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투리 이야기입니다 ☆


『제로스님. 죄송하지만 좀 봐주세요. 이런 것이 있는데요... 저기. 이게 도대체 뭡니까?』
이것저것 알아서 잔 심부름을 해주던 짐승 인간 하나가 도통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쟁반에「그것」을 공손히 받쳐 올렸다.

『이게 뭡니까?』
『아이고, 그건 제가 먼저 한 대사인뎁쇼.』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제로스 역시 이해가 가질 않는다며 검은 색 휘장으로 잘 싸여진 작은 새장 하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새장 옆으로는 해왕의 표식으로 겉을 봉인한 한 장의 편지까지 끼워져 있다.
듣자 하니 얼마 전에 이곳으로 전송되어온 물건이라 한다. 해왕의 표식이 있는지라 수인들은 주인에게로 먼저 가져갔던 모양이다. 수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 것이 아니고 제로스에게 온 물건이니 어서 치우라 친히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짐승 인간이 귀엣말로 속닥속닥 일러바치기를, 돌부처라는 수왕이 엄청 투덜댔다는 것이다.

《내 사랑스런 아이가 다루핀과 연애하는 건 나는 결사 반대다. 다루핀 그 녀석은 겁도 없이 어딜 넘보려는 건가! 내 나중에 단단히 항의하리라.》

그 끔찍한 비보를 들은 제로스는 죽으려 했다.
『뭐요?! 누가 누구랑 연애를 해요?』
『하지만 이걸 보시라고요. 특별히 보내주신 선물에다가 러브레터입니다.』
『집어 치워요. 러브레터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

제로스는 한마디로 [러브레터 설] 을 일축하며 편지를 잡아챘다.
미색으로 윤기가 흐르는 최고급 편지 봉투 위로는 치콜레탄 괴물 해파리의 보랏빛 체액으로 또박또박「제로스 보아라」라고 정성스레 쓴 글귀가 착 박혀져 있다.
순간 의구심과 근심이 그의 이마를 덮었지만... 아닐 것이다. 해왕의 성격이라면 대충 알고 있다. 러브레터는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손톱을 사용하여 조심스레 뜯어본 봉투 안에는 오래된 듯한 냄새를 풍기는 고풍스런 종이가 섬세하게 네 번 접혀져 들어가 있었다.

《여어∼, 오랜만이다. 그간 잘 지내셨소? 여전히 피부는 팽팽하시고?》

이걸 누가 말려.
제로스는 비틀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놀리는 것도 아니다. 원래부터 그렇게 생긴 위인이다. 오죽하면 술 취한 카오스 드래곤 가브와 죽이 착착 맞았을까. 맨 정신도 아니고 술 들어간 가브와... 마왕이 포기하고 내놓은 자식이다. 이 마왕은 통제가 안 된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고 숨을 들이켰다. 큼지막하게 정자체로 쓴 글자는 오히려 그림 같아서 뱅글뱅글 눈이 돌아갔다.

《여기는 북쪽 히스테리아 부근이야. 시간 나면 수왕궁에 들리마. 걸어서 가면 아마 200년쯤 걸릴 게다. 그나저나 제라스 누님은 안녕하신가? 별고 없으시겠지...》

기가 막히지 않은가? 인간 흉내내기는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다. 누가 동생이고 누가 누님이라는 걸까. 참으로 이상하다. 그러면서도 그라우세라에겐 형이라고 부르는 적이 결코 없다. 굳이 수왕에게만 누님이라 호칭하는 버릇이 있을 따름이다. 누구에게 배웠는지 몰라도 지난 800년간 누님이란 말이 입에 붙었다.
인간의 냄새를 가진 마왕... 참으로 별종이다.
『당신도... 여전하시군요.』
제로스는 코웃음을 치며 잠시 뒷통수를 긁적였다.

예상대로 메세지는 간단했다. 제로스는 몇 줄 되지 않은 내용을 다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미안하다, 제로스. 너에게 주려고 만든 장난감이 도중에 망가졌다. 다 팔자야. 아암! 그러니 어쩌겠냐. 네가 이해하시오.》

장난감? 그제야 제로스는 쟁반 위로 올라간 작은 새장으로 관심을 돌렸다.
선물? 그것도 장난감이란다.
슬그머니 팔을 뻗어 새장을 덮은 휘장을 위로 걷어올렸다.
순간 얼굴이 굳었다.
텅 소리를 내고 새장이 쟁반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 너도 그녀가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나. 영원한 생명을 가진 몸이니 언제까지고 기다릴 거냐? 이봐, 제로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그러지만 말고 뭐라 대답 좀 해보시지 그래.

투명한 유리 구슬로 만들어진 인공의 눈동자가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붉은 눈... 제로스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인간은 찰나에 사라진다. 그 모방품은 만들 수는 있다. 그러나 그건 최상의 모욕이다.
다루핀은 모욕하기 위해 이 인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원래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청현자님이요? 아서요. 기다리셔도 어림 없어요. 모래폭풍을 맞으러 홀로 사막으로 나가신지 벌써 5년이랍니다. 그분에겐 바람이 전부예요. 유령처럼 사막을 헤매면서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기다리시는 겁니다. 바람처럼 날아간 영혼이라는 거... 전 잘 모르겠지만요. 바람을 맞으면 영혼을 느낄 수 있다고 믿으시니까... 난들 아나요? 제르가디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야 그런가보다 하는 것뿐이죠.》

나도 사막으로 나가보아야 하는 건 아닐까.
편지를 갈기갈기 찢으며 제로스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때로 시간이 지나면 죽는 인간이 너무나도 부러울 적이 있다.


*** 아아, 잠시 안내 방송 드리겠습니다.
피스키의 영혼은 리나가 아닙니다. 그래도 제르가디스는 그 얼굴이 마음에 들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군요?
사실 초반에 생각해둔 것은 말이죠...《인간은 유일하게 자살하는 동물이다》라는 이야기로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레밍즈도 자살한다는 이야기도 엄청 유명하던데 뭐가 다를까나.
어쨌거나 반데미엘의 날개에서 마음에 드는 대사가 있는데 차마 집어 넣지 못했어요.


윌 : (병상에 누워) 반데미엘은 어디에...?
단장 : 그녀는 이미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아. 내 품을 빠져나가 자유롭게 되고 말았다. 네가 나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창 밖으로는 나비(아니면 나방?)가 날고 있다. 반데미엘은 첨탑에서 뛰어내려 이미 자살했다. 헉 놀라며 침대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는 윌, 그러나 거짓말처럼 단장의 흔적은 없다. 꿈을 꾼 것일까? 주변을 둘러봐도 고요하기만 하다.)
다음날 신문은 톱 기사로 두개의 추락사고를 다루었다. 주횡기록을 달성하면서 추락한 비행사(소년 주인공)와 날개를 단 채 뛰어내린 타워 점퍼 소녀...
그리고 윌의 나레이션으로 작품은 끝납니다.

상처가 회복되자 나(윌)는 상금으로 새로운 비행기를 만들었다. 두 쌍의 하얀 날개를 가진 경기용 복엽기다. 나는 그것을 피스키라 이름 짓고 경기 참가를 계속했다.
곧 세계대전 발발...
당초에 말해지던 하늘의 기사도 정신따위는 없어지고 대신 그곳엔 그저 서로 죽이는 일만이 행해졌다.
대전 후 나는 시골에 격납고를 지었다...
복엽기의 시대는 가고 하늘엔 단엽기만 남았다. 기체에 휘발유를 마구 묻힌 나의 회전식 엔진은 웃음꺼리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나는 피스키와 함께 날기를 계속했다.
세례를 받은 적이 없는 소녀의 혼도... 어딘가에서 날고 있지는 않을까?


반다미엘의 날개는 국내엔 정식 소개되지 않고 해적판으로 나왔습니다. 희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작가분의 다른 만화로는 나루타루(드래곤 드림)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