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블 소스, 오노 후유미 원작의 고스트 헌트.


기쁘다. 유령의 저택이라고 해도 음식은 제대로 나와주었다. 먼 여행 길에 지칠대로 지친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환희의 눈물을 글썽여댔다.
따뜻한 밥 한 그릇의 위력.
언제 신경이 날카로웠느냐며 일행은 다시금 온화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근육은 이완되었다. 의자 등받이로 편안하게 등을 기대어 테이블 위로 놓여지는 접시들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눈은 풀어졌다.

식사를 준비하는 인원이 많지 않은 탓인지 음식의 가지수는 조촐했다.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스프는 맛있었고, 빵은 고소했다. 오븐에 구워낸 기름진 돼지고기가 먹기 좋게 잘라져 나왔다. 냄새의 유혹에 진 가우리는 정신 없이 포크를 휘둘러댔다. 일단은 먹고 본다. 그러면 기운도 나고 기분도 좋아진다. 평소 중후한 식사 예절을 설파하던 제르가디스도 체면 불구하고 육즙 묻은 손가락을 할짝였다. 그 맞은편에서 리나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주둥이 긴 학처럼 아예 접시로 코를 박았다.

『후아, 이제야 살 것 같군. 맛있었다~!』
인사치레가 아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사였다.
물컵을 들고 나오던 앞치마 차림새의 젊은 여자가 답례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역시 밥을 맛있게 먹어주면 상을 차린 사람도 기분이 즐거워진다.
리나는 내프킨으로 입가를 닦아내고 접시로부터 고개를 들었다. 인사를 하자.

『성함이?』
전통적인 하녀 복장에 앞치마를 걸친 젊은 여성이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리즈라고 합니다. 요 아랫 마을에 살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임시로 식사를 책임지게 되었어요. 주방 담당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알겠다. 그러니까 일종의 아르바이트라는 거군요. 그렇다는 건 당신도 이 집에 머무르는 건가요?』
그 질문에 여자는 고개를 짧게 가로저었다.
『아뇨. 저녁 서빙이 끝나면 일행 모두와 같이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엑.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 전부? 매일 마차를 타고 출퇴근?』

싫다...
그게 솔직한 생각이었다. 마을에서 저택까지 매일 마차로 출퇴근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식당 일처럼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잔업이 늘어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대다수가「숙식제공」을 기본으로 요구하는 법이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감자를 깎아본 사람만이 안다. 가까운 곳으로 침대를 대령해 놓을 것. 그렇지 않으면 몸이 견디질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즈와 같은 단기 아르바이트생들은 저택에서 머무는 편을 포기했다. 편의보다도 안전이라는 스토리.
우와. 그렇다는 건 정말로 위험하다는 거잖아, 이 집.

여기서 리즈는 편한 미소가 어울리지 않게끔 쐐기 박는 이야기를 꺼냈다.
『부모님들이 이 일을 하지 말라고 울면서 반대를 많이 하셨지만 말예요, 시급이 다른 곳의 무려 4배나 되거든요. 동생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 가뜩이나 집안 사정이 어려웠는데 나로서는 행운이었어요. 게다가 열 배를 줘도 싫다는 사람도 많아 이 일을 하겠다고 지원했을 적엔 고용 담당이었던 리버트씨로부터 정말 고맙다는 정중한 인사까지 받았지 뭐예요? 호호호.』
그, 그런 이야길 웃으면서 하면...;;
『그리고 생각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처음에는 이 집 한켠으로 머물 숙소를 마련했었는데 말이죠. 하룻밤 지나기가 무섭게 더 이상 못버티겠다고 세 명이나 도망을 쳤거든요? 그래서 지금은 다들 마차를 타고 아침에 여기 왔다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요. 마차로 동네 앞까지 데려다 주니까 마음이 아주 편하죠.』
댁은 편해도 우린 거북하다고.
『아유, 우리가 처음 이 집에 머물었을 적에 들리던 그 쿵쾅 소리를 여러분들도 들어봤어야 하는 건데. 대단했어요. 북을 치고, 벽을 두드리고, 가구를 끌고... 엄청났죠.』
그렇게 신나서 할 얘기는 아니지 않나.

리나는 쓴 눈물을 코 너머로 삼켰다.
이른바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다. 악령, 또는 장난꾸러기 요정들이 물건을 이리저리 움직여대는 현상을 가리킨다. 대개는 책상이 덜컹덜컹 움직이거나 촛대가 쓰러진다. 더러 심각해지면 식탁이 거꾸로 뒤집힌다. 한마디로 사람 간덩이가 몸 밖으로 떨어져 나와 바닥을 굴러다니게 된다는 거다.

젠장. 리즈 같은 임시 사용인은 마차로 집에 보내주면서 우리는 이런 집에서 먹고 자라는 거야?!
다이나믹한 동작으로 빵을 뜯었다.
아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놈의 빵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정말로 유명한가봐요, 이 집. 귀신 붙은 저택으로?』
『물론 유명하고 말고요!』
리즈는 여전히 나긋나긋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혹시 이 여자, 호러 매니아?
『저야 아직 나이가 어린 편이라서 잘 모르는 편이지만 말예요. 할아버지나 그 윗분들에겐 엄청 유명한 이야기라고요. 당대엔 올렌더러스 가문의 우러드 공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했었대요.』
『우러드 공?』
『선대 공작가의 당주님이오.』
『아, 이 집을 지은 사람!』
『그리고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
『그런데 뭐가 유명하다는 건가요?』
『병적일 정도로 무지~ 깐깐한 사람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별명이 xx 정수기!』

얼마나 깐깐했느냐 하면... 리즈는 눈을 크게 뜨고서 허리에 손을 얹었다.
올렌더러스 가문에서 정원지기로 일하던 남자가 동료의 지갑을 훔쳤다.
당연히 그 남자는 해고.
그 남자의 형이 마굿간에서 일하고 있었다.
형도 해고.
그 남자의 아버지가 올렌더러스 가문이 경영하는 유리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해고.
남자의 여동생이 올렌더러스 가문 소유의 땅에서 살고 있었다.
살던 집에서 당장 내쫓김.
남자의 사촌이 올렌더러스 가문 소유의 토지를 빌어 농사를 짓고 있었다.
계약 파기. 보리 한톨 수확해보지 못한 채 땅에서 내쫓김.

『또 있어요. 그 남자의 할머니가 올렌더러스 가문 소유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었는데 당장 파버리라고 해서 다른 마을로 어쩔 수 없이 이장을 시켰다고 했어요. 굉장하죠?』

굉장하다는 수준이 아니다. 이래서는 너무한 거 아닌가. 완전 초토화라니.

『죽은 사람까지 파버리라고 했다는 건가. 질려서 말이 안나올 지경이군.』
『그렇죠? 하루 아침에 집안이 완전히 망해서 고향을 등지고 도망쳐야 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유령이 나오는 것이다. 원한에 사무친 원혼이... 리즈는 스산하게 웃었다.
우왓! 역시 호러 매니아!

『소문에 의하면 지갑을 훔쳤던 남자는 1년 뒤에 자살했대요.』
『나라도 목을 매달았겠다. 가족이 그렇게 되었는데 손목이라도 자르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마도 유령 소동이 벌어지기 시작한 건 남자의 자살 그 이후부터가 아닐까 하고 리즈는 추측했다.
『그 남자의 유령이 나오는 거라고요. 틀림 없다니까요.』
『혹시 직접 봤어요? 그것도 아니라면 무슨... 귀신 흐느끼는 소리라도 들었거나.』
『아뇨. 그저 요란하게 쿵쾅거리기만 하더군요. 덩치 큰 남자가 발작적으로 문을 두드린다는 느낌? 그것도 아니라면 책장이 뒤로 넘어가는 듯한 소음이었어요.』
리즈는 그게 무척 실망스러웠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다.
장담한다. 이 여자라면 피투성이의 몰골로 남자가 나타나「원망할테다~」하고 말해도 꺅 소리를 내며 좋아할 거다.

『리즈! 손님들께 접시 나르다 말고 뭐 하냐~!』
『이크!』
수다가 길어졌다며 그녀가 목을 움츠렸다. 리즈는「네에~ 금방 갑니다~」하고 소리 치고는 빈 접시들을 들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덩그마니 남겨진 리나 일행은 단단히 굳은 표정으로 감자 수프를 휘저었다.

『크아앗! 재수 없어. 무지 재수 없어! 겨우 지갑 하나 때문에 자살한 원혼이라닛!』
식사를 다 마치고 난 다음의 우아한 산책 시간.
아니, 우아하다는 표현은 이미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입이 걸걸하신 우리의 숙녀께옵서 욕설을 한 바가지나 퍼붓고 있었으니까.
너그럽게 이해는 해줘야 할 것이다. 그녀는 괄태충 다음으로 귀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바퀴벌레다.』
『꺄아악! 밟아! 가우릿, 밟아!』
정정한다. 괄태충 다음으로 싫은 것이 바퀴벌레.
그 다음이 성불하지 못한 귀신.
물론 단정하게 수염을 깎지 않은 남자라던가, 물건 값을 하나도 안 깎아주는 장사치라던가, 불량 단무지를 멀쩡한 거라며 속여서 파는 인간이라던가, 예고도 없이 대중교통 요금을 왕창 올려버리는 무뇌아적 공무원이라던가, 베이스를 터치하지 않았음에도 세이프라고 박박 우겨대는 야구 심판이라던가, 싫은 걸 말하자면 끝도 한도 없지만서도...
이쯤해서 제르가디스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잊으면 안된다. 명심하자. 지금 당장 그들이 할 일이라는 건 성불하지 못한 귀신을 찾는게 아니라 이곳에서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는 거다. 의뢰 내용을 왜곡하지 말자.

여기서 리나의 표정이 나빠졌다.
『으이그. 기껏 생각 안하고 있었구는데... 그건 더 끔찍하지, 제르가디스.』
『어째서?』
『행방불명된 사람이 나온 것이 약 한달 전. 따라서 지금까지 이놈의 집구석에서 길을 잃어버린 인간이 무사히 생존해있을 확률은 완벽한 제로. 그 결과로 우리가 건져내 올릴 행방불명자의 상태는 완벽한 곤죽 젤리, 더러는 가죽만 남은 새까만 xxx... 덤으로는 구더기, 양념으로는 특유의 들쩍지근하고도 코를 비틀어 쥐는 듯한 시체 썩는 악취. 슬슬 이해가 가시나요?』
『윽.』
항복을 선언했다.
『실수라는 걸 인정하마. 미처 생각 못했다.』
시체가 썩는 냄새라는 건 말 그대로 장렬하다. 달콤한 과일과 돼지고기가 한꺼번에 잡식성 박테리아에게 씹혀 먹히고 있는 듯한... 구역질 수준으로는 절대 안 끝난다. 사람이 녹아서 만들어진 새까만 물이 내는 악취는 상상 초월이다. 근처로 지나가기만 해도 머리카락으로 그 냄새가 스며들어 영 가시질 않는다. 비누칠을 수백번 하고 향수를 뿌려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미「악취」라고 말하는 수준을 넘어서 있다. 질식사의 압박이다.
리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르가디스에게 눈총을 던졌다.
『썩어가는 시체나 유령이나 다 질색인 건 똑같지만... 그래도 냄새나는 건 그렇잖아. 차라리 원혼을 잡는게 깔끔하지. 위생적이기도 하고.』

원혼에 무슨 위생? 세균 박멸제라도 발려진 귀신이라도 되나.
어쨌든 제르가디스는 가볍게 주먹을 쥐고 뺨을 문질러댔다.
『그래서 지갑 훔치다가 패가망신한 남자의 원혼을 찾아보자고?』
또각또각 걷던 리나는 성질 부리는 고양이의 칵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사실 아무래도 좋겠지. 뭘 찾든 우리들로서는 마찬가지... 둘 다 지랄 염병이야.』

아니, 아니. 미안하지만 욕을 퍼붓는다고 끝날 이야기가 아닌데.
가우리가 다 된 밥에 초를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틀려. 설명하긴 쉽지 않지만 앞 뒤가 맞지 않고 있다고.』
리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 보았다. 가우리가 답지 않게 인상을 쓰고 있었다.
『에?』
『안 맞는다니까.』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니 입이 안 떨어지고.
답답한 모양이다. 헐크처럼 가슴을 쳤다.
『하여간 맞지 않아.』

안 맞아? 뭐가?
리나는 가만히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생각을 정리할 적의 버릇이다.
『가만 있어 봐. 이 집을 지은 사람은 올렌더러스 공작가의 선대 당주라고 했겠다?』
『패가망신한 지갑 도둑은 선대 당주 때문에 일생을 망쳤고.』
『이 집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은 선대 당주의 사망 이후.』
『유령 소동 역시...』
『선대 당주 사망 이후.』
이래서는 미묘하게 시기가 안 맞는다. 제르가디스가 골치가 아프다며 이마를 짚었다.
『따라서 그 지갑 도둑이 이 집에 들러붙은 유령이라는 건 이치가 맞지 않음. 왜냐하면 저주의 대상인 당주가 이미 죽어서 땅에 묻혔으니까... 화살을 쏘고 싶은데 과녁이 없는 격임. 흐음, 넌 어떻게 생각하지? 리나. 원망의 대상이 죽어 없어졌는데도 계속 출몰하는 원혼이라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나?』
『글쎄, 제르가디스. 머리가 복잡한 걸. 혹시 그 지갑 도둑씨가 엄청난 바보라서 선대 당주가 죽은 것도 모르고 있는 거 아냐?』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군.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대상은 이미 이곳에 없는데 저 혼자 온 방안을 뒤지고 있다? 그거... 어쩐지 불쌍하잖아.』

불쌍하고 자시고 간에.
리나 일행은 고양이를 본 거북이처럼 목을 움추렸다.
민..폐..다..

『뭐, 가볍게 생각하자고. 지금 같은 경우엔 어떤 거라도 가정이 가능할 것 같으니까.』
그것보다는 기온이 내려가고 있다는 점을 신경쓰고 싶었다. 무의식중에 팔꿈치를 어루만졌다. 요즘 같은 때엔 한낮의 온도는 평균 29℃를 훨씬 상회한다. 구름이 짙게 끼고 당장 비가 내리게 생겼다고 해도「춥다」고 느끼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기운이 천장까지 닿고 있다. 근처로 바람 하나 불어오지 않는데 팔뚝으로 소름이 돋아 있다.
『어디서 봤는데 유령이 출몰하는 곳은 춥게 느껴진대, 리나. 마이너스 에너지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증거라나.』
『그거야말로 썰렁한 이야기군, 제르가디스. 우린 마이너스 에너지로 응집된 한 남자를 알고 있어. 그런데 그 녀석의 손바닥은 그렇게까지 차지 않거든?』
『지금 제로스 이야길 하는 건가.』
『그럼 그게 수족냉증으로 고생하는 미르가지아 아저씨 이야기인줄 알았어?』
약간의 핀잔을 주고 난 뒤, 손을 비볐다. 절대 온기 부족이다.

『창문을 열어볼까?』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밖의 기온이 실내보다는 훨씬 더 높을 것이다. 온기라는 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니까... 리나는 부르르 어깨를 떨다 말고 근처로 난 창문으로 다가갔다. 네모 반듯한 창문이었다. 위 아래로 잠구게 되어 있는 걸쇠를 만져 고리를 풀었다. 약간의 부스러기가 손가락에 묻었다. 오래되어 낡은 나무문이 끼꺽 소리를 질러댔다.

『어엇?』
그런데 창문 너머가 밖이 아니라 다른 방이다.
혹시 눈의 착각이 아닐까 싶어 눈꺼풀을 비볐다.
역시 방이다.

『뭐야, 이것은~!!』
벼락같이 고함을 질러대며 덤벼댔다.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이것이 현실인지 착각인지부터 따졌다. 뭐,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고 하면 짜증날려나. 여하간 착각이 아니다. 창문 너머로 펼쳐져 있는 것은 낡은 가구 몇 점이 전부인 먼지투성이의 밀폐된 방이었다. 벽지는 살구색. 카펫트는 구린 느낌의 진한 갈색. 걸려진 그림 액자는 없고 촛대 하나 안 달려 있다.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았는지 곰팡이의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우째 이런 일이.』
흥분한 나머지 아예 작정하고 창문을 타넘어 옆 방으로 넘어갔다.
발 뒤축이 닿자 뽀얗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콜록, 콜록!』
눈살을 찌푸리며 코부터 막았다. 냄새가 가히 살인적이었다. 리나를 따라 창문을 타넘은 사내들도 코를 쥐어 잡았다.
『시체 냄새는 아니야. 카펫트가 썩었어. 어디서 빗물이 떨어졌었나 보군.』
『우엑- 창문 열어라, 창문 열어!』
『창문을 열었는데 또 방이 나오면 어쩌지?』
『그때는 댐 브라스 주문으로 벽을 뚫어버릴 거야. 하여간 빨랑 열엇!』
누구의 명령이라고 그걸 무시하냐. 가우리가 헐레벌레 반대편쪽으로 달려가 창문을 잡았다.
그러다가.
『리나.』
『왜.』
가우리는 약 1분간 침묵했다.
『벽 뚫어야겠다.』
맙소사! 또 방이냐?!

믿어지지 않는 건축학적 대혼란.
이번에는 초록색으로 벽지를 바른 방이 나타났다. 가구는 없었다.
세 명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창문 너머로 떠오른 세 번째의 방을 질렸다는 투로 바라보았다. 두 개의 거울을 마주놓아 언제까지고 반복되어 나타나는 그림자의 허상이 연상되고 있었다. 방이다. 계속 방이다. 창문을 있는대로 열어보라지. 초록으로 우거진 나무는 영원히 나오지 않을 것이다. 창문을 열어봐야 방 이외의 것은 안 나온다.
세 명은 나란히 후아- 심호흡했다.
『이놈의 집구석은 도대체 누가, 뭣 땜시,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만든 겨?!』
창문 너머 다시 방이라는 건 악취미 이전에 시퍼렇게 싹이 돋은 불량 감자이다.
리나는 탕 소리가 나도록 창문을 닫아버렸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지은 집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그 의견엔 제르가디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래. 여기엔 뭔가 있어.』
그것도 질이 매우 좋지 않은게... 그런 것이 이곳에 있다.

리나는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 행방불명 되었다는 사람들 말이야...』
정말로 단순하게 길만 잃어버렸다고? 어쩌다보니 실수로 돌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굳어졌다.
『그게 아닐 수도 있겠어.』

오후의 햇살을 받아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땅귀신이 먹잇감을 찾아 슬슬 지상으로 내려오는 시간이었다.
해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용인들은 하던 일을 모두 멈춘 채 마지막 지하철을 타러 뛰어가는 샐러리맨처럼 발걸음을 서둘렀다. 대절한 마차를 타고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서였다. 그 민첩함은 군부대 훈련을 연상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순식간에 사람들이 마차에 뛰어 올라탔다.
『어머, 마도사님~? 마도사님~!』
활기찬 호러 매니아 리즈가 현관에 선 리나를 발견하고 얏호 손을 흔들어 주었다.
리나로서는 찰사처럼 굳은 입술을 억지로 구부려 잘 가라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심 리즈를 따라 마을로 도망가고 싶었기에 그 웃음엔 억지스러움이 하나 가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남의 속 뜻도 모르고 리즈는 마차가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내내 열렬하게 손을 흔들었다.

살아서 내일 또 봐요-

『아하하... 뭘 그리... 정말이지... 저 사람들은 속 편해 좋겠다... 아하, 아하하...』
마차 꽁무니를 뒤따라 대문 너머로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을 어렵게 씹어 삼키고 나서 리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해가 지고 있다. 땅거미가 내려오고 있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만큼 불길한 예감은 한층 더 커져갔다. 마른 먼지바람을 맞고 있음에도 식은땀이 줄줄 났다.

『저기요, 리버트씨. 혹시 다음 날 아침까지 우리만 집에 남는 건가요.』
예의 밀짚모자 사나이 리버트는 설마, 라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손님만 덩그마니 내버려두고 주인은 달아난다? 웃음거리다. 리버트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였다.
『저와 가나이, 그리고 올렌더러스 경의 대변인인 루톤씨.』
리나 일행과는 별도로 모두 세 명의 사람이 저택에서 밤을 보내게 될 거라는 소리였다. 그들의 숙소는 2층에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무런 염려 하실 것 없습니다, 라고 리버트는 친절하고도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모든 편의 완벽하게 봐드림.
한밤 중에 목이 마르다고 칭얼거리면 부엌에서 설거지 물이라도 퍼다가 가져다 주고, 바퀴벌레 나왔다고 울부짖으면 때려잡자 슬리퍼를 한짝 대령해댈 것이다. 혹시 손가락을 베었는가? 반창고 대령이오. 세수를 다 했는데 수건이 없어? 입고 있는 셔츠를 벗어 이것으로 얼굴을 닦으라 건네준다. 그러니까 말만 하시라. 양초가 닳았다면 마른 장작에 횃불을 붙여서라도 어둠을 물리칠 것이다.

『우에- 군인다운 서비스 정신. 평범함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방금 뭐라고...?』
『혼잣말이외다.』
그런가. 혼잣말이었군. 리버트는 어린 동생뻘 되는 리나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튼 불편한 점 없도록 최대한 도와줄테니까요.』
『필요하다고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는 한 뭐든지.』
리버트는 맹세의 의미로 검지와 중지를 들어 자신의 심장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말한다.
리나는 신중한 표정으로 이렇게 주문했다.
『정보를 줘요.』

리버트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에프킬러 파리약에 200년 된 은수저, 귀부인의 속눈썹, 하다못해 여성용 생리대까지 구해다 줄 수 있다. 그렇지만 정보라고 하면... 곤란하다! 그는 일찌감치 맹세를 했다. 적에게 아군의 중요한 정보를 알려 피해가 발생하게 되면 후일에라도 달게 처벌을 받을 것을 각오하겠다고.
『이 사람이 정말! 내가 적군이라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남자는 난처하다며 머슥하니 웃었다. 짧게 깍은 머리를 손으로 벅벅벅. 어쩔 줄 모르게 될 적마다 하는 버릇인지 한쪽 발을 의미도 없이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여하간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는 내용이라는 것도 별로 많지 않고요.』
『단순한 거라도 상관 없어요. 나는 지금 맨 주먹에 서러운 무일푼이니까.』
그렇고 말고. 그 흔한 지푸라기 하나조차 수중에 없는 것이다.

리나는 제일 궁금한 사항부터 물어봤다.
『올렌더러스 공작가 말입니다. 혹시 정보부나 첩보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나요? 그러니까 매우 위험하고 은밀한... 닌자 거북이들을 무찌르고저 온 집에 미로를 만들고 트랩을 설치할 정도로... 혹시 이 집을 지은 선대는 정보부 고위 관계자?』
『어째서 그런 상상을 하셨는지 궁금하군요. 선대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셔서 외출도 잘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발작을 일으키고 쓰러지는 일도 잦아서요. 그런 사람이 정보부의 일을? 어림도 없죠. 근처로 커다란 공장을 몇 가지고 계셨지만 그런 까닭에 공장 운영도 본인은 관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나이 마흔 둘에 돌아가셨고요... 임종 당시 사람이 너무 야위어서 이상했다고 합니다.』
『헤에.』
『이 집도 요양차 지어진 겁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 왜 있잖습니까.』
『예. 그런 거 있죠.』

하는 수 없다. 최초에 비밀스러운 목적으로 집을 지었다는 가설은 폐기.
적국의 경제를 공황으로 내몰고저 이웃나라의 위조금화를 지하에서 찍어내고 있었다는 있었다는 매력적인 가설도 있었는데. 쳇.

『그런데 왜 집이 이 모양 이 꼬락서니인 거죠?』
그 질문엔 리버트는 어깨만 으쓱였다.
『이미 루톤 베이린씨의 답변을 들으셨지 않았던가요.』
『현 당주인 올렌더러스 경의 - 다소 유별난 - 취미 생활이라는?』
『선대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이 크게 다친다거나,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자세한 건 만년 뜨내기인 나야 잘 모르는 거지만.』
리버트는 개구쟁이처럼 왼쪽 눈꺼풀을 살짝 찡그려 보였다. 어떻게 보면 윙크처럼도 보여서 리나는 내심 움찔했다.

『리나 씨 말고도 그런 질문들을 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왜 매년 쓰지도 않는 집을 거금을 들여 손보는 거냐고요. 언젠가 올렌더러스 경이 그랬다더군요. 이 집엔「그게」있다.「그것」이 나오지 못하도록 벽을 두껍게 쌓아야 한다.』
『그것?』
『올렌더러스 경은 미신을 지나치게 믿는 사람이다, 이렇게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의 당주는 밤에도 불을 끄지 않는다고 한다. 더워서 죽을 한여름에도 밤새도록 램프를 켜놓고 있댄다. 그건 일종의 철칙이어서 사용인들도 불을 끄면 안된다고 강요를 받았다고 한다. 집의 어느 구석에서도 불이 꺼진 곳이 있어서는 안된다- 고 근로 계약서에 아예 내용이 문구로 박혀있다는 것이다.
불을 끄고 자면 해고.
그러니 모두들 월급을 받고 싶으면 새벽까지 불을 밝힐 지어다.
선대의 유명한 온 가족 몰살 해고 이야기가 떠올라 리나는 본인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짓고 말았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네. 아버지와 아들이 국화빵이로고.』
『네?』
『아니. 지금의 것도 혼잣말이외다.』
『나빠요, 리나씨. 혼잣말 하는 건.』
『그럼 혼잣말 하지 말고 리버트씨, 댁에게 뭣 좀 물어보도록 할게요. 어떤 것 같아요? 당신이 보기엔. 이 집에 나쁜 일이 벌어질 정도로, 그러니까 원한에 사무친 원혼들이 나타날 정도로 올렌더러스 가문 사람들 - 특히 선대 당주의 성격이 그렇게 나빴나요?』
에츄. 리버트는 뒤로 물러서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그러고보니 고용인에 대해 험담하는 건 쉽지 않겠다.
『미스 인버스. 이 부분에 대해 제 판단이 중요합니까?』
『미안해요. 말씀이 버겁다면 객관적인 것만 말해주세요. 사람을 때려서 고소당한 적이 있다던가, 매년 고아원에 기부금을 내고 있었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밥을 많이 먹는 사람이었다, 소식하는 사람이었다, 내지는 피부병을 앓는 사람이었다...』
『평판이 좋고 나쁘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듣기로는 자선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근처로 자선 병동도 지었고요. 아, 물론 지금은 폐쇄되어 있습니다만.』
『자선 병동을?』
『건강이 무척 나빴다는 건 먼저 말씀드렸죠? 그래서 의학에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쪽 분야에 대한 책도 많이 읽으셨고요. 그 외에도 모험담이라던가 여행기, 내지는 오래된 역사책 종류들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특히 여행기를 아주 좋아하셨다고 합니다. 뭐, 그럴 수밖에 없겠죠. 본인은 걸어서 외출도 잘 못했으니까요. 젊어서부터 지팡이에 의지했다고 들었습니다.』
『안됐군요.』
『흠. 소장했던 책들이 무척 많았는데 선대가 돌아가시자 근처 도서관으로 보내어졌다고 들었습니다. 몇가지는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제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몇 가지를 꺼내봤습니다. 재미있더군요. 특히 오란의 동쪽 코끼리 대탐험이라던가, 모기에 물렸을 적에 전염되는 열대성 질병에 대한 논문이라던가 하는 것들이...』
『커트!』
『아이구, 옆길로 샜군요. 어, 어쨌든 조용하신 양반이라는 점은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깐깐했고요.』
『에?』
처음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리버트는 머리를 긁어대며「아아, 그거-」라고 말했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나 보다.
『벌써 들으셨어요? 그거 참 손이 빠르시군요, 리나씨.』
손이 빠르다는 건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 아닐텐데?
여하간 리버트는 또다시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 모양이 흡사 배고픈 말이 앞다리로 땅을 긁어대는 형상이라서 리나는 이 남자에게 당근이나 사탕을 주면 매우 기뻐하지 않으려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선대가 하녀들을 자주 갈아치웠다는 거 말씀이죠?』
『음?』
『바닥에 물을 흘리거나, 침대 시트에 주름이라도 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해고했다는 걸 말씀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매번 사람 얼굴이 바뀌었고...』
아니, 아니, 아니! 듣지 못했어, 그런 건!
『더러는 꽃병을 깨뜨린 하녀가 지레 겁을 집어먹고 가족에게 행방을 알리지도 않은 채 야반도주한 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그야... 지갑 도둑씨의 처참한 몰락의 역사를 떠올려 보자면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화병 하나 값을 변상한다고 일이 마무리 될까. 어쩌면 그 엄마 해고, 그 아빠 해고, 그 동생 집에서 내쫓김, 기타등등으로 일이 발전할 수도? 그러니 달아나고 본다. 나중에 멀리 떨어진 도시에서 자리를 잡으면 그때 가서 식구들에게 몰래 안부를 전한다.

엄마, 나는 무사히 잘 있어요. 지금은 식당 웨이츄리스로 일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참, 혹시 누가 저더러 올렌더러스 경의 꽃병을 깨뜨리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면 절대로 아니라고 우기셔야 해요. 그냥 애인과 눈이 맞아 달아났다고만 하세요. 네?

참으로 서글픈 인생극장이 아닐 수 없다. 꽃병 하나에 고향을 등지다니.

『아이구야. 원한을 가질 상대는 무궁무진하다는 건가.』
이것으로 머리만 더 복잡해졌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누운 리나는 한숨만 팍팍 내쉬었다.
괴상한 집 주인과 괴상한 집.
더블 펀치다.

『어이, 욕실은 비었다~』
일찌감치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가우리는 씩씩하게 음료수 통을 들고 있었다. 웃통을 벗어던진 상체엔 수건 한 장 걸쳤다. 시원하게 맥주 한잔 들이키고 남성적 페로몬을 마구 발산한다는 모 주류 회사 광고 모델을 고스란히 재현한 듯한 형상이었으나...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다. 입주위가 하얗다. 저건 우유다.

『우유가 뭐가 어때서. 이걸 많이 먹으면 키가 자란다구.』
『네가 지금 성장기 청소년이냐?!』
『너도 마실래? 또 모르잖아, 가슴도 자랄지.』
『시꺼.』

가우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제르가디스 쪽을 쳐다봤다. 침대에 엎드리고 누워 공책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던 소년은 별다른 대꾸 없이 손가락 하나만 세워보였다. 우유는 완전 식품이다. 간혹가다 체질적으로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모양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유전자의 축복을 받아 우유를 먹었다고 체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 뜨겁게 덥힌 쪽도, 차갑게 식힌 쪽도 모두 괜찮다. 자기 전에 마셔두는 한 잔의 우유는 진정 효과를 가져와 숙면에도 도움을 준다.

『뭐냐. 지금 진정 효과가 필요한 거냐? 제르가디스.』
『그다지.』
소년은 파란 빛깔의 눈을 들어 리나를 응시했다.
『그래도 난 아직 키가 자라고 있거든.』
『호오.』
『어린이 몇 살? 이라는 식의 눈빛은 저리 치워, 리나 인버스. 키가 크게 자란다는 건 어디까지나 남자의 로망이라구.』
우유 열렬 옹호파 모임이냐. 그놈의 로망이 두 번만 있었다간 소 다섯 마리는 잡겠구먼.
그러고보니 온천에 들어갔다 나오면서도 우유병을 쥐고 있던 그들이다. 꿀꺽꿀꺽 마시는 한 잔의 우유는 생활의 활력 영양소...

리나는 우웩 소리를 내고는 잠옷을 움켜쥐었다. 욕실이다. 심란할 적엔 욕실로 들어가 머리나 손질하도록 하자.
톡 소리가 나도록 욕실의 문을 걸어잠구고는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가 딱딱하고 아팠다.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팔뚝 근육을 주먹으로 토닥토닥 두둘겨 보았다. 이럴 적엔 뜨거운 물에 들어가서 30분간 물장구를 치고 놀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었다. 벽면에는 막 써붙인 듯한 메모가 하나 붙어 있었다. 내용은 너무나 간략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물 절약

시원하고도 군더더기 없는 말투. 역시 발군의 군인 정신이었다. 힘줘서 또박또박 적어 되려 우스워졌다. 아마도 말주변 없다는 가나이의 필적인 듯. 무뚝뚝한 남성미 하나는 철철 넘쳤다.
그리고 플러스 서비스. 그 여백으로 마치 낙서하듯 깨알같은 글씨로「죄송합니다, 거듭 죄송합니다」라고 적어놓은 건 리버트씨가 분명.
캬아~ 짜증난다.
『이놈의 집구석엔 멀쩡한 우물 하나 없다는 거셔? 심하다.』
털썩 소리를 내며 화장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먼지로 인해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머리카락을 마구 흔들어 구겨버렸다. 더워서 질식할 것 같다거나, 땀으로 목욕을 했다는 수준은 일단 아니었기 때문에 전신 목욕은 그럭저럭 포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여자는 필연적으로 많은 량의 물을 소비해야만 한다. 머리도 감아야지, 세수도 두 번씩 해야지, 매일 속옷을 갈아 입고 냄새나는 발을 씻어야 한다. 세안수 정도로 만족해야 하는 상황을 일주일 이상 지속된다면 궁둥내 진동하는 노숙자의 몰골이 되어버릴 것이다.
짜증이 나서 브러쉬를 쥐고 화장대를 퍽퍽 두둘겨댔다. 물! 물! 얼어죽을 물 절약!

《리나아~ 헤비메탈 연주는 나중에 해라아~》』
귀가 예민한 가우리가 저쪽에서 무어라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뭐, 잔소리라기 보다는 염려에 가까운 것이긴 하겠다만... (골동품은 비싸다 = 어쩌다 망가지면 패가망신한다) 어쨌거나 리나는 휘둘러대던 브러쉬를 땅- 소리가 나게끔 해서 화장대 위로 집어 던졌다.
헤비메탈이 아니야. 이건 난타였다구.
난타가 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답변하겠어.
[난]도질을 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 그럴 듯하지?

화를 내봐야 아무 쓸모 없음을 깨닫고 화장 테이블 위를 흝었다. 아무래도 남자가 준비를 해서 그런지 놓여진 물품은 들쭉날쭉이었다.「무엇이든 있지만 막상 필요한 건 절대로 없다」는 농담조의 문구가 떠올랐다. 일단 맑고 투명한 액체가 담겨져 있는 유리병을 노려봤다. 병의 모양으로 보자면 향수다. 그것도 꽤나 고급품.「하늘에 얼굴이 맞닿아 있다」라는 광고로 널리 알려진 문가든 로즈이다.
『그렇지만 잘 씻지도 않은 겨드랑이에 이런 향수를 뿌렸다간 재앙에 가까워진다구. 차라리 가벼운 스킨 토너를 준비해 두는게 센스 있는 거 아니겠어? 남자들이라니.』
병을 치우고 이번엔 서랍을 열어봤다. 분첩이 하나, 정체를 알 길이 없는 하얀색 파우더가 한 통, 휴대용 손거울이 하나, 그리고 여성용이 분명한 면도기가 하나...;;
이마 위로 세로빗금이 촘촘히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나더러 다리 털이라도 밀라는 것? 캭 소리를 내며 서랍을 도로 닫았다.

《살살 하라니까, 살살.》
『그것보단 너희들! 귀 닫고 좀 있어. 신경 쓰이잖냐. 창피하다고.』
《세수하는게 왜 창피한건데? 리나.》
누가 저 녀석을 말려줘.

금쪽처럼 보이는 물을 받아다가 세수부터 시작했다. 배를 타고 먼 길을 여행 중일 적마다 선보이곤 하는 이른바 고양이 세수. 손바닥에 물기를 덜어 뺨을 두드리듯이 해서 오물을 닦아낸다. 이때 비누는 사용하지 않는다. 비누를 사용하면 버려야 할 물의 량이 곱절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세수가 끝났는가? 그렇다면 깨끗한 수건을 물에 적신다. 이게 바로 요령이라는 것이다. 이 젖은 수건으로 몸의 구석구석을 닦는다. 목과 겨드랑이, 가슴, 배... 기분이 찜찜하면 수건을 한층 더 박박 문질러댄다. 수건을 서너번 빨아 이 행동을 두 번 반복한다.

우뮤산에서 내려오는 물안개에 산과 들이 에헤야디야. 
빨갛게 익은 살갗은 아녀자의 복숭아 뺨 빛.
달빛에 야광주 한 잔 곁들여 이것이 극락에서의 한 소절~

서글픈 가락의 우뮤산 온천 송을 곁들여 마무리로는 발 씻기. 가장 더러운 물로 가장 더러운 부위를 닦아낸다. 이것이 바로 세숫대야 하나로 전신을 닦는다는 고난도 기술로, 여행 경력 십수년에 터득한다는 비기 중의 비기...

철퍽.

예기치 않은 소음에 동작을 멈추고 긴장했다.
『에? 나, 바닥으로 엎지른 거 없는데요.』
놀라서 얼굴을 들었다. 분명 뭔가가 떨어졌다. 물기 많고 아울러 끈적거리는 듯한 그 어떤 것이...
리나의 표정이 구겨졌다. 욕실 바닥엔 카펫트가 깔려 있다. 그 기능이 심히 의심스러운 욕조를 빼면 물이 빠져나갈 곳도 없다. 실수로라도 세숫대야를 거꾸로 뒤엎는 날엔 밤새 카펫트 얼룩 걱정에 주판알을 튕겨야 한다. 그 생각이 미치자 허겁지겁 주위를 둘러봤다. 젖은 수건을 휘두르다가 샴푸병이라도 날려버린 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양칫물이 담겨진 유리컵이 제풀에 쓰러졌을 수도 있다.
『그건 일단 아닌 것 같은데.』
귀를 뾰족하게 만들어 세워봤다. 숨 죽이고 가만히 기다렸다.

또옥.

또 떨어졌다.
위?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그리고..........
질겁했다.

『빨간... 빠, 빨간 얼룩?!』
천장이 젖어 있었다. 그것도 조금 젖은 수준이 아니다. 염료를 담은 통을 있는대로 죄다 엎지른 듯한 형국이었다. 젖다 못해 물기가 흘러 넘치고 있었다. 검붉은 빛깔의 물기는 그곳으로부터 중력의 법칙을 준수하며 위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냄새!
반사적으로 코를 쥐었다. 토할 것 같은 악취였다. 녹이 쓴 쇠 파이프의 냄새, 거기다 썩어가는 고기의 들쩍지근한 냄새...
방울방울 맺힌 국물이 다시금 바닥으로 수직낙하 했다.

철퍽.

욕실로부터 뛰쳐나왔다. 옷을 안 입었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수건 한 장으로 국부만 달랑 가린 상황이었지만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가, 가, 가우리! 제, 제, 제르가디스!』
목놓아 불러봤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람만 없었던가. 방금 전까지 그녀가 코를 박아대고 있던 침대도, 이불도, 베개도 보이지 않았다. 제르가디스가 질질 끌고 다니던 책상도, 걸상도, 아름다운 무늬가 그려진 화병 같은 것도 그곳엔 있지 않았다. 모조리 사라졌다. 불 꺼진 방엔 인적이라는게 남아있지 않았다.
놀라서 그저 눈만 깜빡였다. 보이는 거라고는 찢어진 벽지와 시커멓게 내려앉은 먼지 뿐.
『가우리...?』
용기를 내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마룻바닥이 삐그덕 비명을 질러댔다.
『이봐, 이봐. 비명을 질러대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내쪽이란 말이야.』
몸을 감싼 수건을 꽉 쥐었다.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그 순간, 쾅- 소리가 나면서 욕실 문이 저절로 닫겼다.
그녀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숨소리가 가파졌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또옥.
떨어지고 있다. 등 뒤에서 뭔가가...
끈적거리는 액체.

철퍽.
악취를 내고 있다.
얼룩이 한층 더 커다랗게 번져간다.

철퍽.
어느덧 발바닥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피부가 끈적거린다.

줄줄줄... 스즈즛.

돌아다볼 수 없다. 이 모든 건 꿈에 불과하니까. 그냥 꿈이니까... 꿈이니까...
제발 그만둬.

좌르르르...

맙소사.
쏟아지기 시작?

『싫어, 싫어, 절대로 싫어, 그러니까 그만둬! 그만둬! 』
어깨 위로 무한정 쏟아지는 오물의 감촉에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양동이로 들이붓고 있었다. 끔찍, 경악, 기절, 죽음. 코와 입으로도 썩은 것들이 들어왔다. 퉤퉤 뱉어내려 했다. 그러나 뱉어내는 것보다 콧속으로 들어오는게 압도적으로 더 많다.
『에퉤퉤퉤! 싫어, 싫어, 싫어어어~~!!』
소리를 지르며 흐느꼈다. 피다. 이 강렬한 비릿함, 그리고 짠 맛.

싫어, 싫어, 제발! 이제부터 착한 어린이가 될테니까! 그러니까 그만둬! 그만둬! 싫어~!!

『리나, 어이! 그만 발버둥치고 일어나. 싫긴 뭐가 싫다는 거야, 얘는.』

헉-

꿈?

소스라치게 놀라 이불을 걷어찼다.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를 등지고 가우리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리나를 깨우려다가 되려 놀란 듯하다.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주먹을 쥐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침?』

귀신이 곡을 한다.
어느새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