굴리는지 뭔 재주로 안다고 그래?!』
『내가 왜 몰라유! 접디 클라라를 장작으로 막 두둘겨 팼잖아유!』
『그거야 그년이 밥상도 안 차리고 빈둥대고 놀아댔으니까 그랬지. 이유도 없이 매질하는 인간이 아냐, 나라는 남자는! 내가 그렇게 형편 없어 보이나?!』

일이 좀 곤란하게 되었다. 그다지 영양가 없는 입씨름이 한동안 계속되는 사이, 제로스는 무료함을 달래가며 손톱을 딸각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 뭐가 그리 잘났느냐, 서로 언성을 높여 삿대질을 하는 인간들 사이로 제3자인 자신이 끼어들 수는 없다. 괄괄한 성품의 안주인은 상대의 콧구녕을 꿰뚫겠다며 검지손가락을 번쩍 쳐들었고, 남자는 이를 방어한답시고 손바닥을 휘둘렀다. 시골 사람들 특유의 시끄러움이었다. 식당 전체가 요동을 쳤다.

늘상 치루는 그렇고 그런 행사.
밥을 먹던 사람들은 오히려 재미있어 하는 눈치였고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들은 아예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척 무시를 한다.

「당분간은 신경 끄고 있어야겠군.」
제로스는 한숨지으며 음식 메뉴판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게 그게 괜한 짜증이었다. 곁눈질로 제로스의 표정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있던 여주인은 이래서 아니되겠다 재빨리 마음을 고쳐 먹고는 엉덩이를 돌렸다.

『하이고~! 정작 물어본 사람이 그렇게 시튼둥한 표정을 지으면 지는 섭하쥬. 사람이 잠시 딴짓했다고 고렇게 새침떼기처럼 굴면 안되는 법이어유.』
『아, 아니... 저, 저는!』
『아따, 내 말부터 들어봐유. 신관 나으리님. 그러니까 말예유...』

오히려 잘된 일일까? 중간 생략, 이하생략, 안주인은 장황하게 그 날의 있었던 일을 떠벌리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그 날은 비가 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수준이 아니라 제법.
흰 옷의 사내는 가쁜 숨을 토해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가게 유리창 위로는 빗물이 바다처럼 흘러 내렸다. 물 먹은 구두는 바닥으로 투명한 빛깔의 오줌을 질질 쌌다. 어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옷자락에서는 덜 쥐어짠 이불 빨래마냥 물이 한 바가지나 뚝뚝 흘러내렸다. 얼마나 지쳤으면 뒤집어쓴 후드를 아래로 내릴 생각도 못한 채 한동안 꼼짝도 하질 않았다. (생각해보니 사내는 그놈의 후드를 끝까지 내리지 않았다) 주위로 금새 작은 물 웅덩이가 생겨났다. 왁스를 칠한 바닥이 단번에 망가지는 순간이었다.

『성질 났지유. 나중에 얼룩진 곳에 기름 걸레질 하느라 죽는 줄 알았슈.』
안주인의 푸념은 나중으로 하자.
어쨌든 여관 주인은 아이가 딸린 몸이라는 걸 참작, 그다지 달갑지 않은 손님에게 제까닥 따뜻하게 덥힌 마른 수건부터 대령하고 보았다.
사내는 조금 주춤거리는 눈치였다. 평소 박대를 많이 받고 살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검사라는 종자가 애시당초 그렇게 생겨 먹어서 그런 건지, 아무튼 부뚜막에 기대어 앉은 강아지처럼 묘하게 번들거리는 눈을 하고는 그걸 낮게 내리깔았다. 예의 바르게 고맙다는 인사는 했다. 그래도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주인의 증언은 이어진다.
『어찌나 신경이 예민하던지 우리집 양반이 거북살스럽게 얼굴을 붉히든 말든, 수건을 앞뒤로 돌려보더구만유. 무신 이상은 있지는 않나 확인하더라고유.』

그런데 정작 그 다음 행동이 기가 막혔다.
《유나미스? 이리 오렴. 따뜻한 수건이야.》
정말이지 애라면 꿈뻑 죽는 사내였다. 정작 자기 얼굴을 닦아내기는커녕 멀뚱멀뚱 서있는 아이를 손짓해서 부르더니 그걸로 아이의 몸을 칭칭 감아버리는 것이었다.
보는게 다 황송할 지경이었다. 따스하고 보들보들한 감촉이 기분 좋으냐면서 정성스레 이곳 저곳을 문질렀다. 추위를 느끼고 있던 터라 아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헤죽 웃었다.
분명 예쁘기는 예뻤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가 웃자 사내는「아이, 좋아♡」자지러졌다.

『임자. 그 작자, 후드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며. 얼굴도 안 보였는데 그걸 어떻게 아는감?』
『여자의 직감이유.』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해보자.
《에헴! 이보슈. 그러다 폐렴 걸리겠수다. 애는 그만 잡으슈.》
여관집 주인의 한마디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흰 옷의 사내는 그제야 상황을 깨달았은 듯 싶었다. 일단은 젖은 옷을 말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었다. 식사도 해야 했고 적당히 휴식도 취해야 했다. 사내는 부랴부랴 몸을 일으켜 숙박 명부에「Z.G」라고 서명을 했고 하루치 투숙비를 미리 지불한 다음 211호 열쇠를 받아 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흰옷의 남자는 Z.G. 라는 맨 처음의 서명을 두 줄로 벅벅 지운 다음, 나중에 Z. 라고 고쳐 썼다)

식사를 방에서 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하겠느냐 물어본 것이 전부.
특별히 주문하는 내용도 없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항상 근방을 지나치는 뜨내기 손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신관 나으리님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 무릎이 통 좋지가 않아유. 식사를 2층으로 가져와 달라니까 신경질이 좀 나긴 났지라. 내려와서 먹으면 어디가 어떻게 되냐, 한마디 툭 쏘아부치고 싶었슈. 하지만 진짜 지친 모습이었거든유. 계단을 올라가는데 무신 바위 올라가는 소리가 나더라고유. 투웅, 투웅... 이렇게유. 마누라도 없이 그러고 있는 걸 보니 불쌍해 보이데유? 그래서 아∼뭇 소리 않고 상을 차려서 쟁반에 잘 담았슈. 딸년도 어려 보이던데 고생이 오죽 심했겠슈.』

그녀는 넙적한 감자부친개처럼 생긴 외모와는 달리 심성 하나는 고운 여자였다. 그래서 온갖 재주를 다 부려 맛있는 빵을 구웠고 특별히 좋은 재료들만 골라 특제 스튜를 만들었다. (그 날은 비가 와서 손님이 거의 없는지라 시간이 널럴했었다는 말은 쏙 빼놓고 하지 않았다) 큼지막하게 고기도 썰어 넣었고 달짝지근한 당근도 보기 좋게 다듬어 듬뿍듬뿍 넣었다. 피망도 썰어 한웅큼이나 솥단지 속으로 밀어 넣었다. 가장 아끼는 접시를 꺼내 국자로 하나 가득 펐다.
양념 좋고, 땟깔 좋고, 냄새 좋고!
그녀는 스스로 대단히 만족스러워 하며 2층으로 먹을 걸 날랐다. 옆구리로는 손녀 딸이 입던 어린애 잠옷 한 벌도 꿰차고서 말이다. (정작 바위가 위로 올라가는 쿠웅, 쿠웅∼ 소리가 난 적은 아까가 아닌 그때였다)

그런데 별안간, 안주인은 고개를 획 치켜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들어보슈, 신관 나으리님. 사내는 세탁장에라도 갔는지 자리에 없더구먼유. 홀라당 발가벗은 아이만 침대에 동그마니 앉아 있던데... 캬아! 고것 참. 피부도 고운데다 눈이 부리부리한 것이 감질나게 잘 생긴 가시나였슈. 나중에 엉덩이 벌어지면 사내들 수십 명은 가뿐하게 잡게 생겼더구만유. 여자인 내가 봐도 침이 줄줄 흘렀으니까 그건 확실해유. 엄마가 어떻게 생겼으면 저런 딸이 나올까나. 조막막한 허벅진데도 탐스럽기 그지 없더구만유. 절로 눈 벌어지데유?』
『아이구, 호색 여편네!』
『아이슨? 고개 처박고 나머지 밥이나 먹으슈. 하여간 그랬는데...』
안주인은 그 푸짐한 엉덩이를 벅벅 긁어가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 가시나가 자기 나이 또래처럼 낯을 많이 가립디다. 고것 참 예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니까 질겁을 하면서 피라더라고유.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도 쌀쌀 맞게 고개를 팽~ 돌리는데 요년이 사람 말에 제대로 대꾸를 하질 않더라구유.』

그러나 그녀는 무려 한 다스의 아이를 길러낸 베테랑이었다. 아이가 배타적으로 나올지언정 잠시 잠깐이라도 어린애를 발가벗은 상태로 내버려둔다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고로 입을 굳건히 다물고 이마에 굵은 내천자를 그린 다음, 새 잠옷을 거머쥐고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물론 그게 웃음이라면 감자가 고구마 맛탕 요리 재료가 될 터였다)
아이는 움찔 몸을 떨었다. 안주인은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단순한 행동 하나로 두 팔을 하늘로 높게 치켜 올리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될 거라는 걸 분명히 했다.

얼랑 시키는대로 하는 게 좋을 게야.

얼마나 흉흉했으면.
계집아이는 반항도 못해보고 꼬리를 내렸다. 작게 한숨을 푸욱 내뱉고서 무척 창피스럽다며 몸을 빙글 돌려 등을 보였다. 몸에 감은 시트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뭔가 요염한 분위기로 꼬맹이는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다.

『어연 일인지 나도 뺨이 확 달라올랐슈. 어쩐지 야시시 하더라니까. 별 일이쥬.』

그래서 서둘렀다. 어린애가 대한독립 만세의「대」자를 외치는 순간 푸대자루가 훌쩍 뒤집어 씌어졌다. 옷이 좀 큰지라 작은 머리통이 쏙 들어갔다. 안주인은 재빨리 아기 돼지 무늬가 그려진 분홍 잠옷을 아래로 쭉 잡아당겼다. 옷섶에 엉킨 몇 가닥의 붉은 머리카락을 잘 어루만져 주었다. 그것으로 옷 갈아 입히기는 끝, 그녀는 헛기침으로 어색해진 분위기를 잘 무마시킨 뒤, 퍼다 나른 밥을 테이블에 차려놓기 시작했다.

《배가 아무리 고파도 아빠가 돌아오면 그때 같이 숟가락을 들거라. 알갔는강?》
와그닥 소리를 내며 상을 차리던 안주인이 푸짐한 엉덩이를 요리조리 흔들다 말고 즉석 식탁 예절 한 구절을 주워 삼켰다.

《아빠라니? 나에겐 아빠가 없는데.》
《가시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나. 아빠 말이야, 아빠. 세탁장에 간 네 아빠.》
《흐음... 제르 할아버지? 알았어, 기다렸다 같이 먹을게.》
《얼라. 가시나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할배라니! 그기 무신 소리여? 때찌!》
《왜? 엄마의 아빠니까 할아버지가 맞잖아.》

말세였다.
『세상이 돌아버렸슈. 자기 딸년이 할아범이라 부르는데 그걸 가만히 내까려두었으니 말예유. 요즘 여자들도 그래유.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질 않나, 아빠라고 호칭하지를 않나. 오죽하면 아이가「엄마의 아빠이지 내 아빠가 아냐.」라고 하겠슈.』
이야기 도중에 말을 끊은 안주인은 오페라 가수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허리를 빙글 돌렸다. 탱크의 진격을 진작케 하는 자기 과시적 돌출 행동이었다. 반사 속도 뛰어난 제로스야 재빨리 의자 채 뒤로 물러나 재주 좋게 피하고 보았지만 이래저래 불운한 아이슨은 나 죽는다 버럭 고함 지르며 앉은 그 자리에서 털썩 고꾸라졌다. (그가 얻어맞을 때엔 정말로 무시무시한 퍽!! 소리가 났다)

『하지만 부인.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애 아빠가 아닐 수도 있잖겠어요?』
제로스는 피사의 사탑인양 45°뒤로 기우뚱 물러난 자세에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신관님도 참. 어깨도 좁아 터진 모양새가 기껏해야 스무 살 초반이겠던데 할아버지가 될 수 있으면 도대체 몇 살에 동정을 잃어야 가능하겠느냐고유. 내 잘난 세째 아들 놈도 암만 빨라봤자 열 셋이었슈. 택도 없는 소리유. 으허허허.』
하하하...;; 순간 근처에서 귓바퀴 쫑긋 세우고 있던 남정네들 대다수가 떼거지로 얼어붙었다.
여, 열 셋!
허나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부지런히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인간들 이야기는 여기서는 더이상 하진 않겠다. 소수 한 잔 걸치기라도 한 것처럼 뺨을 붉혀가며「부, 부러운지고!」이러는 모양새처럼 흉악한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분위기 썰렁해지니까 얼른 각설하자.

하여간 그로부터 정확히 십여 분 뒤, 안주인은 마실 물과 컵을 쟁반에 담아 다시 손님 방으로 올라갔다. 두 손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문에다 발길질을 살살 했다. (말로는 살살 걷어찼다지만 정작 대포 터지는 굉음이 났다)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한 걸까, 아이는 포크를 쥐고 놀란 눈으로 이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아기 아빠는 여전히 후드와 머플러를 뒤집어쓴 몰골로 의자를 끌어다가 자리에 막 앉으려던 참이었다.
글세올시다, 전쟁터에서 흉한 상처를 입은 얼굴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그랬던지 흰 옷의 사내는 나이프를 쥐려다 얼른 무릎으로 손을 내렸다. 수도승처럼 후드를 한층 더 깊숙이 눌러 썼다.
뭐, 누구에게나 말 못할 사정이라는 건 있는 법. 안주인은 눈치껏 자기 할 일에만 열중하며 일부러 땅바닥으로만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내 또한 고개를 옆으로 돌려 주섬주섬 움직이고 있는 그녀를 외면했다. 아이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물 컵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아이의 손에 어린이용 머그 컵을 쥐어주고 철저하게 사내로부터 등을 돌렸다.

『얼렐레. 임자가? 천지가 개벽했나, 내 믿을 수가 없구마. 거짓말 아뇨?』
『방안에선 그랬슈. 나가서 방문 살짝 열고 들여다볼 적엔 눈 크게 올려 떴지만.』

식사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은 사람들이라고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얌전했다. 간간히 달각달각 접시 표면에 포크가 부딪치는 소음이 들리는 것이 전부였을 뿐, 부녀는 조용조용 숨을 죽여가며 먹는 일에 열중했다.
직접 눈으로 본 역사는 전무했지만 아마 귀족이 저리 먹을 것이다. 눈이 휘둥글 떠지도록 움직임이 우아했다. 그 점에 관하여, 안주인은 강조에 강조를 더해가며 한바탕 일장 연설을 퍼부었다.

아름답게 밥을 먹기.
『그럼유, 내 눈으로 똑바로 봤시웅.』
가끔 이길을 지나치곤 하는 배불뚝이 상인들도 저런 식으로는 포크를 잡지 않았다. 의젓하게 허리를 펴고 최대한 점잔을 뺀다고 해도 잔을 집어올리는 손의 모양부터가 틀렸다. 뭐가 어떻게 틀리냐고 꼬치꼬치 따져가며 물어본다면 딱히 설명할 재주가 없다는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 아무튼 그네들 부녀는 여왕님의 식탁에 초대되어 간 이웃 나라의 높으신 나으리님처럼 식탁을 지배했다. 도구를 사용해서 푸성귀를 덜어내는 동작이 어찌나 간결하고 엘레강스 하던지! 남편에게 귀를 잡혀 아래층으로 질질 끌려가기 바로 직전까지 그녀는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도통 눈을 떼지를 못했다.

『귀족이라고 우리랑 뭐가 달라. 발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밥먹는 건 어딜 가나 누구든지 다 똑같아. 허풍 떨기는... 쳇!』
『시끄러워유, 아이슨. 댁은 직접 보질 않아서 그딴 소릴 지껄이는 거예유.』
그녀는 다시금 생각난다며 양손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쥔 흉내를 내며 보이지 않는 스테이크를 써는 흉내를 내었다.
그런게 그게 영... 엘레강스? 워째 다이나믹하기만 한데?
아이슨은 한심해 죽겠다며 한쪽 팔로 턱을 괸 자세에서 눈동자를 굴려댔다.
무리도 아니다. 지금의 안주인이 해 보이는 판토마임은 몽둥이로 때려 잡은 곰을 산채로 뜯어 먹는다는 포즈는 이런 것이다∼ 라고 하는 일종의 강의 같았으니까.
그러나 먹는 자세와 매너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지는 말자.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작 중요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안주인은 얼굴 색을 달리하고는 초조한 기색으로 땀투성이 이마를 훔쳤다.
(역시 곰 잡아 먹는 흉내였다. 그새 땀이 다 흐르다니?!)
『그로부터 한 40분 지나서였시유. 식사가 끝났을까 싶어 그리로 가봤쥬. 먹던 그릇을 내비두면 객실에 고약한 냄새가 스며들지 않겠슈? 그래서 치우러 갔쥬.』
이번에는 양손이 자유로웠기 때문에 공손히 주먹으로 - 결코 손등이 아니었다 - 노크했다. 그렇게 사람 왔다는 신호를 일단 보내고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다음으로는「아이, 추워♡」얼어 붙었다.

『어찌된 일이냐 물어봤지라. 그런데 애비고 딸이고 아무도 대답을 않더구만유.』
방안의 공기는 맘모스를 통째로 박제하는 냉동 창고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서 시퍼런 스파크가 톡톡 튀었다. 특수 효과 만세. 그 날의 경악을 고스란히 회상해낸 안주인은 거꾸로 날아가는 슈퍼맨을 목격했다며 꼬꼬댁 회를 쳤다.
『시상에!! 아빠랑 아기랑 살벌하게 눈싸움을 벌이고 있더라∼ 이거였슈!』

발단은 피망이었다.
아이는 피망 냄새가 역겹다면서 (이 부분에서 안주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접시 바깥으로 피망을 골라내었다.
얌전히... 묵묵히... 그러나 단호하게.

그곳은 누가 뭐래도 여왕님의 식탁이었다. 말랑말랑한 빵을 손으로 툭툭 뜯어내던 사내가 이 일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리는 만무했다. 남자는 손을 들어 아이의 손등을 가볍게 찰싹 후려쳤다. 그리고 골라내었던 피망조각을 도로 아이 몫의 접시 속으로 정중히 밀어 넣었다.
사내의 등짝만 보이는 각도에 자리잡고 서있던 안주인은 그의 손이 어떤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는지를 그대로 다 보았다. 이윽고 사내는 점잖은 목소리로 아이를 혼내켰다.

《유나미스 가브리에프? 편식을 하면 네 엄마처럼 키가 자라지 않는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전부 다 먹어. 피망은 몸에 좋은 음식이야.》
《할아범? 엄마는 밥을 무진장 많이 먹는 사람이었어도 키는 작았어.》
《그것 봐. 엄마는 어렸을 때 아무거나 잘 먹지 않았어. 나중에 뼈저리게 후회하고는 죽어라 많이 삼켰지만 결국은 소용이 없었지. 심지어 공룡까지 먹어봤어도 키는 커녕 가슴도 나오지 않았어.》
사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짐짓 불쌍해 죽겠다는 듯 입으로 쯧쯧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강조했다.
《가슴도 나오지 않았단다. 알겠니.》

그래도 애는 완강히 저항하며 입술을 한자나 앞으로 삐죽 내어 밀었다. 그딴 식으로 바람을 잡아보았자 결코 넘어가지 않는다. 아이는 또다시 접시 속의 퍼런 외계인을 낚시하기 시작했다. 사내가 눈을 부라려도 그 행동엔 거침이 없었다.

《엄마는 엄마, 나는 나야. 먹기 싫어. 난 이거 먹지 않을래.》
《유나. 그러면 못 써. 유나가 피망을 먹지 않으면 제르는 화를 낼 거야.》

뭔가 밀린다 싶자 남자가 마지막으로 내어민 카드가 바로 그거였다.

남자들이여?! 이런 말은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는 말이다.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결코「나 화낼 거야」라는 말만은 하지 말기 바란다. 열이면 아홉의 여자가 그 말에 대한 반응으로「니 맘대로 하세요」라고 퉁명스레 대꾸한다.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설파하도록. 밀린다고 감정을 내세우면 그때부터는 말이 아니라 손이 앞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다. 죽, 육체를 동반하는 실전으로 싸움이 크게 번진다는 이야기다.

《제르가 화를 내면 나도 똑같이 화낼 테야! 내가 겁 먹을 줄 알어?!》
아이는 포크를 거칠게 내려놓고 차렷 자세를 취했다. 사내는 어랍쇼 놀라하며 눈을 크게 부릅떴다. 아이는 하나도 안 무섭다는 식으로 당돌하게도 그의 시선을 힘차게 맞받아쳤다. 하여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은 유럽 전체를 무서운 포화 속으로 밀어 넣으며 확대되었다.

일의 흘러가는 모양새가 보통이 아니다 싶자 아기 아빠도 포크를 터억 내려놓았다. 그리고 팔짱을 꼈다. 협박조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물론 아이도 똑같이 따라했다. 그 조막막한 아이가 못하는 짓이 없었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결국 서슬 퍼런 눈빛으로 각자 서로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40분간을 말이지유.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눈싸움만 하고 있었슈.』

말이 40분이다.
처음에는「잘들 놀고 있다!」라고 넌더리를 내던 안주인도 겁이 더럭 나지 않을 수 없었다. 3층 객실에서 더러워진 커튼을 골라다 세탁장에 가져다 놓고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건만 상황은 그로부터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눈싸움 중.
스튜는 식어 빠졌고 국물은 굳어 껄죽해졌다.

『하지만 어쩌겠슈? 일단은 두고 보자 생각했시웅.』
안절부절 손톱을 물어뜯으며 시계만 쳐다본지 20분, 엉덩이를 흔들며 사태를 살피러 올라가 보았으나 역시나.
일은 점점 더 고약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밀린다 싶겠다 판단한 아이는 웃기지도 않게 의자 위로 발딱 올라가 자리를 잘 잡고 섰다. 머리 위를 차지하는 자가 승리한다, 그것은 발정난 캥거루 숫놈들만이 가지는 싸움의 법도가 아니다. 엄마는 아이를 내.려.다.본.다. 선생님은 학생을 내.려.다.본.다. 임금님은 장관을 내.려.다.본.다. 시선의 우위를 차지하는 자가 권력도 높은 법이다. 따라서 승리한다.

아이는 의미심장하게 미소지으며 꼬나박는 시선으로 사내를 내려다 보았다. 허리춤에 손을 터억 얹고서「그 쪽이 잘못한 거야!」라고 주장했다.

『저기 있잖유... 신관 나으리님은 의자에 올라가 서본 적이 있으시유?』
『제가요? 왜요? 전 아멜리아님이 아닌데요.』
제로스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멜리아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에 의자 위로 올라가 선다는 건 보통 곤욕스런 일이 아닌 법이다. 처음에야 아무렇지도 않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 문제는 엄청 심각해진다. 머리가 피잉∼ 돌면서 다리에 힘이 빠진다. 땅바닥이 휙휙 회전하면서 시야가 하얗게 변해간다. 롤러코스터 타이쿤 만세(?) 손바닥에 땀이 고이고 입안으로 시큼한 침이 잔뜩 고인다. 이대로 가다간 콰당 넘어질 거라는 절망적인 예감으로 인하여 심장은 이내 벌렁벌렁 뛰기 시작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건만 제자리에서 트위스트 춤이 절로 흘러 나온다.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휘청거리기 시작했슈. 암만 지라고 별 재주 있겠슈?』
그러나 독종이었다. 그렇게 지독한 독종은 생전 처음 보았다.
안주인은 속으로 한 10분이면 일이 마무리가 되겠구나 생각을 하였다. 그 정도 지나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하고 지례짐작했다. 허나 예상은 어이없게 빗나가 1시간을 훌쩍 넘어갔다.

『피가 마른다는 것이 어떤 거시냐면 바로 그런 것이었슈. 난 겁에 질렸지라우.』

이제 아래층 주방에서 손톱을 맹렬하게 물어뜯는 인간의 수는 모두 여섯으로 증가했다. 한 놈은 위에서 망을 봤고 다른 한 놈은 주방으로 소식 물어다 주는 제비 역할을 했으니까 정확하게는 여덟이었다.

시계 한 번 쳐다보고 천장 한 번 올려다보고.

『그렇게 더디 가는 시간은 내가 첫째 놈 머리가 다리가랭이 사이로 언제 불쑥 나나타날까 죽어라 기다렸던 것과 거의 마찬가지였슈. 정말이지 누구라도 좋으니까 머리꽁지 다 뽑아버리고 싶더라니까. 환장하겠더라구유. 진짜.』

그로부터 다시 1시간이 또 흘러갔다. 아이는 종잇장처럼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었다. 조금만 소리 내어도 의자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몰래 방안 풍경을 훔쳐보고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답답해진 나머지 결국은 주방에서 이리로 다들 자리를 옮겼다) 침을 삼키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얼어붙었다. 시간은 째깍째깍 잘만 흘러갔다. 이제 아이는 폭풍우 속의 갈대마냥 흔들흔들 춤을 추었고 기껏 갈아 입힌 잠옷은 뜨거운 땀으로 인해 젖어 버렸다.

안주인은 쾡∼한 표정으로 결론부터 말했다.
『장장 3시간 하고 12분 34초 뒤였슈. 그 작은 대갈통을 마룻바닥에 처박은 건.』

쾅 소리와 같이 마룻바닥이 흔들렸다. 커다란 운석이 지구 표면을 때리는 충격파와 거의 흡사했다. 훔쳐보던 모두가 거북이처럼 머리를 가슴 속으로 쏙 밀어넣었다.

《죽었을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응.》

바닥으로 널부러진 아이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아이 아빠도 다리에 쥐가 나기라도 했는지 또한 요지부동이었다. 일어선다는 개념을 다 잊어버린 식물인간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았다.

영원과도 같은 몇 분이 지나자 아이가 고개를 꿈틀거렸다. 어렵게 턱을 치켜 올리는데 보아하니 육체적 고통에 못이겨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허나 독종의 피는 어디로 사라지거나 하지 않은지라 입 밖으로 끙끙 신음 소리따위는 절대로 내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눈물만 줄줄 흘렸지, 결코 울지는 않았다. 흡사 줄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팔다리를 이상하게 비틀고 있었을 뿐... 아이의 볼을 적시는 눈물은 그저 짠기가 섞인 물에 불과했다.
그 대신... 목 놓아 엉엉 울어버린 건 오히려 아이 아빠였다.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었시웅.』
안주인이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엉망으로 구겨진 아이가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귀찮은 눈물방울을 밖으로 냉큼 치워버리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초상집 상주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들썩들썩 움직이며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소리소리 지르며 숨을 헐떡였다.
그렇게 서럽게 우는 남자라니.
죽은 마누라 생각이 떠올라서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홀애비 신세 타령이었을까. 오장육부를 죄다 난도질 당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절절 끓는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훔쳐보는 주제에 그만 울라고 다독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처한 일이었다.

제로스는 가만히 손가락 하나를 입가로 가져갔다.
- 오즈 나라 나무꾼은 뜨겁게 덥혀진 강철의 심장을 찾고 있었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텅 빈 양철의 가슴이 얼마나 멋진 거라는 걸 왜 모를까요. 도로시가 없어졌다며 구슬피 울지 않아도 되고, 지옥으로 떨어진 가슴을 끌어안고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까짓 강철의 심장... 나라면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눈물 한 방울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편이 훨씬 더 행복하니까.

그러나 오즈 나라 나무꾼은 이미 오래 전부터 펄떡이며 움직이는 강철의 심장을 자신의 양철 가슴 속에 넣고 있었다.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지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동시에 손에 넣었다. 올라가기보다는 나락으로 떨어지기가 더 쉽겠으나... 이미 그의 강철의 심장은 뜨겁게 뛰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었다. 일단 끼어 맞춘 심장을 다시 꺼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넘어졌던 아이는 커다란 혹을 머리통에 달고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울고불고 할 사람이 틀리지 않느냐며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사내는 얼굴을 파묻고 정신 없이 흐느낄 뿐이었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아이가 사내를 다독거리며 부드럽게 껴안았다. 정작 아파 죽을 사람은 아이였는데 위로는 아이 아빠 쪽이 받았다.

《나쁜 년... 나쁜 년... 날 이렇게 아프게 하고... 나쁜 년...》
《잘못했어, 제르 할아범. 그만 울어. 다시는 내 안 그럴께. 뚝! 울면 나쁜 아이.》
《나쁜 년... 그렇게 날 버리고... 독한 년... 정말이지 몹쓸 여자.》
부녀는 서로를 꼬옥 껴안고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식사는 엉망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먹고 싶다는 생각이 날리가 만무했다. 식욕은 이미 오래 전에 싹 달아났다. 완전히 초죽음 상태로 지쳐버린 그들은 두말없이 곧장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 무거워진 눈을 붙였다. 사내는 겁에 질려서 아이를 꼬옥 끌어안았고 여자애는 풀 죽은 사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에게로 바싹 다가가 안겼다. 담요를 머리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하나로 엉겼다.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며 흡사 연인처럼 격렬하게 포옹하고 옆으로 누웠다.
간간히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하얗고 작은 소녀의 손이 사내를 더듬더듬 어루만졌다.
짜디 짠 눈물 투성이의 아이와 아빠는 그렇게 해서 하루를 끝마쳤다.

『인상깊었지라우. 안 그래요? 징∼말로 괴상한 부녀였다니까유.』
따뜻하게 덥힌 우유를 홀짝거리던 제로스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안주인을 싹 외면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의 얼굴 또한 벌겋게 열을 내고 있었다. (앞머리가 표정을 가려주어서 그랬지 그 얼굴을 보았으면 안주인은 깜짝 놀랐을 거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
『서쪽에 있는 사일라그로 간다고 그럽디다. 피망을 뺀 쇠고기 스튜를 허겁지겁 먹어치우고는 (결국 사내는 졌다...;;) 새벽같이 길을 나섰구만유.』

제로스는 동전 두닢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는 두말없이 동.쪽.으로 길을 잡았다.
딸랑.
작은 방울 소리의 배웅을 받아가며 또 하나의 뜨내기 손님이 여관을 떠났다.

『서쪽이 아닌 어딘가다... 이거지? 흐음.』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제로스는 제르가디스의 수작에 넘어갔음을 깨닫고 혀를 깨물어야만 했다. 정말로 그들 일행은 여관 안주인에게 미리 언급했던 그대로 사일라그로 출발을 했고, 자기 꾀에 속아넘어간 제로스가 가까스로 그들의 꼬리를 밟은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3주 후였다.

그로부터 다시 2주 후.
사일라그는 원인 불명의 대화재로 전부 불탄다.
아울러 제로스는 제르가디스에게서 귀여운 공주님을 훔쳐내는데 가까스로 성공, 다시는 그들이 서로를 껴안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강제 조처했다.



*** 유나는 이봐 그레이워즈, 리나의 복제가 남긴 단 하나의 혈육입니다. (그 여자의 왼쪽 눈동자 참조) 유나는 여섯 살에 제로스에게 쫓겨 한 번 죽었던 몸입니다. (불의 원소 - 연중, 아차!) 고로 이 글에 나온 유나는 여섯 살이 되겠습니다. 유나미스의 원 발음은 듀나미스, 의미는 파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