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티브는 키토우 모히로의 [반데미엘의 날개] ☆


*** 아세요? 제르가디스. 애초부터 인간은 모두가 두 장 날개를 가진 천사랍니다. 본능은 운명을 거부하며 지상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날아 오르는 법을 압니다. 그리하여 자유입니다. 우리는 전사이자 천사입니다. 마마는 그걸 믿어요. ***


10월의 한가닥 돌풍이 불어닥침과 함께 그들은 우뚝 나타났다.

『달린다! 난다! 내 팔을 봐라, 부우웅!! 어때. 그 바람 비행사랑 비슷하지?』
『에게? 그 커다란 똥 덩어리 몸으로? 쯧쯧, 바랠 걸 바래. 커다란 변비처럼 아래로 뚜웅 떨어지지 않으면 그건 기적이지, 쨔샤. 넌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거야.』
『야, 자꾸 그렇게 나오면 너랑은 고무딱지총 놀이 다시는 안 해.』
『꺄아, 카니발이야, 카니발. 엄마에게 졸라 아이스크림 사 달라고 할 거야!』
『난 솜사탕 먹고 싶어. 노랑이랑 핑크 색으로.』

어린 꼬맹이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현기증을 일으켰다. 몸무게의 현실성을 망각한 아이들은 저마다 붕붕 소리를 입에 달고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렇게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를 달고 제르가디스 옆구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달려나간다. 아마도 바람을 타고 날으는 곡예 정령사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리라.
팔락 - 하고 그의 하얀 망토가 앞뒤로 흔들렸다.
제르가디스는 이마 부근을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잠시 가던 발걸음을 늦추었다.

거리가 무척이나 소란스럽다. 근처로 시끄러운 가장 행렬이 지나가고 있다. 하얀 색과 붉은 색으로 얼굴을 칠한 사람들이 색동 실을 감은 악기를 불어대며 경쾌한 스텝을 밟았다. 짧은 스커트와 흰색의 타이즈를 신은 소녀들은 집채만한 거인의 팔에 매달려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키스를 던졌다. 전단지가 뿌려지고 오색의 꽃 종이가 휘날렸다. 재롱을 피우는 원숭이는 파란 장난감 모자를 들고 귀부인들 틈새를 돌아다니며 과자를 구걸했다. 원숭이가 귀여운지라 사방에서 던져지는 과자로 모자는 금방 볼록해졌다.
사람들의 탄성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어린 아이들은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것에 놀라 가여울 지경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주택가의 창문은 모두 열려졌다. 외출이 어려운 꼬마 아이들과 수줍어하는 여자들의 얼굴이 커튼 사이로 드러났다. 저 멀리 어느 집에서는 키 작은 땅콩 땅딸이가 창문 밖으로 거의 몸을 던지려 하고 있다. 질겁을 한 어린 하녀가 얼른 붙잡지 않았더라면 오늘 애꿎은 영혼 하나가 하늘로 올라갔다. 천만 다행이었다.
『우아아아, 곰돌이! 곰돌이! 곰돌이 간다!』
흥분한 꼬맹이가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댔다. 하녀가 아니었다면 죽을 뻔했다는 것도 모른다. 그저 곰 인형 옷을 뒤집어 쓴 인간이 웬수다.
제르가디스는 슬그머니 미소를 머금었다. 죽음마저 모르는 그 천진난만함이 그의 마음을 잡아 끈다.
군중들 틈새로 솜씨좋게 끼어들다 말고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이들은 언제나 꿈을 꾸는 존재... 그래서 좋다.

아아, 하늘이 거짓말처럼 파랗다. 바람이... 꽃 종이를 날리는 바람이 너무나 좋다.
살아 있다는 느낌.
멈추지 않는 10월의 바람은 만물을 역동시키며 둥글게 회전한다.

눈을 가늘게 뜨며 코를 벌릉거려 보았다. 매케한 먼지 내음이 바람의 힘에 실려 뇌를 두런두런 자극했다. 오래 전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그의 심장이 약간은 꿈틀거리며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오랜 만에 심장이 뛰었다. 바람은 그가 아직 풀 냄새 떠도는 어린 소년이었던 시절에 맡을 수 있었던 기척을 품고 있었다. 화사한 안색의 소녀가 흘린 건강한 땀 냄새와도 비슷하다.
가슴이 아프도록 그립다. 사랑스럽다.

그때였다.
덥썩 하고 작은 고사리 손이 그를 붙들었다.
『헤에, 잡았다. 이 아저씨도 서커스 단원인가 보네? 이것 봐! 이상하게 생겼어. 그지?』
제르가디스는 경악했다.
저으∼런! 잠시 방심했다고 허벅지를 붙들렸다. 그것도 꽉 끌어안고 죽어라 매달렸다.
곤란하게 되었다. 벼락 맞은 느티나무처럼 근육이 굳었다. 옷으로 둘둘 말아 잘 감춘 그의 파란 피부를 멋지게 발견해낸 아이들은 남의 속 타는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만져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둘기고, 손가락으로 찔러도 보고, 얼굴을 부비부비 비벼댄다.
『아저씨는 괴물?』
『무슨 가면 써? 늑대 가면?』
확실히 바람이 문제였다. 겁을 상실한 꼬마들이 돌비늘을 손톱으로 슬그머니 긁어보려 했다.
『아저씨도 서커스야? 서커스? 와아!』
별빛이 초롱초롱에 금가루가 살랑살랑이다.
『우리랑 놀아줘~!』
대책이 없다.

『에비. 저리로 가라. 아니면 이 아저씨가 어흥∼, 할 거다.』
어린애들을 차마 주먹으로 때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허벅지에 매달아 놓고 언제까지나 놀아줄 수도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었다. 일단은 단단히 팔짱을 낀 자세에서 굵은 모래가 묻은 샌달 털듯이 다리를 달달달 털어봤다. 옳커니, 달라붙은 녀석들 중 몸이 약해 보이는 놈 몇 마리가 단번에 탈락이다.
다음으로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마음껏 드러내 보이며 막가파 스타일로 인상을 팍 구겨봤다.《호기심 천국》이던 아이들의 표정이《추적, 사건과 사람들》로 싹 바뀌면서 그의 바지춤을 붙잡은 손길에서 힘이 싹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때는 이때다. 제르가디스는 몸을 돌려 성가시게 달라붙는 개구쟁이 아이들로부터 달아나려 했다.
눈치가 빠른 아이들 몇몇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악! 방심했다! 늑대 인간이 달아난다. 공격하라~ 받아라, 정의의 화살.』
『젠장. 투니버스 개판 번역 흉내내지 마! 저것들을 그냥... 확!』

실수다. 10월의 바람이 가진 위력이라니.
확실히 그 힘은 무서웠다. 제르가디스는 얼굴을 곱게 붉히며 재빨리 마을 사람들 틈새로 이리저리 파고들었다. 후회가 막급이다. 저녁무렵까지 여관에서 탱자탱자 개기다가 밤 늦게 마을을 빠져나가면 그만일 것을 굳이 뭐 하러... 사람들 시선을 피해 은밀하게 돌아다닌다는 평상시 생활신조는 언제 엿 바꿔 먹었느냔 말이다. 맙소사. 이게 바로 늙었다는 징조인가! 하긴, 이미 오래 전에 100살이 넘었으니 그는 할아버지가 맞다. 얼굴에 주름 하나 없어도 나이는 먹은 것이다.

순간 가까이에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르가디스는 살그마니 웃다 말고 모두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들이 꽃을 던졌다.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들이 던져주는 꽃을 받았다.
어쩐지 기뻤다. 그 향과, 그 색채가 즐거웠다.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우린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날 거예요, 보러 오세요!』
반짝거리는 스팡클을 잔뜩 매달은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자가 타조 깃털을 흔들며 요염하게 웃으며 대로변을 걸어갔다. 잘록한 허리도 그렇지만 가슴도 엄청 커서 로케트 같다. 엉덩이를 흔들며 전단지를 나눠주는데 남자들 눈이 죄다 하트가 되고 있다. 군침을 줄줄 흘리는 남편들을 단속하느라 커다란 밀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쥔 여자들도 덩달아 바빠졌다.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제르가디스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사람들 틈새를 휩쓸려 어디론가 밀려나갔다.

바램을 실현시키는 힘.
바람이 분다. 자유. 해방. 그것은 가벼운 풍선들의 나풀거리는 움직임. 날아가는 것. 난다. 자유...!! 사바의 고리를 끊는다.
제르가디스는 등을 돌려 하늘 위로 날아가는 한 쌍의 비둘기를 보았다.

그때였다. 사람들이 내지르는 환호성이 잦아들면서 대신 불안스레 웅성거리는 소리가 높아졌다. 타조 깃털 옷을 입은 여자가 지나간 다음으로 이번에는 커다란 장정 둘이서 커다란 새장 하나를 나무 기둥에 꿰어 어깨에 둘러매고 천천히 걸어갔다. 검정색 천으로 휘장이 드리워진 새장은 사람 하나가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였다. 앞장 선 거인이 징을 치며 모두의 주의를 끌었다.
데엥, 데엥, 데엥.
남자들의 표정은 죄인을 사형장으로 호송하는 사신들 같았다.
징을 든 거인이 휘장을 걷어 올렸다.

구경하러 선 마을 아낙네들이 저마다 놀라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새장 안에는 꽃으로 장식된 작은 그네가 하나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속으로는 노래하는 카나리아 대신 손톱을 조물거리는 작은 소녀가 그네를 타고 있었다.
신비한 붉은 눈동자였다. 아름답게 보이는 눈으로 모두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엷은 미소가 내려앉은 입술은 살짝 벌려져 보는 이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흐트려뜨렸다. 겨울의 불꽃 색깔을 가진 머리카락은 어깨를 덮고도 남아 아래로 찰랑 흔들렸다.
데엥, 데엥, 데엥. 다시 징이 울려퍼졌다.
지금 그들을 향해 새장에 갇힌 소녀가 가련함과 연민을 팔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자동 인형이오!! 보시오, 아름다운 인형이오!!』
맨 앞으로 걸어가던 거인이 우렁차게 고함을 질러대며 동료들에게 신호했다. 동시에 새장이 더욱 높게 들려졌다. 그 탓에 그네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철창 속 소녀가 얼른 손잡이를 붙잡았다.
찰나였다. 소녀의 시선이 제르가디스의 눈과 마주쳤다.
일사병임이 틀림 없다. 그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허리를 숙였다. 몸이 후둘거렸다. 입안으로 신물이 고였다. 이해한다며 누군가 그런 제르가디스의 등을 두둘겨 주었다.

10월의 시원한 바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불쾌한 웅성거림은 한층 더 커져만 갔다. 여자들은 남편들을 손가락으로 꾹꾹 찔러댔고 처녀들은 오빠와 남 동생, 그리고 애인의 이름을 불러댔다. 남자들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떡였다.
사람들 몇이 앞으로 달려나와 허리에 손을 얹었다.
전단지를 뿌리던 광대들도 웃기를 그만 두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음악도 중지되었다.

『이봐요. 이건 좀 심하잖소. 저런 어린 아이를 새장에 집어 넣고 구경시키다니!』
『맞아요, 맞아. 잔인해요! 멀쩡한 계집애를 인형이라고 우기다뇨.』
『단장 나와! 이건 아동 학대야! 당국에 고발할테다.』
흥분한 사람들이 옳소, 옳소 소리를 질렀다. 마을 청년들이 침을 뱉곤 새장을 향해 다가갔다. 징을 든 거인이 당황하여 워워 소리를 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벌해졌다. 손가락 관절을 뚝뚝 꺾어대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차하다간 집단 패싸움이라도 할 기세다. 타조 깃털로 몸을 장식한 여자가 이러지 말라 애걸복걸 했지만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다리세요, 여러분. 뭘 그리 흥분하는 겁니까.』
『그럼 좋았소 하고 웃으라고? 미쳤냐! 이게 무슨 짓이냐. 우리가 짐승이냐! 이런 걸 보고 즐기라니! 하는 짓도 정도가 있다. 당장 저 아일 새장에서 끄집어 내!』
『안됩니다. 저건 상품입니다. 어디까지나 인형이라고요. 인형!』
『거짓말하면 못써. 저게 사람이지 어디가 인형이냐. 네 눈알은 동태냐?』
『하, 하지만... 진짜인데...』
『뭐가 진짜냐. 이 거짓말쟁이!』

자칫하다간 주먹으로 얻어맞게 생겼다. 타조 깃털 여자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도움을 요청하며 동료들을 찾아 주변을 열심히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그 행위는 보답받아 단단히 주눅 든 그녀를 대신해서 구원병이 나타났다.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며 무리의 왼편에서 높게 손을 들었다.

『그대들이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하지만 사실이오. 저 소녀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자동 인형이지 결코 그대들과 같은 인간이 아니오.』
타조 깃털 여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해하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그 답례로 가볍게 목례를 해보이며 젊은 사내가 가벼운 몸동작으로 훌훌 날아왔다.
머나 먼 남국 바다 빛깔의 옷을 머리 끝부터 발 잔등까지 길게 늘어뜨렸다. 터번을 두른 모양이 사막인의 복장이다. 밝은 피부 색을 봐선 사막인은 아닌데 신발까지 사막인 취향으로 맞춰 신었다. 그게 꼭 잘못 맞춘 분장 같아서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자아.』
사내는 최면에서 깨어나라 환자를 종용하는 정신과 치료 의사처럼 손가락을 따악 튕겼다. 아무렇지도 않은 아주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보고 있던 사람들 대다수가 몸을 경직시켰다. 어딘지 모르게 사내의 동작은 구름 위에서나 산다는 왕족 같아 영 재수가 없었다.
단순하고도 효과적으로 일시에 마을 주민들을 진정시킨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새장 속 소녀가 루비 빛 눈동자로 그런 주인의 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당신은 누구요?』
근방 세탁소 주인이 모두를 대신하여 언성을 높였다.
『누구긴. 이 서커스에 이 인형을 대여한 주인이외다.』
그것도 모르냐는 투로 빈정거리면서 새장을 향해 팔을 뻗었다.
『자, 피스키? 그렇게 멍청하게 있지만 말고 이리로 가까이 와라. 나에게로 가까이 와서 이들의 궁금증에 대하여 답을 하렴.』
남자의 명령을 받고 소녀가 그네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눈부시게 하얀 손을 남자의 손바닥 위로 조심스럽게 얹었다.

『너는 인간인가?』
『아닙니다, 코셋트. 진리이신 주인님. 피스키는 인형입니다.』
건조하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맞다. 그걸 잊으면 정말 곤란하지, 피스키.』
남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소녀의 손목을 완벽하게 한바퀴 돌려버렸다. 가련한 손목이 끔찍한 굉음을 내며 이상한 각도로 뚝 떨어졌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며 악 소리 질렀다.
하지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희미하게 인공적인 미소만 짓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넌 인간인가? 피스키.』
푸른 옷의 남자가 확인하듯 다시 질문했다.
『아니오, 주인님. 저는 인형입니다.』
『좋다. 그럼 손님들 앞에서 그 사실을 증명해라.』
남자의 명령과 함께 소녀가 스커트 자락을 배꼽 위로 걷어올렸다.
이번에도 마을 사람들은 소리소리 질러댔다. 그러나 좀 전과는 달리 그 놀람 속엔 엄청난 당혹감, 그리고 농밀하고도 은밀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소년들은 눈을 부릅뜨고 제자리에서 껑충 뛰었다. 좀 더 잘 보고자 기를 쓰는 동생들의 뒷통수로 무쇠 주먹이 날아갔다. 그렇다고 그 형들은 얌전했느냐 하면... 당연히 아니었다. 자기가 알아서 스커트 자락을 걷어 올리는데 군침을 흘리지 않는다면 남자도 아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가운데 모두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았다.
실망감 섞인 한숨이 들판을 가로지르는 거친 회오리 바람처럼 온 마을을 뒤덮었다.

쇠로 만든 조임쇠가 보였다. 나무를 깎아서 만든 골반이 맨질거렸다. 은밀하게 감추어져야 할 여성의 그 부분은 조잡하게 패여져 부끄러운 죄악인양 거뭇거뭇했다.
나무와 쇠.
그것이 전부였다. 뜨거운 피와 핑크 빛 살은 어디에도 없었다. 감정은 있으되 차가웠다. 소녀는 모두의 경악해하는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가며 위로 치켜 올린 스커트자락을 천천히 내렸다.
기분 탓이었을까.
어쩐지 아이는 울상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보셨죠? 인형입니다. 사람이 아니예요.』
푸른 옷의 남자가 웃음을 참아가며 휘장으로 손을 가져갔다.
앗싸, 성공. 호기심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눈빛이 보통이 아니다. 이런 상태라면 여느 때처럼 피스키를 보러 서커스는 대만원 사례다. 사내는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여름 날의 하얀 날개, 자동으로 움직이는 혼의 인형...
가엾다고 여기면서도 그녀를 보기 위해 기꺼이 동전을 던지는 무례한 인간들은 홍수처럼 넘치고 있다. 보시라, 보시라.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어버린 어린 영혼이외다. 우리는 돈을 갈퀴로 긁어 모을 터이니 구경들 많이 하시길.
남자는 인형에게 눈짓했다. 피스키는 알았다며 다시 그네 위로 올라가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좋다. 얼마냐. 값을 말해다오. 그 아일 사겠다.』
사고다. 거리 한 복판에서 터져버린 대형 폭탄이 따로 없었다.
여자들은 경악했고 서둘러 교육상 좋지 못한 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어린 자녀들의 귀를 틀어막았다.
남자들도 얼굴을 붉히며 대낮 백주대로에서 뻔뻔하게 여자의 값을 흥정하려 든 철판의 주인공을 확인하려 했다.
해가 저물고 목구멍 안으로 상당 량의 술이 들어간 상태라면 그런가 보다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주민들은 극도로 기분 나빠해 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소년의 체구를 가진 흰 옷의 사내가 장갑을 낀 손으로 코 밑을 가리고 눈을 번득였다.
우우, 모두가 야유했다.
『심하다, 심해. 넌 여자 안은지 10년이나 됐냐? 뭐가 그리 급하냐, 이 도둑 놈』
근처에서 붕어 빵 장사를 시작한 에이콥트씨가 이죽거리며 배를 잡았다. 그러길 한 5초? 그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냥 알 수 있었다. 저건 여자를 안는 값이 얼마냐고 묻는 눈빛이 아니다. 눈치가 그렇게 없으면 우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저건 말 그대로의 의미다.

갑자기 주변은 활기가 넘치다 못해 요동을 쳤다. 모두가 흥분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흥정의 시간이다.
과연? 모두가 주목하고 섰다. 또로록 하고 눈동자가 굴러갔다.

『사겠다고? 이건 파는 물건이 아니오.』
푸른 옷의 남자가 딱 잘라 말했다.
『값은 충분히 쳐주겠다. 4천만 루디 내지.』
흰 옷의 남자 또한 지지 않고 잘라 말했다.

4천만 루디면 웬만한 왕국도 통째로 살 수 있다. 마을 사람들 전부가 진작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는 장관이 펼쳐졌다. 그만한 돈을 가진 자라면 태어나면서부터 왕이거나 하늘로부터 돈벼락을 맞은 극소수의 희귀종 인간이다. 하지만 수중에 그만한 돈이 있다고 쳐도 그 엄청난 천문학적인 값을 지불하고 겨우 인형 하나를?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트럼펫 부는 소리처럼 커다랗게 울려퍼졌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하나 달랑 남은 것처럼 초라하게 생긴 주제에 무려 4천만 루디를 단번에 내놓겠다며 흔쾌히 말할 수 있다? 미쳤거나 제정신이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
제르가디스는 허리춤에서 가로엮기 매듭으로 입구를 묶은 작은 가죽 주머니를 꺼내 푸른 옷의 사내에게 집어 던졌다.
『받아.』
가죽 주머니를 건네받은 사내의 얼굴이 꿈틀 움직였다. 시큰둥한 자세로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고는 끄응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너무나 투명해서 존재감 조차 없는 연한 녹색의 빛나는 돌이 주머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정도의 물건이라면 잘만 하면 5천만 루디도 나가게 생겼다. 빛남과 투명함은 둘째고 그 돌에서 퍼져 나오는 파동이 보통이 아니다. 죽은지 천년이나 지나서야 드래곤의 눈동자가 화석화된 거라는 환상의 보석... 신의 눈이다.
푸른 옷의 남자는 질렸다며 그 돌을 가죽 주머니 안에 도로 넣었다. 이걸 얻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파는 마법사도 나온다. 한가닥 한다는 마법사라면 더더욱. 실제로 그 보석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

『굉장한 거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나에겐 필요가 없소. 다시 말하지. 이 인형은 파는 물건이 아니오. 그러니까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 보석은 도로 돌려드리죠.』
일단은 곱게 설득하려 했다.
『나도 두 번 반복해서 말하진 않는 성격이야. 저 여잘 사겠어.』
『안 판다니까.』
『산다니까.』
『이보쇼.』

두 사내 사이로 때아닌 결투 무드가 펼쳐졌다.
이게 어연 떡이냐. 주민들은 환호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두의 고개가 파란 옷에서 하얀 옷으로 번갈아 왕복했다. 진지하고 숙연하기조차 한 그들의 한결같은 표정이 OK 목장의 결투를 암시했다.

『안 판다니까!! 너 죽을래.』
푸른 옷이 먼저 울컥했다. 야호다.
『그럼 어디 죽여보시지.』
그걸 능숙하게 되받아 쳤다.

전쟁이다, 전쟁!
마을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이 되어 누가 이길지를 두고 내기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