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블 소스, 오노 후유미 원작의 [고스트 헌트]. 1편 상단부의 참조글 필독 요망.


현관에 낯선 구두가 놓여져 있으면 거실에 손님이 앉아 있는 법이다. 아빠가 꽃을 사들고 귀가하면 그 날은 틀림 없는 결혼 기념일이며, 달력의 날짜가 8월이면 해변에는 피서객이 우굴거린다. 이른바 연상 작용에 의한 기대 상황이다.
따라서 미라의 발목이 튀어나온 천장을 향해 가우리가 칼날을 겨누었을 적에 리나는 슬그머니 두 손가락을 콧구멍으로 가져갔다. 몸뚱이에서 발목을 빼면 답은 아수라. 시각적인 정보는 그럭저럭 참아넘길 수 있지만 냄새엔 다소 약한 그녀다. 천장을 무너뜨리자마자 새까맣게 썩은 사람 장딴지가 떨어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은 리나는 검지와 중지로 두 콧구멍을 막을 준비부터 하고 보았다. 술지게미 냄새에 다리가 비틀거렸던 과거가 있으니 알아서 대응한다.

『내 머플러라도 빌려주랴?』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으니 지 할애비로부터 교육 잘 받은 소년이 잔소리했다.
『땀 냄새는 좀 나겠지만...』
『사양하겠소.』

어쨌거나 가우리는 칼날을 휘둘렀고, 천장의 일부가 굉음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바로 이때다! 리나는 반사적으로 재빨리 콧구멍을 향해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콧구멍이 얼얼했다.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그거 하나는 좋다만... 그런데 왜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는 거지.

한참만에 가우리가 어처구니 없다며 쓰게 웃었다.
『리나. 너, 그렇게 하는 거 상당히 아프지 않니?』
『어?』
결론만 말해볼까. 손가락 준비는 지나친 오버 센스였다. 뚫린 천장에선 판자 부스러기만 떨어졌다.
신발도 있고 테이블엔 컵도 놓여 있는데 정작 거실엔 손님이 없다. 잔뜩 긴장했는데 대통령의 일정은 취소되었다. 동전으로 복권을 긁었더니「다음 기회에」란다. 에이, 김 빠져. 리나는 피곤에 절어 콧구멍을 막은 손가락을 도로 내렸다.

『그럼 가볼까.』
위로 먼저 올라간 두 남자는 방금 태어난 비너스를 바다에서 막 건져내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리나는 이들의 팔을 잡고 단숨에 올라갔다.
『실례합니다. 여보세요? 헬로우. 누구 여기 없나요.』
손바닥을 둥글게 말아 아무도 없느냐 외쳐봤다.
다른 장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잡다한 생활 집기품들이 제법 보였다. 굵은 먼지만 아니라면 엊그제까지 사람이 살던 곳 같다.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 없지만 놀랍게도 슬리퍼까지 굴러다녔다. 이삿짐을 옮기면서 필요 없는 물건은 모조리 버리고 떠난 형상이다. 나무 궤짝처럼도 보이는 일반 사무용 서랍장도 나왔다. 안에 뭐가 있을까 싶어 고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열쇠를 채워놓았는지 서랍은 달각달각 소리만 내고 움직이진 않았다. 흥 소리며서 쥐었던 고리를 도로 놓았다.
옆으로는 찢어진 박쥐 우산도 하나 떨어져 있었다. 발로 툭툭 건드려봤다. 지네가 기어나왔다.

『직원들이 머물던 방일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아. 바닥을 봐. 이게 어디 정상이냐. 사람이 먹고 자는 장소에서 요구되는 편안함과 안락함이라는게 여기서 느껴지냐고.』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그 첫 번째 인상은 흡사 수영장의 바닥 같다는 거였다. 손바닥 너비의 타일이 빈틈 없이 깔려 있다. 크기나 모양이 어딘지 모르게 싸구려 여인숙에 있는 공동 욕장을 연상시켰다. 가우리는 두리번거리며 샤워기의 흔적을 찾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수도꼭지, 아니면 대형 욕조... 별 생각 없이 발바닥으로 타일 면을 문질러봤다. 먼지가 뒤로 밀리면서 원래의 색이 드러났다. 놀랍게도 조잡스러운 느낌을 주는 짙은 쥐색이다.
제르가디스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그들이 묵었던 방의 고급스런 취향과 비교하자면 그 괴리감이 너무 크다. 뭐랄까, 왕궁 담벼락 바로 옆으로 고개를 삐죽 내어민 판자촌이라는 느낌? 그래도 공작가문인데 알짤없이 서민 취향이라.

지나친 서민 취향은 또 있었다. 한켠으로는 아주 먼 옛날 칸막이용 커튼으로 사용되었을법한 천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두껍고 색이 짙은 커튼이었다. 호기심에 들추어봤다. 역시 아무 것도 안 남아 있다. 하다못해 핏자국이라도... 라고 생각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말도 안되는 분위기 전염이다. 밑도 끝도 없이 핏자국부터 상상하다니. 거기다 핏자국을 찾기엔 커튼의 색이 너무 까맣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쥐었던 커튼 자락을 도로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출입구쪽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비틀어봤다. 어랍쇼. 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부드러운 용수철 소리를 내며 매끄럽게 돌아갔다. 이곳의 문들은 벽돌로 막아놓지 않았다. 문의 손잡이를 시험하듯 좌우로 돌렸다. 잘 열리고 잘 닫겼다.
『여기서부턴 개축공사를 하지 않은 것 같군.』
따라서 그 주변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 외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있는 복도도 연탄불을 쬔 오징어처럼 뒤틀리지 않고 곧게 뻗어 있다. 숨막히는 어둠이 잠식해 들어가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만사가 평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털이 쭈삣거린다.
고개를 빼꼼 내밀어봤다. 온도가 매우 낮았다. 뺨으로 축축하고도 싸한 냉기가 닿았다. 시원하다던가 깔끔하다는 축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다. 죽은 생선이 가득찬 방에서 허우적거린다는 그런 느낌이다. 금방이라도 비린내가 날 것 같다. 당연한 결과로 그다지 발을 들여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으스스하게 만들어진 괴물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분 나빠.』
리나는 잠시 머뭇거린 뒤 열었던 문을 도로 닫았다.

『느낌으로 봐선 여기가 저택의 정 중앙 부분이라는 건 확실한데... 그거 참. 답답한 노릇이군. 어이~ 뭐 찾은 거 있어, 가우리?』
이것이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가우리가 이것 좀 보라며 습득물 하나를 높게 들어보였다.
에엑- 깔대기?
얼핏 봐선 어린애 장난감처럼도 보인다. 금속으로 만든 나팔꽃 모형 같기도 하다.
제르가디스가 어디 좀 보자며 손을 내밀었다.
『이거, 진찰기잖아.』
주둥이의 넓은 부분을 환자의 배에 가져가고, 좁은 부분은 귀로 가져간다. 이것으로 위액이 꾸루룩 소리를 내며 장 내부를 지나가는 걸 들을 수 있다. 그 흉흉한 소리를 들어 뭐에다 쓸 거냐고? 본인에게 묻지 말라. 어쨌거나 제르가디스의 설명으로는 효율이 바닥에 가까운 전근대적인 의료 기구라고 한다.
혐오감 반, 호기심 반에 손에 대고 탁탁 털어봤다. 오래되어 누렇게 쩔은 솜뭉치가 떨어졌다. 확실히 의료용 기구이다.

『그런게 왜 여기에?』
『아! 그러고보니 선대 당주가 자선 병동을 운영했다고 했었지?』
『틀려. 자선 병동을 자기 집 안에다 짓는 인간도 있냐.』
『하긴. 말이 안 되는군.』
하지만 자세히 보면 지금 그들이 자리한 방은 보면 볼수록 병동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왼편으로 미닫이 문이 하나 달려 있다. 열어보니 붙박이 벽장 속에 빈 선반이 빼곡했다. 약초나 유리병, 붕대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상상하면 아무래도 병동 맞다. 손을 넣고 선반 위를 쓸다보니 약초로 여겨지는 마른 입사귀도 하나 나왔다.

크기는 작다. 끝이 뾰족하고 잎맥이 모두 네 갈래로 갈라져 있다. 갈라진 모양은 갈고리 발톱을 연상시켰다. 냄새를 맡아보니 독특한 향이 느껴졌다. 입사귀를 집어든 제르가디스는 조심해가며 그걸 입에 살짝 물었다. 그러다 갑자기 표정이 나빠졌다. 퉤- 소리를 내며 입안에 고인 침을 서둘러 뱉었다. 놀랍게도 뱉어낸 침의 색깔이 금방 우러낸 홍차 빛깔이었다. 리나는 놀란 표정으로 입술을 북북 문지르고 있는 소년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아. 걱정할 것 없다. 독은 아니니까. 이건 텍사토이스하나문이야.』
뭐? 텍사스 특급으로 허니문을 간다고? 리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텍사스 특급 같은 소리. 박찬호는 이미 물 건너갔다. 제르가디스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텍사토이스하나문. 그런데 그게 진짜라면 이건 무척이나 수상쩍군. 이 약초는 환각제에 가까운건데? 여기가 병동이라면 병동에 왜 마약이?』
『마약?』
『그러니까... 음. 예를 들어 상한 수족을 절단할 적에 환자를 기절시키기 위해 사용한다. 그만큼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에게 투여하지. 보통은 사용하지 않아. 이건 습관성이 되기 쉬운데다 간혹가다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지는 일도 있어서...』
손가락에 약간만 힘을 줬어도 입사귀를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사용하는 일이 거의 없어.』
『하지만 여기서 그 약초가 나왔다는 건 사용했다는 얘기잖아.』
『팔이라도 잘랐나 보지.』
『그런 농담 싫어, 제르가디스.』
『과연 농담일까.』

소년은 누군가가 남겼던 경고의 메시지를 새삼 상기시켰다.
이곳에 온 사람은 모두 잡아 먹히고 있다.
그러니 직효성 환각제를 잔뜩 먹이고 팔 다리를 잘라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도망쳐.
게다가 경고문은 분명 그렇게 마무리 되어 있다.

『어... 리나.』
『왜, 가우리?』
『어쩌면 우리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닐까.』
가우리가 쥐었던 검을 고쳐 잡았다. 갑자기 심각해져선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동시에 촤락 소리를 내며 칸막이용 커튼자락이 옆으로 밀려났다.
환장하게스리 커튼을 잡아당긴 손이라는 건 이쪽에선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은 있는데 그림자가 없다. 리나는 겁 먹었다는 걸 숨긴 채 목소리를 높였다.

『누구냐!』
대답이 없다.
대신 저벅 저벅 바닥을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로 봐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역시나 그림자는 없다. 내 귀가 잘못된 것? 리나는 인상을 쓰며 정면을 응시했다.
머뭇거리며 다시 질문했다.
『누구냐니까!』

《조용히 하라. 나는 주절주절 떠드는 걸 매우 싫어한다.》
『악!!』
거기서 비명을 지르지 않으면 머리가 잘못된 거다. 눈앞에서 별똥별이 번쩍인다 싶었다. 이어 엄청난 통증이 머리를 강타했다. 몽둥이로 맞았다? 모르겠다. 확실한 건 바닥으로 코를 박았다는 거였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에서 손으로 볼록하니 혹이 튀어나온 뒷통수를 가렸다. 닫겨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니,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
『으악!!』
누군가 다시금 재확인하듯 머리를 가격했다. 고통에 대한 당연한 신체적 반응으로 눈물이 솟구쳤다. 어깨가 경직되었고 얄팍한 피부 한 장 저 너머의 해골이 덜걱거리며 요동쳤다.

그런데 개 같은 사실을 하나 더 말해주랴. 이쪽에선 때린 사람이 안 보였다는 거다. 몽둥이를 휘둘러대는 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얼굴? 뭐가 있어야 지랄이라도 할 거 아닌가. 남들이 보면 원맨쇼, 그것도 무척이나 깜찍한 꾀병처럼 보였을 거다. 저 혼자 머리를 쥐어잡고 펑펑 울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목소리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주인님이 기다리신다. 엄살은 그만 피우고 일어나라.》
음침한 목소리가 리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힘주어 잡아당겼다. 덕분에 한껏 뒤로 젖혀진 턱이 무지 아팠다. 그런데도 저쪽에선 계속해서 잡아 당겼다.
이제는 콧물도 줄줄 흘러내렸다. 머리가죽이 홀랑 벗겨지는 듯한 통증에 리나는 원 없이 고함 질렀다. 고함만 질렀나. 당연히 한 성격 발휘하여 반항했다. 손톱을 세우고 발길질, 나아가 허리 비틀며 발버둥. 그뿐인가. 기합을 넣고, 마력을 끌어 모아, 차려놓은 밥상을 거꾸로 뒤집는 근성을...
『커억!』
보기 좋게 발길질 당했다. 젠장.

《버릇이 없구나. 펄펄 날뛰는 걸 보니. 사흘 간 굶겨야겠다. 그러면 얌전히 죽을까.》
사흘을 굶겨?! 이봐, 밥은 주고 죽이라구. 밥도 안주고 죽이면 반칙이야.
아니. 이런 한심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지. 내가 미쳤나.
일단은 기절한 척하고 등을 구부렸다. 버둥대던 동작도 멈췄다. 흰자를 드러내고 손과 발을 축 늘어뜨렸다. 눈에 띄게 이완된 모습에 상대방이 방심하는게 느껴졌다.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힘이 다소 느슨해졌다. 그래~ 이래서 싸움엔 연극적 요소가 필수불가결이라는 거 아니겠나. 바로 이때다 싶었다. 으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갈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주먹을 확 치켜들었다.
『화이어볼~!!』
《케에에에엑!》
형체조차 희미한 그림자는 불꽃에 닿자마자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비명을 질러대며 멀직히 떨어졌다. 엉겹결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사람이 내는 소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아, 진짜 시끄럽네. 그만 떠들고 없어져버렷! 에르메키아 란스~!』
영혼을 찢는 한줄기의 청광이 그림자의 정 중앙으로 날아가 꽂혔다. 순간 아찔하리만치 밝은 빛이 터졌고, 비명은 송두리째 지워졌다. 뒤를 따른 것은 새삼 반가운 정적.
리나는 잔뜩 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짜증나게스리. 헉헉.』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제르가디스였다.
『여어.』
소년은 이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손을 가볍게 드는 것으로 자신의 무사함을 알렸다. 그래도 제법 날뛰고 난 다음이었는지 왼손으로 부여잡은 목 부위가 영 심상치 않았다. 흡사 밧줄에 감겼다 풀려난 것 같은 자국이었다. 벌써 벌겋게 부어올라 선명한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쥐고 있는 검날의 빛이 마그마처럼 새빨갛다. 일시적으로 마력을 불어넣은 칼날의 가장자리에는 사람의 살가죽이 아닌 것이 분명한 검정색의 오물도 붙어 있다. 타르처럼 불결해 보이는 그것은 뚝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져서는 결국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덩달아 기분이 나빠진 것 같다. 소년은 발작적으로 칼날을 튕기듯 털어 그나마 붙어있던 오물을 모조리 떨궈냈다.

『방금의 건 뭐였지.』
『나도 모른다. 다만 우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해.』
좋아한다면 신호도 없이 달겨들어 복날 개 다루듯 할까. 옆구리 부분은 아예 솔기가 터졌다. 끙 소리를 내며 못말리는 통증을 호소하고 있는 갈비뼈를 달랬다. 얼마나 세게 걷어차였으면 맞은 자국이 활활 달아오르며 저려왔다.

『저 빌어먹을 것들이 주인님 어쩌고 떠들던데.』
『나한테는 다짜고짜 머리부터 숙이라고 윽박지르던 걸. 천 것이라면서 말이지.』
말이 심하다. 리나는 울그락푸그락 화부터 냈다. 누가 천 것이라는 거냐, 누가!
『아아, 그래서 상대방 머리부터 숙이게 했다. 서민의 긍지를 얕보면 곤란하지.』
『잘 했어! 정말 잘 했어!』

그나저나 이 집의 주인님이라.
필라멘트 전구에 불 켜졌다. 리나와 제르가디스는 동시에 상대방을 손가락질 했다.
『우러드 공!』
하여 해독되지 않은 두 번째 경고 문구 [우○드가 ○○다고 들○다] 는 다음과 같이 읽혀진다. 리나와 제르가디스는 다시 한 번 더 동시에 소리 질렀다.
『우러드가 죽인다고 들었다! 우러드였어!』
『맙소사! 가우리는?』

머리카락은 잡히지 않았다. 대신 발목을 잡혔다. 5미터 가까이 복도 쪽으로 짐짝처럼 끌려갔다.
제발 좀 그만하라는 뜻에서 검을 휘둘러봤다. 붕붕 소리만 내었을 뿐, 뭔가를 찔렀다거나 베었다던가 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식은 땀이 흘렀다. 차라리 식인 곰을 만났으면 적당히 손봐줄 자신이 있는데... 속으로 투덜거렸다. 신체가 있는 상대여야 뭘 어떻게 할 거 아닌가. 기합으로 날려버릴 수 있는 상대라면 진작에 그렇게 했다.
안되겠다 싶어 검날을 고쳐 잡았다. 일이 이렇게 되면 일단은 끌려가지 않고 버티는 일이 먼저였다. 하나 둘, 셋! 찍고! 바닥에 검날이 깊이 박혀 들어갔다 싶기가 무섭게 죽자 살자 붙잡고 매달렸다. 오기라도 부려본다. 더 이상은 안 끌려간다.

《반항하지 마라. 주인님이 많이 기다리셨다.》
『그거야 그쪽 사정이고 난 급한 거 하나 없거든요. 혹시 그 주인님이 아름다운 아가씨라고 해도 이렇게 거칠게 사람을 초대하면 실례잖소. 나, 안 가요.』
《여기서 네 의견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자, 어서 주인님께로...》
『초대는 고맙지만 지금은 안 간다니까~! 그나저나 무슨 자식이 힘이 이리 장사야!』
가우리는 욕을 퍼부으며 신나게 바둥거렸다. 면상이 있다면 즉각 걷어찼을 터인데. 쳇.

초조해졌다. 이 상태로는 그리 오래 못 버틴다. 바닥을 찍은 검날이 비꺽비꺽 소리를 내며 좌우로 흔들렸다. 치과 선생님이 웃으며 쳐다보는 어린애의 유치가 생각났다. 저 움직임이 의미하는 건 뻔하다. 유능한 웨이터의 손아귀에 쥐어진 코르크 마개처럼 바닥에 박힌 검은 곧 빠질 것이다.

뾱.
역시 뽑혔다.

『우와아아~!!』
검날이 빠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발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더 들어갔다. 이제는 끌려만 가는게 아니라 아예 내던져졌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팔을 위로 둘러 뒷통수를 보호했다. 낙법이다. 낙법을 떠올리자. 공중에서 재비돌아 최대한 몸을 구부렸다.
『아이쿠!』
낙법은 10점 만점으로 매우 훌륭했다. 하지만 문제는 뒤쪽에 있던 수납장이 충격을 받아 앞으로 고꾸라졌다는 것... 쏟아지는 물건들에게 얻어맞고 마무리로는 엎어진 선반에 몸이 깔렸다. 쾅 하는 굉음과 같이 해서 귀에서 윙 소리가 났다.
『어휴, 이러단 죽겠네.』
두 팔로 쓰러진 물건을 밀쳐보려 끙끙 애썼다. 그런데 이놈의 망할 가구가 영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돌아버리겠다. 이래서는 바위산에 깔려 벌 받는 손오공이 아니더냐.
『어허허허~! 제르가디스? 리나! 나 좀 도와줘~!!』
이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우리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선반은 여전히 그의 몸을 짓눌러댔고, 눈앞으로는 빠른 속도로 시커먼 그림자가 휙휙 지나갔다. 발자국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고 있다. 귀신이다, 귀신. 그래서 한층 더 초조해졌다.

그 와중에 자지러지는 젊은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살려줘! 살려줘요~!!》
《발버둥칠 것 없다. 금방 끝나니까.》
《잘못했어요, 잘못했다니까요! 몰래 집안에 들어와서 죄송해요! 벽에다 낙서해서 정말 죄송해요! 벽난로에 오줌을 갈긴 것도 사과할게요. 용서해줘요! 제발, 제발! 죽이지만 말아요!》
《용서한다. 그러니 얌전히 죽으면 된다.》
《안돼! 안돼! 난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구~!!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영광이라 생각해라. 네 뼈와 살과 피를 주인님이 받아가실 거다.》

가우리는 다시 힘을 줘서 선반을 밀쳐내려 애썼다. 우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엄마~!! 형! 도와줘! 도와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그러니까!》
다음으로는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비명이 들려왔다. 사람 죽는 소리였다.
혈압이 올라갔다. 좋다, 다시 한 번 해보는 거다. 하나! 둘! 젖 먹던 힘을 다해 선반을 굴렸다.
『으드드드드!』
되었다! 발이 빠졌다! 흐릿해진 두 눈을 부비며 자리에서 억지로 일어났다. 발목을 약간 접지른 듯 하지만... 이 정도야 참을 수 있다.

『누구요! 거기 누구요!』
황급히 앞으로 달려나가려다 찌익 미끄러졌다. 젠장맞을. 타일 바닥이 젖어 있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가까스로 넘어지려던 몸을 추스렸다. 누가 칠칠맞게스리 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 물이라는게 왜 이렇게 붉은 걸까.
『피?!』
아래를 쳐다봤다.
먼지 하나 없는 타일 바닥 위로 아직 채 굳지도 않은 핏물이 고여 있다.
입을 벌린 채 이번엔 앞을 쳐다봤다.
남자 둘이 양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운 청년을 양편에서 움켜잡았다. 남자 하나가 기다란 톱을 들어 포로의 목을 겨누었다. 피부에 대고... 밀고, 당기고, 다시 민다. 경악해 마지 않는 청년의 눈이 가우리와 정확히 마주쳤다. 숨을 들이마실 수 없기 때문에 이미 비명은 지를 수 없다. 하지만 생으로 목이 잘리고 있음에랴. 청년의 입이 있는대로 벌어졌다. 가우리는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그의 목젖과 피로 젖은 잇몸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촥 소리를 내며 피가 일직선으로 튀었다. 동맥은 물론이고 순식간에 뼈까지 잘렸다.

아마도 그 사내가 절명하는 것과 동시였을 것이다.
『악령은 사라져라!』
뒤편으로 양날의 검이 떠올라 사선으로 베어들어갔다.
촤아악-
그들 세 사람의 허리가 동시에 동강이났다.

『우와앙! 제르가디스!』
반색하고 꼬리치며 달려갔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어이쿠, 우리 불쌍한 똥강아지」가 아니었다.
『안돼! 아직 이쪽으로 오지 마라!』
제르가디스는 울며 좋아라 하는 가우리를 재빨리 제지했다. 그것도 검을 겨누면서 말이다.
『왜?!』
충격 먹고 반문했다.
『나는 가우리야. 나, 괴물 아냐! 얘들아?』
『누가 너더러 괴물이라든? 잘 봐. 너, 그쪽으로 넘어갔다구.』 
리나가 본 가우리는 온통 회색이었다. 파란 눈동자도 회색, 눈부신 금발도 회색.
가우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며 자신의 두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살색이 아니라 정말로 회색이었다. 먼지가 묻었다?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손바닥을 탁탁 털어봤다. 시험삼아 어깨와 바지도 털었다.
『씻으면 되겠지, 뭐. 리나, 네 머리도 잿빛에 가깝다? 알고 있니?』
『바보야! 우린 아직 이.쪽에 있다구. 나야 머리를 감으면 금방 원상복귀지만 넌 달라. 그나저나 무슨 재주로 그.쪽으로 넘어간거냐, 응?』
이쪽? 그쪽? 넘어가? 뭘 넘어? 가우리는 지긋이 손가락을 빼물었다. 그는 곰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주를 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됐어. 떠들고 화낼 시간도 없다. 아직 정신 놓지 말라구, 가우리.』
리나가 다시 손아귀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 공격적인 자세에 가우리는 흠칫해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다. 그것도 두 다리가 바닥에서 3cm 가량 공중에 떠 있다.
검정의 스커트와 흰색의 셔츠. 하녀 복장. 결정적으로 한 번 봤던 얼굴이다.
『설마, 새라?』
치마는 온통 토사물 투성이었다. 뺨엔 말라붙은 눈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그러진 눈썹과 꽉 쥐어진 주먹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가우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여자의 팔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다 흠칫해서 손을 떼었다. 이미 맥이 없다. 여자는 말 그대로 겁에 질려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런데 왜 공중에 떠있는 거야?!』
결론적으로 가우리의 그 말은 틀렸다.
순식간의 여자의 몸은 열려진 문쪽을 향해 미사일처럼 날아가 버렸으니까.
마치 발바닥에 엔진을 달아놓은 듯하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으앗?』
『가우리! 멍청하게 있지 말고 서둘러! 따라가야 해.』
정말 급하게 되었다. 리나는 이미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가고 보았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달리기 솜씨라는 건 이럴 적에나 발휘하고 보는 거다. 닫겨진 문짝은 몸통 박치기로 박살내고는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처럼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했다. 날리는 파편에 뺨이 긁혔다. 옷소매로 피를 닦아내면서 쳇 소리를 냈다. 까짓 것, 침만 바른다. 새처럼 가볍고 타조처럼 튼튼한 다리다. 누가 놓칠 줄 알고.

『모두 옆면으로 붙어!』
누가 던진 건지 모를 의자가 휙 날아갔다.
『머리 위를 조심해!』
절묘한 타이밍으로 샹들리에가 요란한 소리를 내고 추락했다.
『계단이다! 계단 쪽으로 날아간다!』
한 번에 다섯 계단씩 뛰었다. 죽자 살자 따라 붙었다.

이번엔 제르가디스가 리나보다 한발 앞서 나갔다.
『이러다간 놓치겠는데.』
『제길, 일이 이렇게 되면 날아라 코알라닷!』
발목으로 힘을 주었다. 성호를 긋고 하나, 둘! 점프해서 럭비공 잡아채듯 해서 여자를 붙잡았다. 되었다! 그런데 환장하게스리 타겟의 속도는 여전히 줄지 않았다. 앗,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리나의 두 다리가 바닥에 닿았다. 그 상태에서 몸이 덩달아 질질 끌려갔다. 이래서는 마차 뒷바퀴에 밧줄로 묶여 끌려가는 통나무다. 리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과 동시에 가우리가 악을 쓰며 훈수했다.
『일단 놔! 놓으라고! 리나!』
『너라면 놓을 수 있을 거 같냐, 이 상황에에에에~?! 꺄아아악~!!』
죽을 맛이라는게 바로 이런 것이다. 눈은 차마 감을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죽은 여자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옷자락에 토사물이 묻어 미끄럽다는게 재앙이나 마찬가지다. 손가락에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이러다간 그대로 놓쳐버린다!
제르가디스가 미친 듯이 고함을 질러댔다.
『맞은편에 벽! 제기랄! 리나! 그대로 박았다간 몸이 절단나서 죽어! 그냥 놔버렷!』
하는 수 없었다. 손을 놓아버렸다. 오메, 아부지.
관성의 법칙에 의해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어 들려온 건 차가운 벽에 맨 얼굴로 헤딩하는 소리. 죽은 여자의 몸뚱이 역시 거의 동시다 싶게 전속력으로 처박혔다. 와지끈 소리를 내며 몸의 절반이 뭉그러졌다. 얼마나 세게 부딪쳤는지 시신은 접착제로 발라져 벽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리나가 노성을 질러대며 벌겋게 된 얼굴을 들었다. 한줄기 코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런 리나의 얼굴을 본 제르가디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왜, 내 꼴이 그렇게 우습냐, 제르.』
『아니. 우습다라기 보다는... 리나. 얼굴에 묻은 그거... 피?』
『아유, 아파! 그럼 네 눈엔 이게 콧물로 보이냐!』
콧물로는 보이지 않지만 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걸 어쩐다. 너, 아무래도 그쪽으로 갔어. 내 눈엔 그 피가 회색으로 보인다구.』
『켁!』

회색 인간 둘에 총천연색 인간 하나.
리나는 당황해서 자기 손을 내려다 봤다. 하얀 장갑에 빨간 피가 묻어있을 터다. 그런데 장갑은 회색의 이물질로 더러워져 있었다. 어이가 없어 콧등을 북북 문질렀다. 냄새는 비릿한데 시각적으로는 전혀 피 같아 보이질 않았다.
큰일 났다. 입술을 깨물고 허겁지겁 주변을 둘러봤다.

순간 눈이 쩍 벌어졌다.
아까와는 달랐다. 새로운 세계였다. 먼지 하나 없는 복도. 기름칠된 문짝. 새것처럼 보이는 등잔에 선명한 빛깔을 내뿜고 있는 적자주색 카펫트... 같은 장소이자, 결코 다른 장소이다.
『욱!』
아울러 무지무지 진한 피 냄새.

또 하나 달라진게 있었다.
리나와 가우리는 불쑥 나타난 커다란 문을 보고 입을 벌렸다.
『뭐? 이 앞에 문이 있다고?』
제르가디스는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그러나 아무리 노려봐도 그의 눈엔 벽밖엔 안 보였다.
『장난이지?』
『거짓말 하는 거 아냐.』
리나가 시험삼아 손잡이를 잡았다.
『이거 안 보여?』
『전혀. 네가 손목을 돌리는 있는 동작은 보이는데 뭘 잡고 있는 건지는 안 보여.』

가볍게 한숨.
리나는 가우리와 얌전히 눈을 맞췄다.
악몽의 나라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럼 슬슬 돌격해볼까. 리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눈빛을 달리했다.

『야, 이 개 자식! 거기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얌전히 나와!』
욕설과 함께 문을 걷어찼다.
시도는 좋았다. 뻥 하고 걷어차면 뭔가 당당해 보이니까. 하지만 바닥이 미끌거린다는 점에서 발길질을 날린 건 분명 실수였다. 얼음판에서 한쪽 다리를 들면 필연적으로 아라베스크 자세를 취하게 된다. 거기서 약간만 실수하면? 당연히 뒤로 넘어진다. 팔을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꼴사납게 주룩 미끌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런데 들리는 소리가「콰당」도 아니고「쿵」도 아닌 첨벙?
『우라질!』
온통「젖어 있다」라는 것이 그 첫 번째 인상.
그리고「붉다」라는 것이 그 두 번째 인상.

정 중앙으로 옷을 잘 갖춰 입은 남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비단을 깔은 테이블 위로는 잔이 하나, 그리고 접시가 둘. 분위기로 보자면 식사 시간이다만 테이블은 돼지 피를 모아놓은 통속에서 만 사흘을 굴러다닌 듯한 인상이었다. 그 더러움에 가우리가 윽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혐오감을 자아내는 광경이다. 백전노장도 눈살을 찌푸리고도 남겠다. 게다가 그 악취라는 건... 울렁 하고 신물이 넘어왔다.

남자는 기교적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움직여 접시 위의 고기를 썰었다.
리나의 눈썹이 무너지듯 내려앉았다.
설마, 사람의 심장?

《젊고 아름답다. 이제는 나의 피와 살...》

우아한 자태로 잘라낸 살점을 입에 넣고 씹었다.
천천히 맛을 보다가 왼쪽 뺨을 살짝 일그러뜨린다.
약간의 상념에 사로잡혀 나이프를 내려놓는다.
《조금은 질기군.》
그리고는 입맛을 다시며 유리컵 속의 붉은 액체를 음미했다. 구겨졌던 얼굴이 살짝 펴진다.

『당신...』
악몽 속의 남자가 건배하듯 잔을 다시 들었다.
《사람이 살기 위해 소나 돼지를 먹는다고 비난받는 일은 없지.》
『그거야...』
《나 또한 마찬가지야. 이들은 모두 내 식량이다.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된다.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여자여.》
『당연하잖아! 자기 멋대로 멀쩡한 사람을 그깟「식량」으로 만들지 말라구! 동의도 없이 먹어치우면 죽은 사람만 억울하잖아!』
《자네는 돼지고기를 먹으면서 그 돼지에게 먼저 동의를 구하나? 미안하지만 내 배가 고프니 널 먹어야겠소, 이렇게?》
『혓바닥 놀리지 마. 사람과 돼지는 달라!』
《구체적으로 뭐가 어떻게 다른데? 돼지는 불쌍하지 않고 사람은 불쌍해? 생명의 가치가 그렇게 다른가. 다 똑같잖아.》
『그렇게 똑같다면 왜 당신은 돼지를 먹지 않고 사람을 먹는 건데?』
《그야 가장 존귀한 고기니까... 정말 맛있어. 달콤하고 부드럽지. 사람의 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적마다 느낄 수 있어. 이건 삶이야. 이게 바로 영약이야. 바로 이게 내가 찾던 답이야.》

눈이 번득인다. 엷은 호박 빛깔이다.
사람의 눈동자가 저렇게까지 희번득거릴 수 있던가.
아니. 이미 그는 질 나쁜 마물이다.
리나는 가만히 검을 꺼내 잡았다.

《건강하게 태어난 사람은 전혀 몰라.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해 하는 사정 따위 알게 뭐야. 태어날 적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기분을 누가 알아. 그러니 어쩌겠어. 강제로 빼앗는 거야. 그러니 빼앗는 거다. 생명... 그들의 삶. 이젠 내꺼야. 내 몸에 들어가 내 일부가 되는 거야. 건강한 육체, 건강한 심장, 깨끗한 피... 다 내꺼야.》

완전히 날강도로구먼.
리나는 검날을 시험삼아 두어 번 탁탁 털었다.

『그래서 내키는대로 먹어치웠나, 우러드. 젊은 사람만 골라서?』
《역시 자네도 비난하는가. 날 어둠고 추운 이곳에 가두어버린 내 아들처럼? 역시 몰라. 아무도 몰라. 아무도 이해를 해주지 않아.》
『그야 당신 말대로 난 몰라. 난 뼛속까지 튼튼 체질이니까. 하지만 이건 알아. 사람의 피와 고기는 약이 아니야. 반대로 맹독이지.』
《독?》
『그래. 당신을 악귀로 만들어버린 독! 정신 차려, 우러드. 당신은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싸움의 기본은 선공과 기선제압. 상대방이 먼저 덤벼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단번에 달겨들어 검날을 경동맥 쪽에 박아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쓰러질 상대는 아니니까 공격에 성공했다고 머뭇거리고 있으면 곤란하다. 뒤로 다시 점프하고는 마법으로 재차 공격했다.
『모노볼트!』
방전하는 음전기와 양전기가 푸른빛의 기둥을 만들며 남자의 몸을 강타했다.
라고 해도 역시다. 여전히 빠직거리며 푸른 번개를 튕겨내는 손으로 우러드가 리나의 어깨를 잡았다.
《나의 살! 내 피!》
『치잇! 누가 공짜로 준대냐?!』
아멜리아식 한방이다. 주먹으로 마력을 담아 상대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런데 젠장이다. 필 전하와 그의 아름다운 딸은 이것으로 마족도 무찌르던데 리나에겐 아직 무리인가 보다. 우러드는 조금만 주춤하고 떨어졌다. 겨우 그게 전부이다. 놀라서 그런 거지 데미지도 없어 보인다. 약간은 열 받는다. 
『열 받게 만드네. 프리즈 에로우!』
이것도 가뿐하게 피해버린다. 그러더니만 가우리 쪽으로 달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엇, 설마... 식량 조달이냐?!

『우왓! 난 맛 없다구! 그러니까 하지 마!』
턱을 벌리고 먹겠다고 달겨드니 당연히 기겁한다. 가우리는 놀란 나머지 검집에서 칼을 뽑으면서 그대로 쳤다.
《흐으으으...》
날아오는 검을 귀신처럼 피하면서 천장으로 가 붙었다. 카아- 하고 송곳니를 드러내며 입맛을 다신다. 아, 정말 징그럽다.

『제르가디스! 뭐 하냐. 너도 보조해라. 앙?!』
그런데 대답이 없다.
『뭐 하냐!』
뭐 하긴. 구석에서 애꿎은 벽만 노려보고 있었다. 소년은 땀을 뻘뻘 흘려대며 나름대로 파이팅을 외쳐봤다. 그러나 외침은 너무나 공허했다. 몸은 여전히 저쪽에 있다. 따라서 아무리 눈이 좋아도 이쪽의 움직임을 따라올 수가 없다. 저 혼자 북치고 장구를 친다. 무차별로 공격하려니 아군의 안부가 걱정이고... 그러니 염불만 외운다. 어정쩡하게 검들고 눈치만 살살이다.

『하는 수 없군.』
만찬 식탁에서 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소년의 바지를 향해 집어던졌다. 파앗 하고 컵에 든 피가 튀었다. 바짓단에 피가 묻자 소년의 파란 피부가 점차 무채색으로 변해갔다.
『혼자 놀지 말고 너도 이쪽으로 와!』
다소 난폭한 초청 방식이었지만 이러쿵저러쿵 따질 때가 아니다.
『어때, 제르가디스?』
『속이... 울렁거린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하는 바다.』

제르가디스는 답례 대신으로 주문부터 외웠다.
『라- 틸트!』
나왔다, 필살기!
그런데 리나는 근심으로 이마부터 접었다. 처음부터 강하게 밀고 나오면 이상하게 나중까지 죽도록 고생하더라 하는 징크스라는 것이... 제대로 먹혀 들어가 준다면야 걱정이 없다. 라 틸트의 주문엔 웬만한 마족들도 뼈를 추리지 못하니까. 허나 제대로 먹혀 들어가주지 않을 때가 문제다. 지금처럼 상대방이 무지하게 빠른 속도로 피해버리면 지붕 위로 올라간 닭 쳐다보는 식이 되어버린다. 거기다 닭들의 반격이라는 것도 있다.

『피해!』
『이런!』
제르가디스는 팔뚝을 생으로 물어뜯기고 난 다음에야 뒤로 일보 퇴각했다. 그래도 명색이 록골렘 키메라인데 살점이 떨어졌으니 본인도 많이 놀란 듯 하다. 아프다는 건 나중이다. 피 나는 팔을 부여잡은 제르가디스는 소곤대며 리나에게 의견을 물어왔다.
『설마. 이거, 물렸다고 전염되는 건 아니겠지?』
『바보. 지금 그런 걸 걱정할 때냐?! 그리고 저 친구는 늑대 인간이 아니거든.』
아무렴, 늑대인간보다 질이 더 나쁘다.
『굴러!』
가우리의 신호에 무조건 몸을 굴렸다. 아슬아슬했다. 간발의 차이로 나이프가 날아갔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재빨리 일어나 태세를 갖췄다.
『어떻게 좀 해봐, 리나!』
『어떻게? 어떻게 하리. 라그나 블레이드로 온 방안을 무차별 절단내리?』
무너진 구조물 탓에 압사할 위험성이 다분하지만 저 사람 먹는 괴물을 반으로 토막내는 건 가능하다. 단점이라면 그도 죽고, 콘크리트 덩어리에 깔리는 이쪽도 살아남기 힘들다.
제르가디스가 어이없다며 눈을 부라렸다.
『너 죽고 나 죽자 작전은 기각.』
『그럼 실내에서 드래곤 슬레이브를 날리라는 거니?』
『모두 폭사한다 작전도 기각! 리나, 제대로 된 판단을 해!』
『누가 놀고만 있다냐?! 판단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어!』

당연히 판단하고 있다. 그러니까 으갸갸 비명 지르며 핏물의 바다 가운데로 슬라이딩, 간발의 차이로 우러드의 손톱을 피했다.
『에르메키아 란스!』
허리를 비틀면서 공격했다. 옳거니! 이번엔 정통으로 가 맞았다.
『제기랄. 맞았으면 데미지를 입어야 할 거 아냐! 어째서 멀쩡한 겨?!』
절대로 멈출 일 없다며 여전히 우러드는 날뛰고 있다. 이미 마족 수준을 상회하고 있다.

『이야압!』
가우리가 기회를 봐서 정통으로 목을 베어 들어갔다. 그러나 다시 붙고 있으니 헛수고.
『아이구우~ 이 무시기!』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 틈을 타서 천장으로 달라붙은 우러드가 가우리의 등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드러난 건 하얗게 빛나는 어금니. 내버려두면 가우리의 목이 몸통과 분리되게 생겼다. 리나는 허겁지겁 검을 들어 우러드의 뒷통수를 박살냈다.
욕지거리가 절로 나온다. 정말이지 깨졌다면 깨진 척이라도 해라. 징그럽다, 정말!
『그만 죽어! 죽으라고! 당신은 이미 오래 죽은 사람이란 말이다!』
악을 쓰며 다시 검을 휘둘렀다.
『제발 좀 죽어~!!』

인정 못한다는 건가.
생과 사의 경계선은 인간의 영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
그러니까 마물이 되는 거다.
죽었음에도 죽지 않았다고 버튕기고 있으니 갈 곳을 잃은 영혼은 괴물이 되는 법이다.

『인정 좀 하라고~!!! 이 고집쟁이야~!!!』
마력을 끌어 모았다. 파란 불꽃이 넘실대며 피어올랐다.
두 팔을 벌렸다. 주문 영창이다.
『아이시클 크리스탈!』

얼음?
제르가디스는 그녀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음으로 그를 둘러싸서 뭘 어쩌겠다고?
그러든 말든 이어 다시 주문을 외우는 외침이 들려왔다.
『일루젼~!!』
환영?
얼음판 세워놓고 환영을 보여준다라.
리나가 크게 외쳤다.
『똑똑히 봐! 얼굴을 봐! 당신은 이미 죽었어!』

거울처럼 투명한 얼음 위로 한 남자가 반사되고 있다. 피투성이인데다 눈빛은 요사스럽다. 남자는 깜짝 놀라 무척이나 낯설은 자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다 천천히 입이 벌어졌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회색으로 변하는 머리.
목에 주름이 잡혀간다.
뺨이 꺼져가고...
앗 소리를 내어 팔을 만지니 근육이 잡히질 않고 있다.
경악에 가득차 비명을 질러댄다.
이가 빠지고 입가가 쪼글거린다.
등이 굽고 있다. 탄력을 잃은 피부 아래로 말라빠진 해골이 노래를 한다.

늙음.
필연적으로 당신은 죽을 것이다.
시간에 패배한 자여.
운명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우와아아아아아~!!》

당신은 죽었다.
생각나지 않느냐.
생각나지 않는다면 오늘에 이르러 그 기억을 억지로 되살려 주겠다.
똑바로 봐라.
화장을 지운 당신의 맨 얼굴을.
얼마나 추악스러운가.
썩어 벌레먹은 당신의 얼굴.

리나는 가우리의 손목을 얼른 붙잡았다.
『제대로 걸렸어! 저 남자의 정신은 곧 파괴된다. 그 전에 우린 서둘러 여기서 나가야 해. 잊지 마, 우린 아직 이.쪽.에 있어. 저 사나이의 정신 붕괴에 휩쓸리기 전에 저.쪽.으로 물러나야 해. 그러니까 모두 문으로 가!』

죽어라 뛰고 또 뛰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벽을 치고 문을 두둘겨대는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우리는 귀를 틀어막았다. 두려웠다. 그것은 희생자들에 의한 타악기 대 합주였다.

나간다. 해방이다. 탈출한다. 이 지긋지긋한 집과 안녕이다.

찌익찌익 소리를 내며 벽면에 피로 글자가 적혀졌다.

우러드가 죽었다. 그가 죽었다.

『우러드가 죽었대, 리나!』
『관심 끊어!』
돌아보지 말라며 리나가 등을 떠다밀었다.
『이 집에서 빨리 나가야 해!』
창문틀에 발을 디뎠다.
여기가 100층 높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저 빛나는 총천연색의 세상을 향하여... 리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잿빛에서 붉은빛으로 돌아오는 걸 보았다.
『가자!』
세 명은 크게 숨을 들이마신 뒤 건물 밖을 향해 힘차게 점프했다.



현관문이 자동으로 벌컥 열리면서 열 다섯 대의 쌍두마차가 일시에 질주하는 듯한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가나이는 훗날 그 날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놀라서 쳐다봤으나 움직이는 건 전혀 없었다. 그저 소리만 들렸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일시에 달리기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그 남자가 드디어 죽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말한 그 남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가나이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일의 최종 마무리 차 건물 내부로 들어간 리버트는 가볍게 콧방귀를 뀌는 것으로 그 감상을 대신했다. 겉가죽은 멀쩡한데 저택의 중앙 부분이 폭삭 주저앉았으니 말은 다 했다. 리버트는 부드럽게 웃으며 리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원 없이 날뛰었군요.」
「안 날뛰었수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발목이 부러진 빨간 머리카락의 마도사는 발끈했다.

올렌더러스 공작가의 대변인 루톤은 수고비 지출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선반을 열어보니 해골이!」
「금화 150개를 추가해 드리리다.」
「옆방을 열어보니 다시 또 해골이!」
「좋소. 거기에 150을 더 얹도록 하죠.」
「다락방을 뒤졌더니 거기에 또~!!」
「으악! 더는 못 줘요! 집까지 부셔놓고 의뢰비에 입막음료까지 다 받아가는 거요?!」
「네.」
리나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뢰비는 금화 150. 입막음료는 그 두배인 금화 300개로 결정되었다. 물론 부가세는 별도이다.

나중에 호러매니아 리즈는 우러드 공의 무덤까지 찾아가 그의 사망을 직접 확인했다.
사인은 심장마비.
나이 47세였다.
시신은 화장되어 묘지에 안치되었다고 비석에 적혀 있었다.

제르가디스는 남몰래 관공서에서 당시 기록을 뒤져봤다. 
우러드 공이 살아있었을 당시 행방불명자로 등록된 자의 수는 모두 일백 여섯 명.
집을 등지고 도주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의 숫자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이 정말로 도주한 것인지, 아니면 모종의 음모에 의해 희생당한건지에 대한 판단은 지금에 와선 불가능하다. 아무튼 그것은 무척이나 오래 전 이야기였다.

안쪽은 상하고 외관만 멀쩡한 저택은 1년 뒤 완전히 철거되었다.
인부들 사이로「여기서 땅을 파면 뭔지 모를 뼈들이 나와」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직접 뼈를 봤다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아울러 철거작업에 임한 인부들 중 상당수가 두둑한 돈 보따리를 들고 귀경길에 올랐다는 건 확인되지 않은 정보이다.

저택에서의 마지막 행방불명자인 새라 림본에 대한 이야기가 환타지 소설로 출판된 것은 그로부터 12년 뒤의 일이다.
저자는 리즈 타이라.
제목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 번역하면 게헨나, 즉 지옥이다.


*** 엉성한 결말이었습니까? 게헨나의 미궁은 이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중장편은 역시 안돼~ 라면서 얼마나 울부짖었던지.
아차 싶었던 건 원작인 [피투성이의 미궁]은 인간의 영역을 훨씬 벗어난 사건이라는 느낌이 강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마도사들이 주인공으로 나와서야... 곡괭이를 들고 미친 듯이 벽을 후려까는 스님의 이미지라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이었던 거죠. 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퇴치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젖는 존 신부님의 절망도 여기선 패스... 최강의 악령 카네유키를 결국 저택과 함께 불태운다는 결론도 하여 패스.
하여 이참에 깨닫는 건 "리나상, 당신은 너무 강해욧" 라는 거예요. (웃음)
자아~ 어쨌거나 여기까지 즐겁게 읽어주셨다면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고스트 헌트 팬들 여러분께는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