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티브는 키토우 모히로의 [반데미엘의 날개] ☆


휘장이 드리워진 새장 앞으로 커다란 장정 셋이 몽둥이를 들고 단단히 지키고 섰다.
벌건 대낮에 그런 대 소동이 벌어졌으니 무리도 아니다. 더 이상 계속 소란을 피워댔다간 공연 자체를 아예 취소시켜 버리겠다고 마을 촌장이 뜨끔하게 일침을 놓지 않았더라면 잔뜩 흥분한 남정네 둘이서 칼을 뽑아들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서로를 베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놈의 인형 주인이라는 작자 마음이야 잘 모르겠으나 실제로 제르가디스는 상대편 사내의 목을 한 번에 날려버릴 작정으로 검집에 손을 가져갔었다. 가져가기만 했나. 빼는 그 즉시 가로로 휘두를 생각이 말 그대로 굴뚝이었다.
그렇다고 상대방 또한「제발 나 좀 죽여주쇼」하고 가만히 대기하고 있을 위인은 절대 아니었다고 제르가디스는 생각했다.
부르르 떨며 꽉 쥐어진 그 남자의 야무진 주먹이 불현 듯 떠올랐다. 마을 촌장이 직접 말리며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는 어떻게 나왔을까. 설마... 이얍 기압 넣어서 가뿐하게 주먹질만 하려 했을까?
글세다.「공연 취소」라는 단어와 함께 잽싸게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으니 이쪽으로서는 알 재주가 없다.

도둑 고양이처럼 수풀 속으로 몸을 납작하게 엎드린 제르가디스는 나름대로의 잠작이라는 걸 해보았다.
파란 옷의 남자... 이름이 코셋트라고 했던가. 몸의 움직임도 경쾌하고 절도가 있는 것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평범한 인간은 분명 아니다.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고 발 뒷축을 움직이는 폼에서 전문가 냄새가 풀풀 났다. 발바닥이 단단하게 지면을 박차는 것과 동시에 발 잔등은 무용수가 춤을 추듯 스프링처럼 통통 튄다. 그런 남자가 고운 모래 위로 발자국을 남기면 엄지 발가락 부근이 다른 부분보다 곱절은 깊다. 쉽게 말하자면 발 앞쪽을 사용해서 엄청 사뿐사뿐 걷는다는 소리다.
허나 그 정도로는 그가 검사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이르다. 일단 검사라고 하기엔 몸집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었고... 다음으로는 이게 가장 중요한데 그 사내는 검을 몸에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검 없는 검사라는 건 앙꼬 없는 찐빵이오, 소방 호스 없이 화재 현장에 진입하는 소방관이나 마찬가지다. 요리사가 야채 다듬다 말고 뻔뻔하게 나 식칼 없어요∼ 하고 말하는 법도 있다더냐. 제르가디스는 가볍게 도리질 했다.
『그럼 마법사인가.』
그럼 더 골치 아플 것 같다며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마을 한복판에 자리를 잡은 서커스 공연은 대 성공이었다. 수십 미터는 족히 되도록 높이 올려 세운 천막 안에서 박수 소리와 심장 졸이는 비명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미어 터진다고 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거짓말이겠지만 제법 많은 인파가 일시에 몰려든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리고 그렇게나 많은 사람을 불러 모은 당사자가 바로... 젠장. 입이 썼다. 흥행에 대단위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는 공짜로 일주일 무료 입장 티켓을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약간의 창피함을 느끼며 제르가디스는 길 한복판에서 너 죽고 나 죽자 고래고래 고함 지른 자기 자신을 무섭게 책망했다. 정말이지 돌았지, 그간 세상이 두 번 변했고 강산이 서너차례 그 모습을 바꾸었다 해도 꼴불견으로 자제력을 잃었다는 점에선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하하하.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뜨뜻한 화롯불로 변한 뺨을 애써 식히려 노력했다.
아이고... 늙으면 주책이라더니. 망신살 뻗쳤다.

빨간 고무공으로 코를 장식한 광대에게 입장 티켓을 내어 밀던 관객들 중 대다수가 이제냐 저제냐 하며 황야의 결투를 고대하고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던 남정네들 대부분이 공연 자체가 아닌 잿밥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헐렁 바지 입은 광대가 풍선을 매달고 환상의 문 워킹이라는 걸 해 보이든 말든, 나비의 날개로 등을 장식한 소녀가 펄펄 날며 공중 그네를 타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다.
청 코너, 푸른 수탉. 그리고 홍 코너, 흰 수탉. 황야의 닭들 만세.
누가 이길 것 같느냐며 서로 돈을 걸었다. 꾼들 얘기론 푸른 수탉 쪽이 약간은 우세하다고 한다. 흰 수탉은 이 사실을 알고 발끈했지만 저쪽의 키가 한 뼘이 더 크다는 설명에서 수긍하고 물러났다.
내기는 그렇다치고 키가 작다는 건 어디까지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지겨워 죽겠다. 하여간 피스키는 어디를 가든 소동의 원흉이 되는구마.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자정 넘도록 지키고 앉았어야 하는 거냐고. 정말로 코셋트는 그 괴상한 놈과 결투라도 하겠데? 하려면 빨랑 할 것이지... 난 금화 2개 걸었다고.』
새장을 지키고 선 사내들 중 하나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눈물을 쏘옥 뺐다.
『알게 뭐야. 지키라면 지키고 서야지. 아무튼 이놈의 인형은 요물인지 마물인지... 가는 곳마다 피를 부르는구먼. 그래도 덕분에 우린 돈을 버니까 고맙다고 해야 하겠지만.』
『돈? 덕분에 많이 벌지. 게다가 덤으로 욕까지 많이 먹잖는가. 엎드려 절이야.』

시커먼 때가 가득한 손톱을 후벼 파던 사내 하나가 신물이 난다며 뒷발질로 새장을 걷어찼다.
흠칫 놀란 인형이 겁에 질려 몸을 사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기척이 성질을 돋구려 한다. 제르가디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료를 위로 한답시며 그들 중 하나가 덩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자, 우리야 옆에서 굿판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일세. 신경 끄라고. 코셋트의 악취미를 가지고 왈가왈부할 처지도 아니잖나. 그가 자칭 신사 나으리들을 모시고 무슨 장난질을 치는지 알면 쓸데없이 골치만 아프지. 하여간에 돌아다니는 곳마다 이상한 사람들 천지라니까. 취미도 엄청 고상하지. 진짜 여자는 마다하고 인형이나 껴안고 놀고 말이야. 쿡쿡, 물론 그.런. 의.미.의. 인.형. 놀.이.도 나름대로의 재미는 있겠지만 말일세? 반항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다하고... 얼굴도 제법 반반하고. 때린다고 아파하나 칼로 찌른다고 죽나.』
『옳소. 인형 만세다. 킬킬킬. 아냐? 저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거든. 단장도 혹해서 단번에 푸욱 빠졌지. 코셋트가 옆에서 두 눈 멀쩡히 뜨고 다 보고 있는데 자존심이고 뭐고 훌훌 내던지고 바지를 벗더라니까. 그러면서 해줘, 해줘... 이건 비밀인데... 응응. 심했지.』
나즈막한 웃음소리가 짙은 안개처럼 바닥에 깔렸다. 자기네들끼리 농담을 주고 받으며 껄껄거렸다. 음탕한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손으로 호리병을 그렸다.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었다. 수풀에 몸을 숨긴지 이미 서너시간은 족히 흘렀다. 이제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제르가디스는 쭈그리고 앉은 자세에서 무릎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보란 듯이 검집으로 가져갔다.
신나는 입방아질에 빠져있던 사내들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놀라 허겁지겁 몽둥이를 고쳐 잡았다. 하지만 솔직히 그다지 방해된다고 생각할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제르가디스는 눈썹을 활처럼 휘어보이며 그들을 향해 딱 한 마디만 했다.

『뭐 좀 물어보지. 몽둥이와 검이 만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동시에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검날이 길다란 궤적을 그리며 아래에서 위로 움직였다. 똥깡 부러진 몽둥이가 잘도 날아갔다.
『정답, 몽둥이는 두 쪽으로 잘리고 검은 그 도덕성을 비난받는다.』

『드디어 나왔군, 어디 한 번 맛 좀 봐라. 하얀 수탉!』
나는 덩치를 믿습니다. 2m에 육박하는 든든한 체격을 자랑하던 덩치가 반 토막난 몽둥이는 뒤로 던졌다. 평소 힘 자랑으로 밥 먹고 살던 남자였다. 돈 걸고 팔씨름하기가 그의 전공이었고, 취미 생활로는 쇠사슬 끊기라는 있었다. 그러니 호리호리해 보이는 몸매의 제르가디스가 가소롭게 보일 법도 했다. 겉으로 봐선 발길질 한 방이면 끝나게 생겼다.
『이여어어업~!!』
사내는 퍼렇게 힘줄 돋아난 주먹으로 제르가디스의 얼굴 한가운데를 노렸고, 후속타로 무릎차기라는 것을 선보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이고, 내 주먹어억~!』
분명 펀치는 정면에서 작열했다. 그런데 부러진 대상이 생각과 정 반대였다. 제르가디스는 뒷짐을 진 자세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주먹질한 사내는 허리를 구부리고 눈물을 쏟았다.
『뭔 놈의 면상이 돌 대가리이이∼?! 내 주먹이 깨졌다아아아∼!!』

바보는 무시하도록 하자. 제르가디스는 엉엉 소리 내어 우는 멍청이를 뒤로 하고는 새장을 향해 뛰어갔다. 휘장을 위로 걷어 올렸다.
겁에 질린 소녀가 오들오들 떠는 것이 눈에 보였다.
커다란 루비를 박아서 만든 유리 눈동자로 엷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맙소사. 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그녀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느냔 말이다.
이미 죽고 없는 소녀의 환영은 지독하게 잔인했다.
욕이란 욕은 죄다 퍼부어대며 잡고 있던 휘장을 뜯어버렸다.
죽어라... 이걸 만든 작자는 저주받아라. 결단코 용서 못해.

『이름이 피스키라고 했지? 자, 대답을 해라. 너는 스스로가 인형이라 생각하는가, 아님 인간이라 생각하나.』

피스키는 어리둥절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꽃으로 장식한 장난감 그네 뒤로 숨었다. 제르가디스는 인상을 써가며 철창을 붙잡았다. 할 수만 있다면 철창 사이로 얼굴이라도 집어 넣을 기세였다. 덤벼들 것처럼 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말해! 대답해! 너 스스로가 인형이라 생각한다면 널 인형으로 여겨주겠다. 그게 좋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할 거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이번 한 번 뿐이거든. 만약 조금이라도 자신이 인형이 맞는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널 인간으로 대접해 주겠어. 도와주지. 필요하다면 내 피와 살이라도 주겠다. 약속한다. 나무로 만들어진 허껍떼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난 너를 인형이라 생각하진 않겠다. 그런 건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거야. 나는 인간이던가? 아님 인형이 맞는가? 스스로 인형이라 치부한다면 영원히 그렇게 사는 거지. 그래. 그렇게 살아. 하지만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피스키!』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소녀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 왜 숨는 거냐. 날 똑바로 봐. 내 눈을 보라고! 넌 인간인가? 그렇다면... 피스키! 널 하찮게 취급하는 자들에게 화를 내는 거다. 그리고 주장해!「나를 인간으로 여겨주세요」라고 말을 해. 인형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요구해. 그리고 그들의 부정함에 대항해서 싸워! 언제까지 그렇게 엎어져 있을 거냐! 피스키! 일어나! 싸워! 거부해!』

화가 났다.
연약함에 대하여.
억압에 대하여.
비굴함에 대하여.
슬픔에 대하여.

피스키의 빨간 눈동자가 커다랗게 벌어졌다.
싸우라고? 거부하라고?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철창을 꽉 움켜쥐고 있던 제르가디스는 머플러를 아래로 내렸다. 후드도 뒤로 넘겼다. 그렇게 해서 숨기고 있던 본래의 흉한 얼굴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돌이 듬성듬성 박힌 뺨에 시퍼런 피부, 은빛으로 빛나는 차가운 금속의 머리카락과 툭 튀어나온 뾰족한 귀...

피스키의 유리 눈동자로 뿌연 막이 드리워졌다.
『이상한 얼굴...』
소녀의 손가락이 제르가디스의 뺨에 닿았다.
『이상하게 생긴 손...』
이어 강철의 구슬로 관절을 대신한 자신의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괴물... 비정상적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미어지게 아픈 것.

피스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모르겠다.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한 마음이라는 것이 콕콕 아파왔다. 모른다. 이런 건 인간이나 느끼는 것이 아니었던가? 따뜻한 피를 가진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뜨거운 감정... 피 한 방울 가지고 있는 자가 이해하려 하기엔 너무나도 어지럽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촉촉이 눈가가 젖어갔다. 어려웠다. 혼란스러웠다.

『나는 인형이예요... 아님 인간이 맞나요? 모르겠어요... 뭐가 다르죠?』
모르겠다. 스스로 생각을 한다는 건 처분당한다는 것과 동일한 단어가 아니었던가? 마른 장작처럼 부수어질 거라고 위협 받았다. 거부하면 분해될 것이다. 인형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생각은 인간이나 하는 법이다.
하지만... 뭘까. 유리로 만든 눈에서 물이 나온다? 가능한 건가?

『괴물은 울지 못한다. 마찬가지야. 인형도 울지 못해. 넌 역시 인간이야.』
제르가디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피스키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다. 온기는 전혀 없었지만 촉감은 부드러웠다.

『나는 인간인가요?』
『네가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인간이다.』
『나도 생각할 수 있나요.』
『할 수 있고 말고.』
그들은 잠자코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하기만 했다.

피스키가 하얀 팔을 뻗어 딱한 돌비늘이 뒤덮힌 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화사한 소녀의 손길, 그것은 언제나 그를 수줍게 만들곤 한다. 타들어가는 적색의 눈동자가 그를 마비시킨다. 이것은 하나의 정교한 의식...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던 소녀의 손을 천천히 끌어당겨 그 인공의 손바닥 위로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을 가져갔다.

『어랍쇼, 지금 둘이서 연애하는 거요?』
한가로운 시간은 끝났다. 보라색 풍선을 쥔 삐에로와 함께 푸른 옷을 걸친 사내가 나타났다.
제르가디스는 서둘러 피스키를 등 뒤로 감추며 똑바로 섰다.
바다의 색을 띈 눈동자가 바늘보다 더 가느다랗게 줄어들면서 놀리는 빛깔을 띄었다.
코셋트는 연신 콧방귀를 뀌며 그들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그래서요? 제르가디스씨.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인간 대접을 해주시겠다? 하앙.』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코셋트는 느글느글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저 다리를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 제르가디스는 절로 압도당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동작의 크고 작음의 문제를 떠나 이건 본연적인 문제와 관계된 듯 싶다. 아주 오래된 과거, 마치 레죠의 목소리만 듣고도 등줄기로 온통 소름이 돋곤 하던 것과도 비슷한... 순간 몸이 굳었다.

코셋트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애들의 같잖은 장난을 눈앞에서 목격한 어른처럼 노골적으로 한심해하며 이마를 찡그렸다.
『어리석군요. 당신은 그래... 생각만 하면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까?』
그는 찬찬히 제르가디스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집요한 관찰이었다. 자존심이 허락만 한다면야 도로 후드를 올려 써서 머리를 가리고 싶어졌다. 그만큼 무례했고, 아울러 잔인할 정도로 차분한 시선이었다. 맞받아 치는 일만으로도 온 몸의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져 까닥하다간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아십니까? 짐승들도 생각은 합니다. 하다 못해 들판의 나무들도 생각을 하죠.』
그렇다. 짐승들도 생각은 한다.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 다르다. 제르가디스는 이를 악문 채 고집스레 선언했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래. 하지만 그것들은 운명을 거역하며 싸우는 법이 결코 없지.』

코셋트의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조금은 놀란 눈치이다. 이어 그는 아래턱을 슬슬 어루만지며 그게 사실인가 아닌가 골똘히 생각에 사로잡혔다.
『호오!! 그건 그렇군요. 신도 마도 감히 운명을 거역하지는 않으니까요. 오직 인간만이... 네, 네. 그렇군요. 그건 사실이지요. 애초부터 인간은 판토크라토르(전능자)께서 내려주신 운명을 거부하며 지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묘한 습성을 가지고 있지요. 자유, 그것은 인간의 습성...』

말을 끝마치기가 무섭게 눈 앞으로 한줄기 빛이 번쩍였다. 검은 아니었다. 그건 코셋트의 오른팔에 매어 달린 은빛 나는 팔찌였다.
예고도 없이 주먹질이냐!
하는 수 없었다. 일단은 코앞으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해 충분한 거리를 두고 옆으로 뛰었다.
그런데 어랍쇼, 어찌된 영문인지 여전히 제르가디스의 시야로 번쩍이는 팔찌가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전부 보인다네~』
어느 방향으로 피해도 끝장이라며 코셋트가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만 가볍게 주먹쥔 팔을 앞으로 휘익 찔러댔다. 몸에 닿게끔 주먹을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기가 무겁게 짓눌리면서 압축된 공기 덩어리가 얼굴을 향해 정면으로 날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하여 양팔을 들어 재빨리 얼굴을 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었다.

코셋트. 잔인한 존재. 고대어로 진실(the truth)이라는 뜻의 이름과 어울리는 냉혹함...
인간이 아니다?

짤랑, 하고 팔찌가 움직였다.
『간단하겠군요? 인간임을 증명하시오. 자! 싸워요. 그대들 인간은 싸우는 존재라고 하지요? 어머니 바사니스테스 셰히나(L.O.N)가 그렇게 창조하셨다니까... 난들 아나. 인간이 그런 존재인지 아닌지 내가 알게 뭐야. 그러니 인간? 증명해 보시오. 나는 궁금합니다. 알고 싶어요. 도대체 인간이라는 건 무엇? 그녀와 그분, 불길한 쌍동이를 모욕하기 위해 이 초라한 자가 만든 하찮은 자동 인형을 위해 슬퍼하는 자여... 자, 증명하시오! 나에게 그 힘을 보여줘요. 진실을 가르쳐 달라구!』
그가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작고, 하얗고, 어린애 같은 손이었다.

뱃가죽이 벌렁거렸다. 우선은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일 듯 싶지만 어디로? 어떻게?
상대는 마족이다. 그것도 상당한 고위의!
짤랑, 하고 다시 팔찌가 흔들렸다.
빠르다! 보이지도 않았다.
제르가디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다음에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제르가디스도, 코셋트도 잘 알지 못한다.
둘 사이로 피스키가 끼어들었다. 새장에서 튀어나온 소녀는 단호하게 팔을 벌렸다. 하얀 팔이 작은 천사의 날개처럼 펼쳐졌고, 깔끄러운 감촉의 나무 파편이 어지럽게 튀었다.
『피스키!』
절망하는 제르가디스에게 그녀는 웃어주었고, 더욱 더 가슴을 활짝 벌렸다.
10월의 바람이 불었다. 인형은 자기 의지로 스스로의 몸을 움직여 바람을 안았다.
상쾌한 바람... 살아 움직이는 건 정말이지 아름답지 않은가?
충만한 기쁨에 젖어 허무의 날개를 지닌 작은 영혼은 세계를 포응했다.
갈라지고 찢어지고 부숴진다. 합창이다. 맑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그만... 그러니까... 이제 그만...』
싸운다. 반항한다. 거부한다. 그것이 인간임의 증명.

반토막난 상체가 기괴한 각도를 그리며 무너져 내렸다.
먼지는 먼지로.
세로로 금이 간 피스키의 하얀 팔이 제르가디스의 품에 떨어졌다. 충격을 받은 소녀의 몸뚱이가 가뭄이라는 절망을 맛본 무화과 나무인양 쩍 갈라졌다.

작게 속삭이며 제르가디스와 마지막으로 눈을 맞췄다.
『나는... 생각했어요.』
바램을 실현시키는 힘.
바람이 분다. 자유. 해방.
그것은 애초부터 눈에는 보이지 않는 투명한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 인간의 힘.
『그러니까... 나는 이제 자유예요.』
날아가는 것.
자유!! 사바의 고리를 끊는다.
그리하여 인간은... 자유!
기뻐하며 그녀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사람들은 룰루 콧노래를 부르며 조그마한 새장을 들고 터벅터벅 혼자서 오솔길을 걸어가는 코셋트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기심을 가진 용감한 어린아이 몇이 그 새장에 무엇이 들었느냐며 질문을 던진 모양이다.
코셋트는 무척이나 심술 맞게 웃으며 휘장을 걷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내용물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우와아아악~!!』
깊게 잠든 어린 소녀의 잘려진 목을 발견한 아이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오랫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아아, 너무 지루해서 말이야... 오랜만에 수왕궁에 들러 누님 얼굴이나 볼까?』

자칭 은둔하는 철학자는 오늘도 세계를 방황하며 존재의 증명을 찾아 헤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