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말 내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으실 분들이 절대적 다수일 거라 짐작이 가지만 일부러 부연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거구나 짐작을 하시고 상상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톰슨 경사는 올해로 형사 근무 9년째를 맞이했다.
그간 파트너도 수십 갈렸고, 시말서 작성도 트럭으로 해봤고, 운이 대단히 나빴을 적엔 허벅다리에 총상도 입었다. 오래된 경찰 생활에 마누라는 당연히 도망쳤고, 담당 의사는 그의 콜레스테롤 수치가 병적으로 높다며 아우성이며, 니코틴에 찌들어 앞니가 모두 누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 경사는 자신의 직업을 더할나위 없이 사랑했다.

『한밤 중에 현장으로 달려나와 신경질적으로 변한 파자마 차림새의 주민들과 죽어라 입씨름을 해야 하는데 좋긴 뭐가 좋아요.』
『좋아. 그것도 대단히 좋지. 뻘건 경광등으로 남들 잠을 모조리 깨워놓고도 어디서 불평이냐 합법적으로 윽박지를 수 있잖아.』
『지금 농담해요, 아님 몸 상태가 안 좋은 거예요, 선배.』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는 손목 시계를 흘끔 내려본 뒤, 톰슨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둘 다야, 파트너.』

그럴 줄 알았다.
착해 빠진 후배는 비싯 웃는 낯으로 손사레부터 치고 보았다.
『내가 못 살어. 잠깐만 기다려요. 가서 커피를 조달해 오겠습니다.』
『길바닥에서 공짜 커피가 샘처럼 솟아나냐. 아서라, 당장 급한 건 따로 있지.』
그리고는 영화 속 악당인양 고개를 삐딱하게 하곤 그레그를 노려봤다.
조무래기 깡패들이 가랑이를 움켜쥐고 허겁지겁 달아날 법한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소심한 그레그는 이 킹콩 같은 사내에게 얼었다.

『420(*살인)?』
이어 가뜩이나 송충이처럼 생긴 눈썹을 더 폭삭 주저앉게 해 예의 조무래기 깡패는 물론이고 악질의 마피아 중간 보스들도 충분히 겁 먹게 할 포악한 인상을 만들었다.
『지금 개그 해?』
이럴 적의 톰슨은 무섭다. 가엾게도 그레그는 마그마 분출이라는 비상 사태에 그저 쩔쩔맸다. 양말을 돌돌 말아 분화구를 살포시 막아볼까? 아서라, 뼈도 못 추린다. 지축이 흔들리는 굉암과 함께 맹렬히 운동하는 화산을 향해 그저 사람 살리라 기도나 올리자. 눈송이처럼 펄펄 날리는 검은 화산재를 뒤집어쓰며 아미타불 관세음 천축극락 만세보살 - 이른바 뜻 모를 중얼거림을 반복하는 거다.

『주택가에서 끔찍한 살인 났네, 시체네 호들갑을 떨면서 오밤중에 사람을 불러놓고는「미안합니다, 톰슨 씨. 우리가 오해했어용. 시체는 없어용」라고 하면 내가 하아~ 하고 웃을 줄 알았어? 어딜 기어 오르는 거냐, 그레그! 처음에 나에게 전화질 했을 적엔 살인 사건 같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내 앞으로 시체를 내놔. 없어? 없음 네가 대신 시체가 되어라. 자, 누워!』
『으와악! 선배!』
『안 누워?! 그냥 콱!』
『지, 진정해요!』

이쯤해서 톰슨은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코트 속으로 손을 넣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주먹은 타깃을 향해 발사될 형편이었다. 미워도 게는 가재 편이다. 여차하면 돈 떼먹고, 남의 마누라와 놀아나도 상대가 동료라면 코피 터지는 주먹질은 하지 않는게 독수리 뱃지의 전통이 아니더냐. 때문에 톰슨은 끙 소리를 내며 짙은 가래를 목구멍 안쪽으로 되삼켰다.
참자. 참고 살자. 멍청한 후배를 손봐주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

『하여간 시체는 없는 거 맞지?』
『어, 없는 거 같습니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게지. 사람 헷갈리게스리.』
『그렇게 저만 나무라지 마세요, 선배. 눈으로 직접 보시면 제 뜻이 뭔지 이해가 가실 겁니다. 안이 대단히 엉망이예요. 어쨌든 선배님 오시기 전에 제가 먼저 한 바퀴 돌아봤는데 시체 그 비슷한 건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량이 제법 되어 뵈는 혈흔을 발견했습니다.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가는 방향 쪽으로요.』

「시체 그 비슷한 것」이라는 표현이 거슬렸다. 비슷한 것? 잘려진 손가락이나 귀, 더러는 내장 찌꺼기나 튀어나온 뇌수 같은 것? 톰슨은 얼굴을 찌푸렸다.
같이 일한지 겨우 삼주 된 그의 새 파트너는 별명이「오그라든 닭 가슴」답게 직설화법을 피하고 뭐 같은 것, 뭐 비슷한 것 등등의 돌려 말하는 표현을 잘 썼다. 시체면 시체이지, 시체 비슷한 거라니. 조만간 그의 말버릇을 획기적으로 뜯어 고칠 필요가 있었다. 톰슨은 흠흠, 하고 의미불명의 소리를 낸 뒤, 곧장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혈흔이라. 거실만? 다른 곳은.』
『딱히 눈에 보이는 건 없고...』
그레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마루는 오래되고 색이 짙어요. 자세히 살펴보려면 감식반의 전문 장비가 필요합니다. 눈 두 개와 조그만 손전등만 가지고 확인하는 일은 한계가 있죠.』
『감식반은 곧 온다냐? 좋아. 남의 밥 그릇은 내비두고... 그럼 최초 신고는 누가 했지.』
메모용 수첩이 팔랑대며 넘어갔다.
『이웃 주민입니다. 이름이... 프랭클린 아들러. 나이는 54세, 201호 거주잡니다. 건강용품 세일즈를 하는 사람인데 저녁 7시경에 퇴근해서 TV를 보다 살짝 잠이 들었다고 하더군요. 시간은 잘 모르겠고, 심상치 않은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깼답니다.』

또 시작이다. 비명 소리면 비명이지, 비명 같은게 세상에 어딨나. 톰슨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의 목소리는 용의자를 취조할 때처럼 가시가 돋아 있었다.
『여자, 아님 남자.』
『선배 말인 즉슨 누가 비명을 질렀느냐는 거죠? 둘 다요.』
『둘 다?』
『남자는 집 안쪽, 그리고 여자는 바깥쪽에서 소리를 질렀대요.』
『바깥이면 바깥이고 안이면 안이지. 부부가 따로 떨어져 제각각 비명을 질렀다고?』
『저어. 제가 설명을 안 드렸던가요.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남편과 이웃 할머니입니다.』
『...』

이걸 죽여 말어.
조만간 혈압약을 정기적으로 복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목을 조르려는 손아귀가 스프링처럼 달겨들려다 가까스로 멈추었음이다. 그레그는 눈치만 살폈다.
『에, 또... 그러니까... 저어?』
『인석아! 남 헷갈리게 하면서 지금 재미 보자는 심보야 뭐야. 똑바로, 순서대로! 차근차근! 지금처럼 개구리 징검다리 밟듯 건너 뛰면 내용을 알아 들을 수가 없잖아! 이웃 할머니는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거기서 튀어나온 거야!』
『모, 아직 몰라요. 조사 중입니다.』
『범인을 봤대?』
『아직은.... 혼절해서 의식이 없어요. 10분 전에 엠뷸런스로 병원에 실려갔죠.』
『알았어. 날이 밝는데로 병원으로 가서 할머니가 깨어났는지 확인해.』
『그, 그러죠.』
수첩을 쥐락펴락 하면서 야단 맞은 그레그가 우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할머니가 기절했다. 프랭클린 아들러가 놀라서 맨발로 달려 나왔다. 젠장, 돌겠구먼. 그 다음은?!』
『그, 그러니까 거대 농짝이 뒤로 넘어가는 듯한 쿵- 하는 소리가...』

톰슨은 갗 구운 원두커피의 향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콧구멍을 크게 벌렁거려 보았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지긋이 입술에 가져갔다.
비명, 쿵~ 하는 소리, 그리고 피.
필연적으로 차갑고도 냉정한, 동시에 지옥불 같은 금속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거, 혹시 총성 아니었나.』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총성 같은 건 벽을 때리며 왕왕 울리는 경향이 있잖아요? 아들러씨는 농짝 넘어가는 큰 소리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걸 봐선 아닐 수 있어요.』
『그거야 모르는 거야, 그레그. 영화로만 총 소리를 접했으면 잘 모를 수 있어. 왜 있잖냐. 특수 효과. 알지? 애들 장난감 총 소리에 귀가 뚫려선 인공 감미료 맛에 찌든 주방장처럼 신맛, 단맛 죄다 헷갈리게 되니까「죄송하지만 경관님, 그게 총 소린지 농짝 빠개는 소린지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얘기로 가는 거지.』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워째 시큰둥한 대꾸였다.
노란색 접근 금지 테이프를 슬쩍 들어올리고 허리를 굽혀 그 아래로 통과하려던 톰슨은 구부정한 자세 그대로 잠시 멈칫했다.
『왜. 뭐가 더 있어?』
『실제로 농짝이 빠개졌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예요.』

일상적으로 강력계 형사들은 뼛조각에 토사물, 그리고 도려내어진 창자가 어지럽게 굴러다니는 현장을 일컬어 난장판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적요 범위가 대단히 넓은지라 10대 청소년 셋이 맥주 다섯 박스와 엑스타시를 집어 삼키고 널브러져 있어도 난장판이라 불렀다. 대형 허리케인이 쓸고 지나간 폐허 또한 난장판이었다. 청소를 30년간 하지 않은 내비둔 창고 또한 난장판이었다.
그치만 장담한다. 진정한「난장판」이란 야구 방망이를 쥔 튼튼한 사내 서른 명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집안 곳곳을 닥치는대로 때려부순 듯한 이 상황에서야말로 가장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휘우~ 하고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TV는 거꾸로 뒤집혔고, 식탁은 다리가 부러졌고, 천장 등이 납작하게 주저 앉았다. 서랍은 죄다 뽑혀져 안의 내용물과 함께 밖으로 튕겨 나왔고, 커튼은 난폭하게 뜯겨져 뱀의 허물인양 바닥을 뒹굴고 있다. 깨어진 컵과 거울, 그리고 엎어진 화분 등등이 치울 엄두가 나지 않도록 사방에 널렸다.

최종적으로 벽지가 좍좍 찢긴 모양새를 감상하다 말고 톰슨은 촌평했다.
『음...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야. 우리 마누라가 당장 이혼하자며 나에게 빗자루를 휘둘러댔을 적에도 집 모양이 이와 비슷했지.』
『그 농담은 재미 없어요, 선배.』
『그러냐, 그레그?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마누라는 원더우먼이 아닌지라 여기서처럼 2인용 소파를 거꾸로 들어 패대기 치진 못했거든.』

조심해서 걸었는데도 두동강난 전등 파편이 구둣발에 치었다. 어려운 일이었다. 현장을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고자 기를 써가며 톰슨은 한 걸음 안으로 더 들어가 보았다. 쌓여진 쓰레기가 많아 진격은 마음처럼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날뛰는 말잔등 위에 올라간 카우보이인양 두 팔을 벌리고 균형을 잡았다. 순간 후둑- 하고 천장에서 손톱만한 석고 보드 조각이 떨어졌다. 머리에 하나, 어깨에 둘. 목깃으로도 들어간 모양이다. 굉장히 따가웠다.

『콜록... 이놈의 먼지. 어쨌거나 농짝이 쓰러지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딱 한 번?』
그건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다. 저 너머 알파 오메가 세븐 나인 행성에서「그따위 새빨간 거짓말을 넌 그대로 믿을 거니?」라는 노랫가사가 전파로 날아들었다.
톰슨은 만신창이가 된 천장 - 킹콩이 주먹으로 한 대 후려치기라도 한 모습을 하고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정도로 물건을 부수려면 딱 한 번의 굉음으론 처리를 할 수 없을 터인데?』

논리에 어긋나지 않는, 이치에 맞는 얘기다. 그레그는 긴장했다.
『폭탄일까요.』
『무~울론 (넌 바보냐?!) 집안에서 폭탄이 터진 거라면 딱 한 번의 굉음을 쉽게 설명할 수 있지. 그치만 여길 봐. 불길에 그슬린 흔적이 전혀 없잖냐.』
거기다 널부러진 파편들의 모습이 일반 상식과는 정 반대의 양상이다.
폭탄은 폭발 지점으로부터 빠른 속도로 주변 물건을 밖으로 튕겨 보낸다. 공기는 열과 함께 팽창하고, 자질구레한 파편들은 서핑 보드를 하듯 충격파에 몸을 싣고 총알인양 날아간다.
『그런데 이것들이 튕겨나간 것으로 보여?』
『아뇨.』
『그렇다니까. 바로 그게 문제야.』
날려간게 아니다. 그 반대다. 물건들은 한 지점을 향하여 소복히 쌓여져 있다.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어 죄다 모여 집합이라도 시킨 것 같다. 아니면 자석으로 끌어 당겼다. 심지어 부엌 서랍장에 들어가 있었을 냄비 뚜껑에다 주걱까지 날아들었다. 게중에는 윗 대가리가 깨끗하게 부러져나간 수저도 보였다.
톰슨은 불길한 뉘앙스를 풍기는 머리 부러진 수저를 근심스럽게 내려다 보았다.
그 아래로는.
아이구, 주여.
그레그가 찾아냈다던 붉디 붉은 피의 웅덩이가 있었다.

『가구나 벽지, 시계와 스테레오 오디오가 만약 생명체였다면 이 핏방울의 주인을 진심으로 증오해 마지 않았던 모양이야. 일심 단결하여 한꺼번에 덤벼들어 너 죽고 나 죽자 했으니까. 얼마나 원한에 사무쳤으면 이 액자는 자기가 못으로 벽에 고정되었다는 것도 깜빡 잊고 맨발로 달려나와 적의 머리를 쳤군.』
『허나 카펫, 꽃병, 액자 등등은 생명체가 아니라서 혼자서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맞는 말이다, 그레그. 따라서 라디오 및 기타등등을 집어다 희생자를 향해 던진 무자비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소리가 되지.』
『사람(단수)이 아니고요?』
『사람들(복수)이어야만 해.』

여기서 톰슨은 등줄기로 싸한 감각이 흘러 넘치는 걸 느꼈다.
악당은 모두 몇 명이나 되었을까.
다섯? 아님 열? 열 둘?

그레그가 그럴 리 없다며 도리질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일시에 들어왔다가 나갔다면 어떻게든 눈에 띄었을 겁니다. 하지만 떼거리로 달아나는 걸 봤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늦은 시간이었잖아. 다들 문 걸어잠구고 안으로 들어가 있었겠지.』
『바로 그게 문제예요. 주민들이 죄다 안에 있었다고요. 봐요, 이 아파트는 낡았어요. 때문에 눈으로 보진 못했어도 소리는 들렸을 겁니다. 수십 명이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싫든 좋든 대단히 시끄러웠을 테고요, 좁아터진 복도를 달렸다면 그건 더 시끄러웠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껏 제가 만난 주민들 중 그 누구도 이 점에 대해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 뭐냐.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났다?』
『땅에서 솟긴 뭐가 솟아요. 제 말인 즉, 선배의 주장처럼 여러 명이 아니라는 거예요.』
톰슨은 키를 석자나 크게 하며 정색했다.
『이봐? 인간의 팔은 겨우 두 개다. 사람 하나가 동시에 텔레비전과 소파, 아울러 냄비 뚜껑까지 들어 하나, 둘, 셋 하고 던질 수 있다면 그건 천수관음이지 사람이 아니라구.』
『난들 압니까? 어쩌면 정말로 사람이 아니라 천수관음 짓인지도 모르죠. 아니면 그 보다 더 질이 안 좋은 종류의, 이를테면 악마 같은...』
『너나 악마를 믿어라.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딨고 악마가 어딨냐.』

귀신은 없다.
대신 귀신보다 더 냉혹한 살인자와 악당은 있다.

톰슨은 시간이 흘러 꾸덕꾸덕하게 변한 핏자국을 근심스럽게 내려다 보았다. 남겨진 피의 량은 코피 운운하기엔 제법 많았다. 어쩌면 칼에 찔린 걸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잊어라, 그레그. 천수관음이고 뭐고 다 쓸데 없는 얘기다. 지금 중료한 건 이게 누구의 짓이냐가 아니야.』
『네?』
『피해자다. 우리 앞으로 피가 있다. 그런데 그 피를 흘렸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어디로 사라졌는지부터 밝혀야 하는게 순서 아니겠어? 이 집의 가족들은? 여자는? 아이는? 다들 어딨지?』

쓰레기만 남고 집은 텅 비었다.
남자도, 여자도, 어린 아이도.
이 집의 식구들 모두가 수증기처럼 증발해서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레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누군가 데려간 걸까요.』
『살아 있는 채로, 아님 죽은 채로?』
깨어진 액자 속의 단란한 가족 사진을 들여다보며 톰슨이 초조한 어투로 반문했다.



♠ 뿌연 안개의 바다에서 판자 조각 하나 없이 조난을 당했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마저 세계의 끝으로 사라진 가운데 마사는 팔을 내밀어 한 줌의 어둠을 움켜쥐어 보았다. 손가락을 쥐었으나 아무런 느낌도 가질 수 없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실제감 없는 어둠은 그녀를 한층 더 착란의 세계로 몰아 넣었다. 이것이 현실이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어 어둠을 쥐었다.
누군가 말해주진 않을까. 이것은 꿈이라고. 깨고 나면 어떤 내용이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을, 그런 꿈이라고 말이다.

순간 남산처럼 부푼 배가 쥐어뜯기듯 아파왔다.
고통은 그녀가 당면한 유일한 현실이었다.
마사는 마지못해 깨어나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직면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홀겹의 블라우스만 걸친 상태이다. 양말을 신지 않은 발목 위로 서슬 퍼런 냉기가 덩굴 줄기인양 타고 올라와 피부를 콕콕 찔러댔다. 이런 건 좋지 않다. 마사는 배를 감싸안고 말라붙은 입술에 침을 축였다. 계속해서 지금처럼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우면 자신의 몸은 물론이거니와 태아의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퉁퉁 부운 다리는 그렇다치고 서둘러 몸을 녹일 필요가 있었다.

야생 짐승인양 눈을 빛내며 쓰레기 수거함 뒤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뱃속의 아이를 보호해야만 한다.
그녀는 곤경을 면할 약간의 가능성을 찾아 미친 듯이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도움을 구해야 해. 누군가를 찾아 도움을 구해야 해.』
그렇지만 누구에게? 기가 찰 노릇이다. 주변으로 사람 그림자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있다. 원래부터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는 듯, 모든 가게 문은 굳게 닫겨졌고, 지나가는 택시 같은 건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몸을 파는 매춘부와 어둠을 사랑하는 강도마저 감쪽 같이 사라졌다. 페스트가 쓸고 지나간 중세 시절의 도시처럼 거리는 깊은 고요함에 가라 앉았다.
『여기 아무도 없어요?!』
컹컹 짖는 개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대는 자신의 거친 호흡 소리 외에는 가로수가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어대는 소리마저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구르듯 해서 공중전화 부스까지 당도했다.
『경찰... 경찰...』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일단 경찰에 전화를 걸어 집에 강도가 들었다고 신고를... 아니다. 마사는 도리질했다. 경찰은 안된다. 그녀는 수화기를 도로 내려놓곤 발을 동동 굴러댔다. 마룻바닥에 쓰러져 피를 한웅큼이나 쏟던 남자를 두고 경찰에게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그녀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판국이다. 그런 마당에 뭘 설명하고, 뭘 믿어달라 애걸복걸할 수 있다는 건가.

그 남자는 남편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남편의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제기랄!』
지미는 아니다. 지미일 수 없다. 눈빛이 달랐고, 말투가 달랐다. 그런데 어쩐지 지미인 것만 같다. 그 얼굴이 생판 다르지 않았느냐 계속해서 스스로를 타일러봐도 아무래도 그 자는 남편 같았다.
『내가 미쳤지. 그럴 리가 없잖아. 아냐. 그이가 아니야.』
진땀이 솟구친다. 그 남자는 죽었을까? 악에 받쳐 욕을 바가지로 퍼붓던 걸 봐선 쉽게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슝~ 하고 날아오는 토스터기에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난 뒤부터는 끽 소리도 내지 못했다. 하필이면 마사가 갖고 있던 토스터기는 온도 조절기조차 달리지 않은 구형이었다. 대단히 무겁고, 대단히 튼튼했다. 그런 흉측한 걸로 머리를 맞았으니 마룻바닥이 온통 피투성이로 변할 법도 하다.

손바닥으로 코를 감싼 채 잠시 생각했다. 경찰은 안된다. 그럼 어디에 전화를 걸까. 이웃집 수다쟁이 트레이시에게? 아니면 911?
결정을 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주저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순간 귀를 의심하며 멍청한 눈빛으로 수화기를 쳐다봤다. 노래다. 수화기에서 낯선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직 10대인 것이 분명할 개구쟁이 소녀가 흥얼거림을 섞어 생전 처음 듣는 노래를 힘차게 불러댔다.
《인생은 아름다워, 사랑도 아름다워~♬》
눈물이 나올 만큼 단순한 가락이다.
《행복하게 자알~ 살자~♬ 정의 만세, 만세~♩》

마사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공중 전화기의 0번 버튼을 반복적으로 눌러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래는 끝났다.

《왜요. 이 노래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염불을 외는 듯한 낮은 읊조림에 본인도 모르게 악 소리를 질렀다. 단순히 혼선이 되어서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도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킥킥... 사실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노래입니다만, 당신의 뱃속에 있는 태아에겐 무척이나 그리웠을 노래라 생각되는군요. 자아, 마사?》
아무나 좋았다.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좋았다. 살아 있는, 그리고 살아 있을 사람이면 되었다. 마사는 절절한 비명을 질러대며 구더기 끓는 소리를 내는 수화기를 던져버렸다. 징그러운 것이 닿은 귓바퀴를 쥐어 뜯으며 울고, 또 울었다.

『여기 있었군. 이리와, 마사!』
이런 그녀를 서둘러 잡아당긴 건 일곱 살짜리 어린 아이였다.
『싫어.』
『억지 부리지 말고!』
『싫어! 난 너와는 가지 않을 거야! 나 혼자서 집에 갈 거야! 집에 갈 거야!』
『마사!』
『싫다니까! 날 그냥 내버려 둬!』
『힘들다는 건 알아. 그치만 여기서 지체할 수는 없어.』
그런 여자를 여자를 달래고, 윽박지르고, 야단쳐가며 공중전화 부스에서 기어코 끌어내렸다.

코가 벌개져서 흐느꼈다.
『전화가 미쳤어.』
『십중팔구 그럴테지. 전화는 포기해, 마사. 이 마당에 전화로 연결되는 건 911 센터가 아니라 저 너머의 저승일테니.』
다 알고 있다며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소리가 들렸나.』
『응. 노래였어.』
『노래?』
『애들 장난 같은...「인생은 아름다워~」라는 가사의 짧은 노래였어.』

제르는 멋지게 한 방 맞은 표정을 지었다.
인생은 아름다워? 환희의 찬가?
일만년 전에나 들었을 노래가 아니던가.
『어이구야.』
아이는 담배 가게 영감님처럼 입을 벌리고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수화기를 찡그린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쪽 세계 물건인 라디오나 TV, 전화 종류는 영적 세계와 간혹 파장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마법력이 제로에 가까운 이곳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그림들을 쳐다보며 즐거워 했지만 솔직히 이곳 세계의 TV는 완전히 영매들의 펜듈럼 챠트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제르는 텔레비전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그러진 그림자가 예기치 않은 순간에 튀어나와 저승의 신음소리를 토해 내는 걸 내색하지 않고 잠자코 쳐다보는 일은 아무리 그라고 해도 쉽지 않았다. 차라리 안 보고 외면하는게 쉬웠다.
물론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게 과연 있기는 있었는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약한 에너지였다. 개미가 더듬이를 들어 톡톡 건들인 정도랄까. 지속되는 시간도 대단히 짧아 갓난아기의 하품처럼 전반적으로 무해했다.

그런데 전화 수화기에서 이쪽 세계의 것이 아닌 노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릴 지경이 되었다는 건... 한두방울 떨어지던 물의 량이 이과수 폭포처럼 막대하게 늘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제르는 곤란하게 되었다며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만큼 타격을 입혔는데도 효과를 보지 못했군. 벌써 따라 잡혔어.』

어쩌면 따라잡힌 정도가 아닐 지도 모른다.
큰 길가 건너편에서 현란하게 빛을 내뿜고 있는 네온싸인 광고판을 올려다 본 마사는 허억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켰다.
3년간 계속해서 본 광고판이다. 원래의 그림은 네모난 모자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즐거이 웃고 있는 콧수염의 신사가 맛있는 스테이크를 선전하는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드라큐라 백작의 초상화처럼도 보이는 신사가 샐샐 웃어가며 죽은 것이 분명한 갓난아기를 거꾸로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비정상적으로 180° 돌아간 아기의 목이 이쪽을 향한다. 분홍의 네온싸인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글자를 천천히, 하나 하나 만든다.

리나.
리나 인버스.

『내 아기는 아직 죽지 않았어! 빼앗기지도 않을 거야! 내 아기란 말이야!』
마사는 발악하며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갈겼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단 말이야! 내 아기란 말이야!』
그리고 결코 납득할 수 없다며 분노했다.
『왜 죽이려는 거야, 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억양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틀려요, 마사. 죽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잘못 알고 있어요.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원래의 곳으로 그분이 되돌아가게끔 돕는 것. 잘못된 곳에 태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
『...!』

여전히 남편의 점퍼를 입고 있는 남자는 어둠 속에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녀, 리나 인버스는 이곳에 태어나면 안됩니다.』
『여...보?』
『아뇨. 나는 당신 남편의 몸을 누다보트 삼아 이 세계로 내려온 자.』
『누다보트?』
『우리들 세계 말로 희생제물, 또는 번제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오, 이런! 그, 그렇다면 지미는?!』
『당신의 첫 아들과 비슷한 운명을 걸었다고 할까요. 제 설명이 맞죠? 제르가디스 씨.』

남자는 어린 아이를 향해 오른손으로 쥐고 있던 지팡이를 위협적으로 들어 올렸다.
어딘지 눈에 익은 지팡이었다.
마사는 아주 한참만에야 그 검은 지팡이가 굿지 여사가 떨어뜨리고 간 물건임을 깨달았다.

『나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은 자. 속하지 못한 자. 속할 수 없는 자...』
남자는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며 싱긋 웃었다.
마사는 캄캄한 칠흑 속에서도 그의 앞니가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깜찍하기도 하지, 제르가디스 씨. 저는 매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토록이나 마법력이 극적으로 제한되어져 있는 세계를 골라 전생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난 기억이나 지식은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파마(破摩)진을 올바르게 발동시킬 줄은 짐작도 못했습니다. 이야,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아낌 없이 칭찬을 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오리지널 마족인 저보다 더 대단한 마물이십니다. 저는 이 세계에서 물리적인 힘을 구사하는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가 없는데, 당신은 그깟 연필로 깨작깨작 그린 그림으로 거진 저를 죽일 뻔했다 이겁니다.』
『칭찬 받은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널 죽이려고 만든 마법진이었는데 죽이질 못했으니 나도 대단친 못하지.』
『급히 서두른 탓일 수도 있죠. 뭐, 그래도 절반은 성공했다고 할까요. 덕분에 제 누다보트인 당신 아버지 몸이 덜렁 죽어버렸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닐 터인데? 제로스. 내가 공격을 시도하기 이미 전에 그 누다보트는 숨이 끊겼어. 대마왕 급의 마족이 억지로 씌인 탓에 몸이 견디질 못한 거야.』
비난을 받았음에도 남자는 손사레를 치며 가볍게 웃었다.
『에이, 대마왕 급은 무슨. 저는 여전히 말단 관리직 마족이라고요, 제르가디스 씨. 하지만 무리가 있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지미라는 이 인간, 술과 담배에 찌들어 건강과는 거리가 좀 있더군요. 자극을 좀 줬다고 뇌혈관이 모조리 터져 버리다니. 그 탓에 전 지금「시체 들치기」라는 끔찍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중이죠. 시체를 갖고 장난하는 건 피브리죠님 취미이지 제 취미는 아니라서요, 아주 미치겠습니다.』
『그게 싫으면 이 세계에서 깨끗하게 떠나 버리면 되잖아? 제로스. 그 육신을 벗고 원래의 네 세계로 돌아가는 거다.』
『예. 시키지 않아도 조만간 돌아갈 겁니다. 당신을 죽이고,「그녀」와 단 둘이서 말이죠.』

아이는 교활한 표정을 짓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네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머나. 못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왜요. 내가 모르는 뭔가를 또 숨겨 두었습니까? 제2의 마법진 같은... 그 손바닥을 펴 보아요. 뭘 감추고 있는지 보게.』
『아쉽게도 내 손은 비어 있다.』
『호오. 거 잘 되었습니다. 그럼 얌전히 뻗어 있으시지요.』

순간 남자는 10m 이상을 도움닫기하여 지팡이를 둥글게 휘둘렀다.
너무나 빠른 동작에 일곱 살 아이는 미처 피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덜 건조된 장작개비가 둘로 쪼개지는 소리가 들렸고, 작은 몸이 바닥을 굴렀다.

『작아요, 작아. 일곱 살짜리 누다보트의 몸으로는 나에게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 작고 연약한 몸으로 무얼 하겠습니까. 뜀박질도 못하는데 말예요.』
『커헉!』
『많이 아픕니까? 제르가디스 씨.』
남자는 넘어진 아이를 재빨리 한쪽 발로 밟고 웃음을 지었다.
『물론 아프시겠지. 그것도 말도 못하게 아플 터.』
아이는 기를 쓰고 일어서려 했다. 남자가 그 밟은 다리에 힘을 더 주었다.
『하지만 장담합니다. 지금의 당신이 맛보는 아픔은 내가 맛 본 고통과 비교하자면 새발의 피 같을 걸요. 당신이 만든 파마진이 발동하면서 나의 누다보트였던 이 자의 내장은 안쪽에서부터 곱게 갈렸다구. 정말이지 당신, 악질이야. 그래도 댁의 애비였던 자의 몸뚱이인데 이렇게 착실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 거야?! 덕분에 지금도 눈에서 불이 나오도록 아파 죽겠어! 가브가 내 몸뚱이를 베어버렸을 적보다 곱절은 아프단 말이다.』
『하하하. 그거 미안하게 되었...』
『닥쳐! 인간! 뭐가 우습다는 거냐!』
『나도 몰라. 그냥... 하하하.』
『좋아요. 된통 쓴 맛을 보고도 여전히 웃음이 나오는지 한 번 봅시다!』

지팡이가 다시 하늘을 향했다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마사는 얼굴이 둘로 찢기는 아들을 보고 놀라 뒤뚱거리며 달려 나갔다.
『그만 둬! 부탁이야! 내 아들에게 손대지 말아!』
『아들? 누가. 이 자가?』
눈에 익은 익숙한 점퍼를 입은 남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지 않을 터인데요, 마사 씨. 당신의 진짜 아들은 7년 전에 이 자가 행한 주술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여기에 누워 있는 것은 저와는 저승에서부터 원수였던 자이며, 당신 아들의 몸을 누다보트로 삼은 질 나쁜 마법사입니다. 악질 중의 악질이자, 죄인 중의 죄인이죠.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이 아이는 껍질만 남은, 당신의 빼앗긴 축복이라는 걸 말이죠.』

마사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움직임이 거의 없는 아이를 쳐다봤다.
알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몸뚱아리는 배 앓아 세상에 내보낸 아들이 맞았다.
『제르!』
『괜찮아... 금방... 끝나.』
『아가!』
『미안. 네겐 나쁜 짓을 했어. 정말 나쁜 짓을... 미안, 미안... 다음 번이라는 것이 있다면... 반드시 네게 사죄하겠다.』
『제르!』
빛 없는 어둠 속에서 아이의 얼굴이 번들번들 빛났다. 새까맣게 젖은 듯한 뺨으로 비릿한 냄새가 나는 액체가 쉬지 않고 흘러내렸다. 아이는 거의 숨을 쉬지 않았다. 마사는 겁이 났다. 이건 좋지 않다. 죽은 걸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남자가 쓰러진 아이에게서 천천히 발을 떼었다.
『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내 힘도 거의 한계입니다.』
그는 다시 웃었다.

『누...구? 당신은 누구?』
『그러니까 저승에서 왔다니까요.』
『저승.』
『예. 저는 저승에서부터 당신이 태에 품은 공주를 데리러 온 사자입니다.』

여자는 달을 등지고 서서 뒷걸음질을 쳤다.
인간의 언어가 아닌 소리로 슬픔을 하소연하기 전.
무어라 설명하기조차 힘든 난폭한 힘이 그녀를 붙잡아 강제로 땅에 눕혔다.

마사는 외마디 고함을 질러대며 최후로 발버둥쳤다.
눈가에 칠한 마스카라가 녹아내려 검게 변한 진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두 다리 사이로 파고 두는 억센 손아귀가 느껴졌다.

아아.
어머니.



♠ 부검실의 문을 열고 그 안의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은 여전히 혐오스럽다. 싫은 건 싫은 거다. 톰슨은 가까이 오라는 검시관 닥터 테사 로드리게스의 신호에도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어딘지 모르게 어둡고, 냉골이고, 습습한 이 장소는 톰슨에게 있어 대낮에 눈 뜨고 생생하게 겪는 원초적 공포였다.

『치질이라도 앓는 표정이군, 톰슨.』
『사실은 생리통이오, 박사.』
『그거 안됐군. 남자의 생리통엔 약도 없거든.』

말로는 그렇게 했는데 얼굴은 전혀 안됐다는 표정이 아니다. 하긴 그녀는 평소에도 희노애락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소문으로는 남동생이 백혈병으로 죽었을 적에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가 손수 감정이라는 걸 해부해서 새끼 돼지 표본과 함께 선반 어디엔가에 올려다 놓고 잊어버렸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나왔다.

『오른쪽에서부터 지미 로이든 36세, 마사 로이든 30세, 제르 로이든 7세.』
톰슨은 가까스로 정신을 집중시키고 테사의 손짓에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부를 마친 시체들은 하얀 린넨으로 전신이 덮혀 이쪽에선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다행이었다.

『셋 다 자잘한 상처가 아주 많아. 멍자국이 있고 살갗이 찢어졌지.』
『하아. 이렇게 보자니 일가족이 한꺼번에 치명적인 차 사고를 당하기라도 한 것 같군요.』
『하지만 차 사고 같은 것이 아니었지. 몸싸움이 엄청나게 치열했던 것 같아. 각자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더군. 특히 엄마의 손톱 밑은 아빠의 피부 조직으로 가득해. 아빠가 목을 조르자 그걸 방어하려다 할퀸 듯해. 이쪽 아빠의 팔뚝에 남은 상처를 보면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남편이 아내의 목을 졸라서 설골을 부러뜨렸어.』
『냉정한 남편이군. 그럼 아빠의 사인은?』
『내상이 심했어. 뇌출혈이 보이고 장기 출혈도 많아. 형태가 다양한 여러 물건들로 심각하게 구타를 당한 것 같아. 어떤 식으로 맞은 건지는 잘 모르겠어. 엄마가 물건을 던졌을까? 그렇다고 해도 설명이 되지 않아. 아들 쪽은... 얼굴이 집중적으로 상했고, 두개골 골절을 일으킨 이 머리 상처가 치명적이었어. 현장에서 찾은 노인용 지팡이가 아마 그 흉기일 거야.』
『아빠의 지문이 사방에 찍힌 그 지팡이 말씀인가요. 그야말로 괴물이군요. 다친 상황에서 아이를 때려 죽이고 이를 말리려던 부인까지 살해했으니.』
『저런.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해?』
『그럼 아니오?』

테사는 1차 검시 보고서를 톰슨에게 넘기고 어깨를 으쓱였다.
『죽은 순서가 틀려. 맨 처음이 아빠. 두 번째가 아이. 맨 마지막으로 엄마가 죽었어.』
톰슨은 인상을 썼다.
『못 믿어! 엄마가 나중이라고?』
천으로 덮혀진 그녀의 시신은 남들보다 배 둘레가 두꺼웠다. 태아를 잃었음에도 여전히 그녀의 배는 복부 비만이 의심스러울 지경으로 꽤나 커 보였다.
그 모습이 측은했던지 톰슨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엄마는 목이 졸린 뒤에... 말도 하기 싫은 폭력까지 당했는데.』

테사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그래. 태반까지 강제로 끄집어졌지. 덕분에 둘째 아들까지 죽고 말았고.』
『엥? 아들? 딸이 아니고?』
톰슨은 손가락 하나를 이마로 가져갔다.
『주변에선 그녀가 딸을 가졌다고 하던데?』
『잘못 알고 있었겠지. 임산부의 몸에서 강제로 떨어져 나와 차가운 길바닥에서 죽어간 그녀의 아기는「아들」이었어. 정 못 믿겠다면 보여줄까?』
톰슨이 경악을 하든 말든, 닥터 로드리게스는 무심하게 물건을 찾는 시늉을 하며 몸을 돌렸다.

『됐소! 그렇게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됩니다!』
『금방 가지고 올 수 있는데.』
『나에겐 그런 악취미는 없소!』
『그치만 봐야 할 걸. 당신은 경찰이니까.』
테사는 눈을 가늘게 하고 해부대 위로 몸을 기대며 손을 얹었다.
『누군가 마사의 몸에서 태아를 꺼냈다가 필요 없는 물건인양 버리고 갔다고. 그것도 분노에 차서 힘차게 내동댕이쳤지. 그건 증거물이야, 톰슨. 나는 아기의 몸에 범인이 남긴 지문이 있지는 않은지 섬세하게 확인할 거야.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찾아내고야 말 거라고. 뭐, 태반에서는 아빠의 것으로 여겨지는 지문을 하나 찾았지만... 이건 이대로 납득이 가지 않긴 하지. 엄마보다 먼저 죽은 아빠가 뭔 재주로 태반을 만졌을까나.』
『그런 건 알고 싶지 않아요.』
『그럼 뭐가 알고 싶은 거야, 톰슨.』
『당연히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했는지! 왜 그랬는지를 알고 싶지요!』

테사 로드리게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가 그랬느냐고? 왜 그랬느냐고?
슬프게도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대답할 길이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확실한 건?』
『악마의 짓이라는 거야.』
『악마? 이의 없소.』

그리 쓰게 말하며 톰슨은 괴이쩍게 몰살당한 가족을 향해 가볍게 묵념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