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블 소스, 오노 후유미 원작의 [고스트 헌트]. 1편 상단부의 참조글 필독 요망.


진흙덩이처럼 가라앉은 모양새가 흡사 초상집 분위기였다.
그러나 여느 초상집 분위기와는 또 다른지라 누구라 할 것 없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 공포에 질린 표정만 보자면 누군가 소리 내어 말하면 이 자리에서 당장 죽이겠다 협박이라도 한 모양이라 착각할 지경이다. 여자들은 뼈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손깍지를 끼고 있다. 남자들은 호두까기 인형의 차렷 자세에서 굳어 있다. 심지어 자존심으로 전신갑주를 두른 루톤 베이린도 어깨를 가늘게 떨어댔다.
의외라면 의외였다. 저 굳건한 공작가의 대변인의 콧털이 파르르 떨리는 일도 있을 거라고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을꼬.
이 와중에서 그나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건 호러 매니아 리즈가 유일해 보였다. 비록 그녀의 입술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새하얀 빛깔이었어도 말이다.

상황이 적잖케 심각하다는 걸 깨달은 리나는 리즈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가늘고도 선이 뚜렷한 그녀의 손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차가웠다.

『어떻게 된 일이죠. 리즈.』
리즈는 아- 하는 입모양을 하다가 그 모습 그대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본인도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4평방미터의 물탱크를 30분 안에 네 개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로 가득 채우려면 하나의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의 량이라는 것은... 그게 아니지. 세계 전체 해양의 평균 염분은 34.72‰ 이며 가장 소금기가 많이 들어 있는 바다는 대서양으로 약 34.90‰이고 가장 적게 들어 있는 바다는 태평양으로 34.62‰... 그만두자. 리즈는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에는 호흡이다. 뱃속으로 공기를 담는다. 그리고 숨을 토하면서 혀를 움직인다.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손을 감싸쥔 리나의 따스한 온기에 반응하며 천천히 시선을 맞췄다.

『새라가 없어졌어요. 그러니까 새라는 나랑 같이 식사 준비를 하는 여자예요.』
『언제 없어졌죠.』
『나는 잘... 그것이... 어휴. 모르겠어요.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고 했거든요. 자꾸만 기분 나쁜 냄새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고... 꾀병은 아닌 것 같았어요. 안색이 나빴으니까. 거기다 두어번 헛구역질을 하더군요. 때문에 전 그녀더러 야채를 더 이상 다듬지 말고 주방에서 빨리 나가는게 좋겠다고 했어요. 왜 있잖아요... 입덧하는게 아니라면 그건 재앙이나 다름 없죠.』
『예. 압니다.』
감기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식중독일 수도 있고. 리즈는 병원균에 의한 음식물 오염을 염려한 것이다.
리즈는 죄 지은 어린애처럼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말을 듣고 새라는 발끈했어요. 자기가 설사병 환자처럼 보이느냐면서 화를 냈죠. 그리고 왜 다들 돼지 피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그걸 모르는 거냐면서 언성을 높였어요. 그리고 반복해서 말했죠. 다들 코가 어떻게 된 거냐. 아님 내가 비정상인 거냐, 그리곤 엎드려서 또 구역질 했어요.』
『그녀는 스트레스에 민감한 타입인가요.』
『아뇨. 새라는 그렇게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바윗덩어리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죠. 약혼자가 이웃의 애밀리아와 바람을 피운게 들통 났을 적에도 목 놓아 우는 법이 없었어요. 묵묵히 부엌에 들어가 약혼자를 두둘겨 팰 소금통과 밀방망이를 찾으면 찾았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나머지 먹은 음식을 토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고요.』
『새라가 언급한 냄새... 그 피 썩는다는 악취에 대해 뭐 짐작가는 건 없습니까.』
『일단 저와 다른 두 사람이 주방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혹시 상한 생선이 구석에 처박힌 건 아닐까 싶어서요. 하지만 수상한 물건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일손은 심하게 부족한 상태였다. 그 점은 새라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항복을 선언하고 나가 떨어진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권투 글로브로 죽어라 얻어맞는 격이었다.
새라는 크게 심호흡한 뒤에 제발 그만 두자며 손사레를 쳤다고 한다.
『자기 코가 비뚫어진게 분명하다고 했어요. 내가 미친 거야, 미쳤어, 이러면서 혼잣말을 했고요. 괜찮냐고 물어봤죠.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어요. 아무래도 신경과민인 것 같으니 30분 정도 쉬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겠느냐 하더군요. 그리고는 앞치마를 벗었어요. 잠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이쯤해서 리버트가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산책도 좋지만 혼자 멋대로 돌아다니는 건 좋지 않다고 제가 충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앞치마를 벗어들고 밖으로 나온 새라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아무래도 리버트인 모양이었다.
제르가디스는 일이 어떻게 된 거냐며 눈을 부라렸다.
당사자인 리버트 입장에선 대단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르가디스의 그 책망하는 눈빛이라는 건「네가 잡아먹었어?」라는 거였으니까.

『안 잡아 먹었어요!』
흥분한 나머지 리버트의 키가 1cm 커졌다.
『난 그저 외진 곳으로는 가지 말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전 그녀가 구토에다 토하기까지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걱정되죠! 만약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본인이야 여러 번 반복해서 자긴 괜찮으니 걱정할 거 없다고 했어도 모두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 입장에선 만사에 신중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처음엔 산책하는데 같이 동행하겠다고 했습니다. 잠자코 따라가기만 할테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죠. 그랬더니 그쪽에서 상당히 싫어하더군요. 사람은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라나 뭐라나. 화장실 갈 적에도 따라올 거냐면서 무어라 잔소리 하더군요. 하는 수 없었습니다. 젊은 아가씨가 진절머리를 치며 아저씨는 싫다는데 어쩝니까. 더 이상 강요할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제 눈에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라고 했죠. 바로 저기요! 저쪽에서!』

리버트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커다란 창이 난 북쪽의 복도 한 구석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잡초가 우거진 뒤뜰이 보였고 몸을 길게 내밀면 나뭇가지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바깥 공기를 마시면서 기분을 전환하기엔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 깊은 그늘이 져서 뭔가 대단히 어두워 보인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리나는 팔짱을 끼고는 멀리서 그 장소를 바라봤다. 눈썹이 삐딱해졌다. 간략하게 그 감상을 말해볼까. 징그러운 거미와 살 깨무는 붉은 개미가 우굴거리게 생겼다.

『조,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리버트는 손톱을 튕겨가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씁- 댁의 센스가 형편없다는 점에 금화 다섯 개를 걸겠어요.』
그럴 수가. 남자는 빙하를 만난 타이타닉호가 되어 바다 깊은 장소로 침몰했다.

『결국 그녀는 햇빛을 찾아 이동했겠군.』
사람의 심리라는 건 거기서 거기다. 가우리와 제르가디스는 검집으로 손을 가져간 채 북쪽 복도를 따라 20미터 가량을 걸어갔다. 그리고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내가 새라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디를 향해 걸어갔을까. 계산을 더해가며 주변을 살폈다. 보다 더 기분이 좋아지는 곳, 가만히 있어도 안심이 되는 장소, 어린애의 햇볕에 탄 머리카락 냄새가 베어있는 곳, 엄마의 앞치마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곳...
가우리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아예 건물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나라면 그랬을 거야.』

귀도 밝다. 가우리의 혼잣말을 알아들은 가나이가 팔을 들어 커다란 X자를 그려 보였다. 가나이의 말로는 무려 2시간에 걸쳐 현관 근처에서 식수로 사용될 물통을 날랐다고 한다. 그동안 주변을 왔다 갔다 한 사람은 근육질의 남자들이 전부, 치마를 걸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댄다. 다시 말해 외부로 나간 사람은 없었다.
『혹시 또 압니까.』
일이 바빠 사람이 빠져나가는 걸 눈치 못챈 거 아니냐며 리나가 한 마디 거들었다.
말 수 적은 가나이는 턱의 각도를 삐딱하게 하고는 피식 웃기만 했다. 표정이 답을 대신했다. 올챙이가 올림픽 삼단뛰기 하는 식의 웃기는 가설은 늘어놓지도 말라는 거였다. 그 정도도 눈치 채지 못할 둔감함이라면 칼을 잡는 직업군에 발을 담지도 않았다.

『그럼 그 여자는 어디로 갔노.』
『그걸 누가 알겠어요.』
다시 리즈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이마 위로 커다란 하늘 천자가 그려져 있었다.
『산책한다고 나간지 1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질 않았어요. 당연히 우리들은 그녀의 안부가 걱정되기 시작했죠. 예감이 나빴어요. 시계를 보고 그로부터 30분을 더 기다렸죠. 그래도 그녀가 돌아오질 않자 그 즉시 리버트 씨에게 새라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렸어요.』
리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번 더 시계를 봤다.

시계가 뭐 잘못되기라도? 리나 또한 시계를 쳐다봤다. 11시 45분이었다.
리즈는 한숨 섞인 표정을 짓고는 눈을 감았다. 이어 누가 신호한 것도 아닌데 거기에 모인 모두가 일제히 손을 위로 올려 귀를 가렸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이 지경이예요.』

쾅- 쾅- 쾅-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망치질 소리? 아니다. 흉기를 들어 벽을 치고 있다. 각목이나 쇠파이프 같은 것으로... 아니면 주먹으로 문을 두들기는 소리? 모르겠다. 짐작도 가지 않고 있다. 어쨌거나 대단히 울림이 크고 위협적인 소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폭발하는 듯한 감정으로 휘감겼고 혼돈에 싸여 있다. 분노, 당혹감, 그리고 절망감. 광기에 가득차 문을 때리고 있다. 격정에 휘말려 제어가 안 되고 있다. 쾅쾅대는 간격이 한층 더 짧아졌다. 부시고 발버둥 친다. 마침내 손톱으로 긁어댄다. 맹렬하게 이빨로 갉아댄다. 더 이상의 이성은 남아 있지 않다. 미쳤다. 미쳐서 날뛰고 있다.

『돌아버릴 소리로군.』
리나는 자신의 팔뚝을 내려봤다. 작은 좁쌀 같은 소름이 촘촘히 돋아나 있었다.
『말도 안돼. 대낮에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야?』
『급하면 화장실에 가는 거다. 배고프면 아무 때나 밥 먹는 거고. 시간 관념은 무시하는게 좋아. 누가 심령 현상은 밤에만 일어나야 한다고 법으로 정해놨다든?』
입으로는 핀잔이었다. 그러나 가우리에게 가만히 눈짓을 보내는 모양은 제법 심각했다. 여차하면 검을 빼라는 뜻이다. 당연히 제르가디스의 오른손도 검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가우리가 시선을 돌려 신호했다.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들은 열 다섯 걸음 정도 앞으로 더 전진했다. 어둠을 쏘아보는 눈빛은 흉흉하게 번득였다.

그 광적인 소음의 폭풍 속에서 리나는 잠시 목소리를 높였다.
『아까부터 이 지경이라고?』
『네, 마도사님. 10분 간격으로 발작하듯 치고 있어요.』
『잠깐. 우린 이곳에 오기 전까지 아무 소리도 못들었는데.』
『그래요? 그건 좀 이상하군요.』

건물 안쪽에서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었다. 문짝을 때려 부수는 소리 같은 건 들은 적 없다. 그런데 바깥쪽에서는 대형 냉장고와 세탁기, 그랜드 피아노를 일시에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땅바닥에 패대기질 치는 굉음으로 도배가 되었다 이건가.

인상을 찌푸리며 주먹을 쥐어보았다.
탕- 타당- 탕탕탕-
현재 진행형인 소리에 맞춰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을 때리는 시늉을 해봤다.
각목을 들고- 격앙된 감정을 한껏 담아- 탕- 내려치고, 탕탕- 내려치고.
판토마임을 하듯 가상의 벽을 세차게 후려갈겼다. 체중을 실어 친다. 그리고 울부짖는다.

동작에 맞추어 입술을 움직여봤다.
머리속으로 떠오르는 대사는 격렬한 동작과는 비교되게끔 몇 마디 없었다.

열어줘.
여기서 내보내줘.
제발 나가게 해줘.

갑자기 체온이 10℃ 가량 내려갔다는 기분이 들었다.
오싹하다. 아니, 춥다. 입김이 나와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이 소리는 살려달라는 필사적인 외침과 너무나 닮아 있다.

설마. 악령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

『리나! 달나라 토끼가 절구공 휘둘러대는 시늉은 그만두고 제대로 해!』

저편에서 격앙되어 윽박지르듯 고함치는 제르가디스의 목소리에 퍼득 정신이 들었다. 확실히 달토끼가 인절미 찧는 시늉이었다. 그녀는 확 달아오른 뺨을 애써 감추면서 모두를 돌아보았다. 떡 찧는 건 나중이다. 긴급한 재난이 발생했으니 훈련해왔던 그대로 사람들을 피신시켜야 한다. 리나는 재빨리 출입구 쪽을 손가락질하며 선언했다.
『모두 밖으로 나가! 어서!』
아예 새끼 오리들을 악어 없는 안전한 물가로 내몰도록 하자. 팔을 좌우로 활짝 펼치고 입으로 구구구구 소리까지 냈다. 소리만 냈던가. 펄쩍펄쩍 뛰면서 위협하듯 허리를 낮추었다.
졸지에 새끼 오리로 전락한 루톤 베이린 및 기타 사용인들의 표정은 바싹하니 타버린 생강 과자 그 자체였지만... 분위기라는게 있다. 어디에선가 따르릉 비상벨이 울리면서「엘리베이터는 위험하오니 손님 여러분께서는 침착하게 비상 계단을 이용하여 주십시오」안내 방송이 들리고 있음에랴.

갑자기 목이 말랐다. 그리고 초조해졌다. 뒷 목덜미가 쭈삣거리며 당겨졌다. 이곳에서 빨리 나가야 한다. 호러 매니아 리즈가 양 옆에 선 사람들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그리고는 아랫입술을 단단히 깨문 채 출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탈출이다. 구둣발로 바닥을 차는 소리가 무척이나 차갑게 귀를 때렸다. 엉겹결에 다른 사람들도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걷는 동작은 곧 뛰는 동작으로 바뀌었다.

『나는 남겠소.』
한 번 더 구구구구 새 쫓는 소리를 내던 리나를 향해 리버트가 말했다.
『나도 검을 사용할 줄 아오.』
그는 당연하다면서 옆구리에 찬 장검을 보여주었다. 분명 장식용이 아니다. 투박하고 상처 투성이의 실용 검이다. 손때가 묻어 상당히 더럽지만 손질은 빈틈이 없어 뵌다. 크기로 봐선 무게가 제법 될 것 같다. 사람도 몇 베어봤을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고? 리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검으로 악령을 벨 수 있다면 손톱깍기로도 바위를 잘라낼 수 있다.

리나는 손을 들어 리버트의 두꺼운 가슴팍을 퍽 쳤다.
『아니오. 당신은 여기 남으면 안되요. 지금 당신이 할 일은 저 겁먹은 사람들을 안전한 장소까지 잘 데려다 주는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빨간 줄로 밑줄이 그어진다. 그게 정답이었다. 리버트는 눈썹을 파르르 떨며 목 위로까지 솟구친 감정을 가까스로 씹어 삼켰다. 의무. 책무. 힘 있는 자의 할 일, 자신의 할 일. 리나는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리버트는 그런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을 거대한 불꽃을 찾았다.

『...』
말주변 없는 가나이가 독촉의 의미로 리버트의 팔을 세게 잡아 당겼다.
하는 수 없었다. 리버트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우린 갑니다. 당신들도 무리하진 마시오.』
『우리들 목숨을 걱정하는 거라면 관둬요. 우린 안 죽어요. 집은 홀라당 무너질 순 있겠지만.』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라는 거요.』
리버트는 재미 없는 농담이라며 고개 너머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런데 왜 저쪽에서 막 100미터 달리기를 시도하려는 루톤 베이린은 컥- 소리를 내며 새파랗게 질리는 거지. 저 사람, 유머 감각이 제로 맞구먼.

『자! 가우리? 제르가디스. 서두르자. 우린 저택의 한 가운데 부근으로 가야만 해.』
『가운데? 가운데 어디. 이래선 너무 막막한 거 아냐, 리나.』
『막막해도 하는 수 없어. 지금으로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의 모든 일을 할 뿐이야. 도박이든 아니든 일단 가지고 있는 패는 쓰고 봐야지.』
『그 새라라는 여자... 살아 있을까?』
『아직 살아 있기를 빌 수밖에. 시간을 끌면 끌수록 그녀가 시체가 될 확률은 높아져.』

그러니까 걷지 않는다. 그들은 전속력으로 달려 앞서 의문자 X를 그려 넣었던 1층의 열 아홉 번째의 방으로 들어갔다. 창틀을 못으로 박음질 해놓고, 문밖으로 벽돌을 쌓은 바로 그 방이었다. 작은 돌조각이 밟히는 바직 소리를 들으면서 제르가디스의 귀가 쫑긋 일어섰다. 알 수 없는 정체가 벽을 두드리는 굉음은 어느 틈엔가 멈춰 있었다. 대신 상대방의 호흡 소리가 가깝게 들릴 정도로 숨막히는 적막감만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오히려 그게 더 기분 나쁘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려나. 하지만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리나가 부주의하게 다시 돌조각을 밟았다. 귀에 거슬리는 바스락 소리가 소년의 신경을 한층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그럼 문을 막은 벽돌부터 치워볼게.』
가우리가 소유한 철검을 빼어들었다. 비록 열광의 검은 아니지만 파쇄의 검 정도는 되어준다. 합- 기합을 넣고는 가로, 세로, 그리고 대각선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단단한 흙벽돌을 흡사 두부인양 잘렸다. 마무리로는 힘찬 당나귀 발길질. 꽝 소리를 내며 한무더기의 벽돌이 무너져 내렸다.
『좋아, 그럼 안으로...』
반사적으로 리나의 고개가 앞으로 당겨졌다.
제르가디스의 주먹이 그런 리나의 목덜미를 꽉 움켜잡았다.
왜요? 물음표를 그리며 리나가 쳐다봤다. 소년은 냉담한 어조로 말했다.
『서두른다고 다 좋은 건 아니거든.』
『만사에 신중한 것도 좋은 건 아니지.』
『위험한 돌다리는 두들겨보고 건너는 거다, 리나.』
『멍충아. 그런 불량 돌다리는 단번에 껑충 뛰어넘는 거야.』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질린 나머지 뭐 이딴 계집애가 다 있냐 식으로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런 제르가디스를 뒤로 하고 리나는 한 걸음에 껑충 무너진 벽돌 너머로 몸을 날렸다. 말다툼을 할 에너지가 있으면 차라리 그 힘으로 트롤에게 구구단을 가르치고 본다.

『라이팅~!!』
빛이 닿는 구석구석을 쳐다봤다. 그 크기나 규모로 봐선 일상생활 용도의 방은 아니다. 사교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댄스 홀, 내지는 휴게실이 아닐까 싶다. 바닥도 나무판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돌판이다. 천장도 다른 방보다 곱절로 높다. 샹들리에가 있으면 어울릴 것 같다. 그 말이 맞다며 제르가디스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조명등을 고정시키는 갈고리가 있었다. 그것도 세 개나 있다. 그다지 멀지 않았던 과거엔 꽤나 사치스러운 물품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피아노의 바퀴 자국으로 보이는 흠집도 있다. 미처 치우지 못했는지 구석으로는 악보로 여겨지는 누런 종이도 보였다. 정확하게는 쥐가 물어뜯고 남은 악보의 일부 잔해이긴 했지만.

『악보가 맞아. 딴딴 따다 딴딴... 강아지 왈츠로군.』

하지만 신경쓰이는 부분은 어설프게나마 읽을 수 있는 콩나물 대가리 같은 것이 아니다. 제르가디스는 눈여겨 보라며 손에 쥔 악보 조각을 리나에게 넘겨주었다. 그녀의 눈매가 악보를 보고 가늘어졌다. 종이의 위쪽으로 얼룩이 보였다. 평범한 얼룩이 아니었다. 세월에 의해 찌들고 오염되긴 했지만 그것은 누군가가 남긴 메시지였다. 절반은 지워졌어도 몇 개의 글자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산화된 구리 빛깔의 얼룩을 손가락으로 살짝 어루만졌다.

이곳○ 온 ○○은 ○두 잡아 ○히고 있다. 우○드가 ○○다고 들○다. 도○쳐

카악- 이게 뭐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크로스 퍼즐 놀이도 아니고 이게 뭐람. 짜증에 겨워 머리를 긁었다.
『사방에 구멍 투성이잖아. 이래선 뜻이 뭔지 모르겠는데.』
『성급하게 굴지 마, 리나. 충분히 읽을 수 있어.』

오래된 악보 조각은 다시 제르가디스 손으로 넘어갔다.
이럴 적에야말로 안경이 필요하다... 라고 해도 주머니에서 콧잔등으로 물건 올리기가 매우 귀찮다. 하여 잔뜩 이골이 난 표정이 되어 - 실상은 글자를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 눈을 최대한 가늘게 하고 종이야 불 붙어라 하고 쳐다봤다.
게임이라 생각하면 더 쉽다. 약간의 연상작용만 거치면 원래의 문장이 만들어진다.

생각지 않게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 첫 번째 문장.
이곳에 온 사람은 모두 잡아 먹히고 있다.

저래서는 저주의 문구를 소리내어 읽은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가우리의 안색이 보기 좋게 달라졌다. 쇼크 받은 표정만 보자면 제르가디스가 입에 담지 못할 음담패설을 읊었다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뭐?!』
『못 들었나, 가우리. 다시 한 번 더 읽어주지. 이곳에 온 사람은...』
『그, 그게 아니라! 잡아 먹히다니?!』
『말 그대로일 거야. 그러니까 두 번째 문장이 아직은 해석 불능이라 해도 세 번째 문장은 이렇게 끝나는 거다. 도.망.쳐.』

분명한 경고의 의미.
리나는 드디어 깨달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리즈가 말했지. 자기네들이 처음에 이 집에 와서 하룻밤을 보내려 했을 적에 천장과 마룻바닥이 진동하게끔 누군가 미친 듯이 두들겼다고 했어. 솔직히 난 그 얘기를 접했을 적에 뭔가 아귀가 잘 안 맞는 거 아닌가 싶었지. 알다시피 이곳엔 사람을 잡아가는 질 나쁜 악령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받고 있었어. 봐! 내가 사람을 잡아가는 악령이야. 그런데 뭣 모르는 넉살 좋은 수 명의 인간들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하고 있어. 몰래 다가가 채어가면 그만이지. 안 그래? 우당탕탕 소리를 내어 그들을 겁 먹게 하고, 궁극적으로 집 밖으로 달아나게끔 할까? 과연 내가 악령이라면 그런 멍청한 바보 짓을 할 거 같아?』
이건 상식이다. 사냥하려는 자는 그 모습을 위장하고 몰래 숨어 있어야 옳다.

제르가디스가 거덜난 악보 조각을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경고... 라는 건가.』
『맞아, 경고. 따라서 이곳에 출몰하는 유령은 두 종류라는 거야. 하나는 진짜 악령, 다른 하나는 그 반대.』
『이렇게나 낡은 종이 위에 유령이 손으로 글자를 적어 넣었을 거라곤 생각하기 어렵고...』
리나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해갔다.
『죽기 직전의 위기에 처한 희생자들이지.』

희생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은 하나 더 나왔다. 
등과 팔 부위가 찢겨진 남성용의 더러운 재킷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모양 그대로에서 건드리지 않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부터 맡았다. 모습은 형편 없었지만 악취는 나고 있지 않다. 50년 이상 묵힌 아주 오래된 물건은 아니라는 얘기다. 결정적으로「그때를 아십니까」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촌스러운 디자인이 아니었다. 가우리는 충분히 주의해가며 파란 재킷을 집어 올렸다. 앞섶에 묻은 먼지를 털어봤다. 깃이 짧고 소매가 타이트한 것이 십대들이 잘 입는 옷이다. 품도 좁아 술 살로 아랫배 늘어진 아저씨들의 옷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옷 모양은 대충 그렇다 치고... 가우리의 눈썹이 여덟 팔자로 일그러졌다.
『찢겨진 부위에 피가 묻었어.』
그렇게 말하고는 뜯긴 옷자락의 양 옆을 유심히 살펴봤다. 자연적으로 옷이 찢겨져 나갈 리는 없으니 그 원인을 분석해본다.

『어때.』
『올의 거칠게 풀린 모양을 봐선 칼자국은 아니야.』
『그렇다면 짐승 어금니나 뭐 그런 것?』
『리나~ 이곳에 사자나 표범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한심하다며 쳐다볼 거 없다, 가우리. 날카로운 어금니와 발톱이 꼭 사자나 표범에게만 달린 거라면야...』
맹수에게만 날카로운 발톱이 달리는게 아니라는 점이 바로 문제다.
요컨대 하급 요마라던가, 데몬이라던가, 감마선을 잘못 쬔 육식 공룡이라던가...

텅 소리를 내며 마력을 머금은 주먹으로 벽을 후려갈겼다. 문 답게 생긴 문은 이젠 나타나주고 있지 않다. 복도는 곳곳이 막혀있고, 창문엔 돌로 칸막이를 해두었다. 벽돌로 막은 출입구는 애교에 불과할 지경이다. 손잡이를 돌려 열어봤더니 집채만한 바위가 엉덩이를 내밀고 있기까지 했으니까. 곡괭이로 힘들여 하나하나 부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그랬다간 몇 달이 지나도록 제자리에서 꿈쩍도 못했을 거다. 리나는 이를 악물고 자기가 뚫어놓은 구멍을 노려봤다. 믿을 수가 없다. 벽의 두께가 어른 팔 길이 만큼이나 되고 있다.

『숟가락 하나 주고 탈출을 시도하라고 명령했다면 돌아버렸겠다.』
『돌기만 했을까, 엄연히 말해 그건 사망 선고였을 거다.』

분위기가 점점 더 무서워지고 있다.
제르가디스가 빛의 구슬을 둥실 띄우자 사방이 손톱 자국이었다. 희생자는 이곳에도 들어왔었던 것 같다. 그리고는 나가지 못했다. 빠진 손톱이 벽에 박혀 있다. 대충 그 갯수를 세어봤다. 뿌리 채 뽑힌 손톱만 열 두 개가 나왔다. 절반 정도 꺽인 손톱은 그보다 세 배 정도 되었고. 뿐만 아니라 희생자는 손톱이 빠진 상황에서도 벽을 계속해서 긁어댄 것 같다. 피묻은 다섯 개의 길다란 선이 초현실적 분위기로 사방에 그어져 있었다. 이렇게 죽죽 그어진 손가락 자국은 문과 창문 쪽에 집중되어져 있었다.

『밀폐된 방에 어떻게 해서 들어오게 된 거지?』
『끌려왔겠지.』
『그럼 시체는 어디로 갔어?』
『역시 끌려갔겠지.』

리나가 저길 보라며 천장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우리와 제르가디스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한 일자로 다물었다.
말라 비틀어져 결국 미라가 된 발이 천장에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있어선 안될 장소에 있어선 안될 것이 있다. 낯선 이방인과도 같은 그 발은 흡사 잘못 설치된 연통처럼 보였다. 드러난 부분은 발가락부터 시작해서 발목 한 뼘 위 부위까지. 어쩌다 뚫린 구멍 사이로 발이 쏙 빠져나왔기 보다는 토막난 신체를 무슨 기념물처럼 해서 그 주변으로 콘크리트를 부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심령술사가 아니라 마도사이기에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다.
저런 멍청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딱 하나.
공간의 뒤틀림 속에서 일부의 신체가 이중 분리된 이른바「갇힘 절단」현상이다. 다시 말해 A와 A'라는 지점을 공간 뒤틀림으로 이동하는 중, 일이 잘못되면서 발생한다. 오른손은 A지점에, 왼발은 A'지점에 남은 상황에서 별안간 이어진 공간이 원 상태로 분리되면? 리나는「그게 바로 토막 살인마 재크입니다」식으로 두 팔을 벌려보였다.
『필연적으로 신체도 분리가 되어버리지. 멀쩡하던 몸이 깨끗하게 잘려나가는 거야.』
이것에 관한 악명 높은 실험이 있다. 실험의 대상은 다행스럽게도 사람은 아니었고 양이었다. 그 결과는? 양의 머리는 50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 몸통은 무려 2,300km 떨어진 곳에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경악스러운 결과였다고나 할까. 전송 마법에 대한 실험을 언급할 적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괴담이자 전설이다. 이것으로 살아있는 인체를 마법으로 공간이동을 시키는 일은 270년도 더 넘은 옛날부터 금지 협약에 올라갔다.

『알고 있냐, 너희들? 그로부터 전송 마법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는 거.』
오늘날에 이르러 공간 이동 마법이 아주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 마도사 협회의 주요 일과 중의 하나가 타지로의 물건 배달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물체에 대한 전송 마법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것은 여전히 터부로 남아있다. 아직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개나 고양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계속하는 일부 마도사들도 있기는 한 모양이다만, 까놓고 말해 그들은 손가락질을 받는 이단아들이다.

『자! 그럼 여기서 질문. 어떤 미친 마도사의 짓이 아니라면 저것은 누가 저지른 걸까요?』

질문이랄 거 있나.
답이 뻔한데.
제르가디스가 뒷통수를 만졌다.

『마족이라는 거냐.』
『또는 그 비슷한 존재.』
리나의 표정은 뼈를 끊어 씹어먹겠다는 식의 살벌함으로 가득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