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치기 소년이 세 번째로 거짓말을 하고 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늑대의 출몰을 믿지 않게 되었다 - 이와 비슷하게 사람들은 마사의 다섯 번째 외마디 비명 소리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침실에 누워 최신판 스테판 킹의 공포 소설에 열중하던 15세 소녀 캐시 오브라이언이 신경질을 부리며 읽던 책을 벽에다 집어던진 일만 빼면 아파트 주민들의 반응은 대단히 얌전했다.
물론 몇 명의 사람들은 쌍스런 욕을 퍼부으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욕설은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단단한 벽을 뚫기엔 그 힘이 턱 없이 미약했고, 하수도 배관을 따라 멋대로 갈팡질팡하다 변기 내린 물과 함께 엉뚱한 곳으로 쓸려가버렸다. 그 다음에는? 쥐죽은 정적만이 뒤를 따랐다.

『예수님 - 저 가여운 임산부를 어떻게 좀 해주시구랴.』
일흔이 내일 모레인 머레인 굿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오래되어 솔기가 헤진 나이트 캡을 머리에 눌러썼다.
『이 늙은이가 고혈압으로 쓰러지기 전에 속히 해결하소서. 마사가 친정에 가도 좋고, 동생네 가도 좋사오니 저 여편네가 이 야밤에 난리치는 일이 오늘 부로 끊어지게 하옵소서. 두손 모아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무래도 하느님은 머레인 굿지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가방?』
『그렇다니까요.』
종달새처럼 소문을 물어다주는 이웃 집 여편네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마사는 여행용 큰 가방을 할부로 구입했다. 가방은 시체가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사이즈였고, 이후 그녀는 쇼핑센타에서 간단하게 벗었다 입었다 할 수 있는 쉐타 같은 옷가지를 추가로 더 구입했다. 다음으로는 사내 아이가 쓸 모자를 샀고, 어딘가를 향해 분주하게 전화를 여러 통 걸어댔다.
마사가 여행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건 누가 봐도 뻔했다.
『물론 그게 아니면, 별거 준비일 수도 있겠죠.』
미세스 종달새는 그렇게 종알거리며 설탕을 전혀 넣지 않은 커피를 홀짝이는 것으로 굿지 여사의 심기를「대단히」불편하게 만들었다.

별거? 지미와 마사가?
굿지 여사는 굳은 표정으로 커다란 돋보기 안경을 고쳐썼다.
이래서는 기도 효험이 지나치게 크다.
아이구 주여, 오버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트레이시.』
『8개월이면 이미 무거운 몸이잖아요. 장기 여행을 하기엔 좋은 시기가 아니라는 건 저나 할머니처럼 아이를 낳아본 여성들은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몇 발자국만 걸어도 허리가 휘어질 지경인데 5시간이고 6시간이고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멀미를 참아야 한다고요. 그렇담 비행기는 편하던가? 오히려 더 죽을 맛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말리지 않고 쉬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는 건?』
오예~ 하고 트레이시는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만사 포기한 거죠.「우리, 이제 그만 끝내자구」라고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아요.』

굿지는 신중해지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손깍지를 끼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그럴까. 남편이 직접 차로 데려다 줄 수도 있잖아.』
『그래서 말인데요, 굿지.』
트레이시는 매우 심술궂은 표정을 지었다.
『저번 금요일에 내가 일하는 할인 마트로 버트가 술을 한 짝 사러 왔었어요. 버트는 지미와 같은 정비소에서 근무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넌지시 물어봤죠. 요즘 재미 어때요- 하고요.』
『어떤 재미.』
『에이, 그렇게 따지지 말고요.』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은 뒤, 트레이시는 손가락으로 어항 물결 무늬를 만들면서 키득 웃었다.

망할 고양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굿지는 이런 트레이시를 좋지 않게 여겼다. 그녀는 지나치게 음흉했고, 말이 많았고, 남들의 불행을 지나치게 기뻐하는 구석이 있었다. 천성은 착한 편이었지만 소문을 밝히는 여자답게 뒷 맛이 나빴다.
굿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가늘게 떠보였다.

『아무튼 버트가 그랬다고요. 지미는 요즘 터지기 일보 직전의 압력 밥솥이라고요.』
『흐응.』
『아세요? 지미 앞에서 절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공화당, 하나가 세금, 나머지 하나가 마누라라고 하더군요. 이 중의 하나라도 입밖으로 꺼냈다간...』
『특히나 마누라 이야기를 꺼냈다간...』
『그동안 안녕했었슈, 하느님 - 이라는 거죠.』
『잘 알겠네, 트레이시.』

그래서 굿지는 아픈 관절을 끌고 마사네 집 초인종을 기꺼이 눌러대기에 이르렀다. 시계를 보니 저녁 9시. 이런 시간대라면 집을 비우진 않았을 터.
『참견질이지, 암. 참견질이야.』
죽은 남편이 그런 굿지를 봤다면「아서라, 할망구야!」하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리고「남의 사생활이야. 잠자코 내버려 둬」라며 무서운 목소리로 일침을 놓았을 거다. 딸 년이 이혼을 한다고 했을 적에도 무어라 말을 않던 양반이었다. 술만 목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싶으면 주먹이 앞서 나가던 못난 사위에게 실망한 굿지가 물 끓는 주전자처럼 흥분했어도 남편은 냉정하게「참견할 일이 아니다」라고만 했다.
굿지 여사는 도리질하며 아픈 다리를 문질렀다.
그때 영감이 딸 년을 향해 무어라 한 마디만 해줬어도.
그 나쁜 년이 약을 먹고 자살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때로는 참견질을 하지 않는게 죄라니까. 암.』
굿지 여사는 그리 믿으며 어깨에 걸친 숄의 모양새를 가다듬었다.
자, 그러면? 굳세게 믿고 초인종을 눌러보자.



♠『누구... 어머나. 굿지?』
마사는 문짝을 겨우 2cm 열고 바깥을 빼꼼 쳐다보았다.
망할 2cm였다. 그 좁은 틈으로는 저쪽의 공기를 읽어낼 수 없었다. 이쪽에서 보이는 거라고는 좀처럼 표정을 읽어낼 수 없는 마사의 두 눈동자 뿐이었다. 백내장에 걸렸을 적에 느꼈던 답답함이 다시 엄습했다. 뿌옇고 흐릿한 세계는 저주 받아 마땅하다. 굿지는 활짝 열리지 않는 문을 향해 홍해를 가르는 노아처럼 지팡이를 높게 휘둘러대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꼈다. 느끼기만 했던가. 실제로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벌어진 틈새에 끼워넣고 휘적거렸다. 지팡이를 선물한 손주 녀석이 봤다면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겠지만, 다행히 손자는 송전탑 보수 건으로 달라스에 가 있다.

『그래, 날세. 아무튼 열어.』
『무슨 일이세요, 늦은 시간에.』
『늦은 시간이라는 건 아네. 그래도 이 문 열고 나 좀 보세.』
『그게... 저어, 지금은 좀 그런데요.』
부드러운 거절에 노인네의 회색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고쟁이에 팬티 바람이라 부끄러운가? 괜찮아. 일흔 살 늙은이 앞에서 체면 차릴 일은 없지. 그게 아니라면 내가 부끄럽다는 건데, 만약 이야기가 그리 진행되는 거라면 난 대단한 충격을 받을 거야. 비록 내가 요란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었고, 머리엔 촌스러운 분홍 헤어롤을 말았는데다, 덧신도 짝짝이로 신었다 할지라도 말이지. 몸에서 냄새 나지 말라고 목욕을 매일 하는데다, 손주 생일 선물을 잊지 않고 챙길 정도로 정신은 쩡쩡하고, 가는 귀도 먹지 않았네. 그런데도 자네는 곤란에 처한 이 늙은이가 끔찍이 싫어 문을 안 열어주겠다 이건가?』
어디 그랬담 봐라. 경찰에 신고할테다.
쉬지도 않고 일장연설을 퍼부은 뒤, 이 고집스런 할머니는 마무리 동작으로 쥐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두어번 텅텅 두둘겼다.
에이, 열어라, 열어.

하는 수 없었다. 소동이 커지기 전에 임산부는 그리 내키지 않다는 투로 걸쇠를 풀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할머니.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요?』
뭐가 문제냐고? 굿지는 불필요하게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를 때 요긴히 써먹는 고전적 코멘트를 읊었다.
『요리하다 보니 설탕이 떨어졌어.』

그런데 말을 내뱉고 보니 이건 영 아니었다. 첫째, 요리를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둘째, 설탕을 빌려달라면서 그릇을 가져오지 않았다. 셋째, 당뇨가 걱정인지라 그녀가 설탕을 삼가고 있다는 건 이곳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죄다 꿰고 있었다. 왜냐하면 평소 즐기던 달콤한 사탕을 의사가 절대로 먹으면 안된다고 말렸다며 하루에도 수 차례 불평의 욕설을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설탕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건가? 굿지 여사의 얼굴이 루돌프 사슴의 콧잔등인양 벌겋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내일 새벽에 큰 비가 내려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에 떠내려갈 거라고 말하는 편이 신빙성이 높았을 터인데. 실수다.

『설탕이오?』
당연히 마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정말로 설탕?』
『...』
『그 힘들다던 당뇨는 다 나은 거예요? 굿지 할머니.』

에이, 지은 죄를 자백하고 그냥 맘 편히 살자.
쭈글쭈글한 손가락으로 피노키오의 코를 만지던 할머니는 헛기침부터 하고 보았다.
『그게... 어흠, 설탕이 아니라... 사실은 소금이...』
『소금.』
『아니, 소금이라기 보다는 뭐랄까. 후추... 아니, 밀가루...』
『굿지?』
『아냐.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살충제... 어라.』

횡설수설하는 가운데 느닷없이 머릿속으로 살충제가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벌레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피부가 따갑다. 굿지는 손바닥으로 양팔을 거칠게 쓸어내리면서 인상을 썼다. 좀? 벼룩? 빈대? 그것도 아니라면 모기? 작고도 기분 나쁜 생물들을 떠올리고 손등을 다시금 쓸었다. 뭔가가 피부를 뜯어먹고 있다. 그녀는 뻣뻣한 허리를 굽혀 다시 종아리를 쓸었다. 한 번 인식이 되자 못 참도록 따끔거리는게 더욱 심해졌다. 불쾌감은 곱절로 커졌다.

『마사. 아무래도 벌레가 있는 것 같으이. 도대체 청소를 얼마나 하지 않았...』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청소를 하지 않아서 벌레가 들끓는다고? 농담도 심하다. 대충 살펴본 방안은 방금 청소를 끝마친 듯이 깨끗하게 정돈되어져 있다. 그간 마사가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빠져 살림하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는 걸 염두에 두자면 이건 우렁 각시의 강림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들어가 있다. 소파에 놓여진 쿠션까지도 구령을 붙여가며 반듯하게 놓여졌다. 손가락으로 TV 브라운관을 만져보면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을 것 같다. 그 흔한 휴지조각 하나 안 보인다. 애들 장난감 하나라도 굴러다닐 법 하건만 거실 바닥엔 퍼즐 조각 하나 안 버려져 있다. 굿지의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천지가 개벽했다. 그게 아니라면 청소 전문 업체를 불렀다.

그런데 그 청소 전문 업체는 아무래도 허가증을 반납하고 고발 당해야 마땅하다. 이젠 목에서부터 뺨까지 따끔거렸다. 굿지는 돋보기 안경을 벗고 고양이가 세수하듯 얼굴을 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활 타는 요상한 감각은 도무지 사그러들 생각을 않고 있다.
정말로 벌레? 퍼득 겁이 났다. 아니다. 지금껏 70년을 살면서 벌에도 쏘여봤고 개미에게도 물렸다. 이건 벌레가 아니다. 아주 다른 것이다. 콩과 옥수수 만큼이나 다른 종류다.

할머니는 뜨거운 물에 손을 넣기라도 한 것처럼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마사아~!!』
『괜찮아요, 할머니. 금을 밟고 계서서 그런 거니까 걸음을 옆으로 옮기시면 되어요.』
『금?』
『이래서 집안으로 들어오시라 하고 싶지가 않았어요.』
『금이라니.』
『연필로 선을 그렸어요. 제르가 그러는데 그걸 밟으면 멀쩡한 사람도 좀 아플 거래요.』
『연필로 뭘 그려? 밟으면 아프다니.』
『우린... 그러니까... 뭐랄까. 실은 저도 자세한 건 몰라요. 하여간 그런 거예요.』

노안의 눈으로는 딱히 보이는게 없다. 거기다 거실은 짙은 색의 마루가 깔려 있다. 그런 바닥에 연필로 뭘 그렸다고? 거 참.
굿지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옆으로 게걸음을 쳤다. 그러자 쏘는 통증이 덜해졌다. 거 참 신기하다. 반신반의 해가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봤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질겁하며 한쪽 발을 들고 겅중 뛰었다. 아이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붉은 개미떼가 작정하고 물어뜯는 듯한 맹렬한 통증에 발바닥이 쓰라릴 지경이었다. 필연적으로 그녀는 체면 불구하고 인디언처럼 뛰었다.

그 모습이 엄청 흉했던 모양이다.
부엌 쪽에서 어린 아이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러댔다.

『맘대로 날뛰지 마. 모처럼 어렵게 그린 결계가 망가지잖아!』
『아?』
『마사! 뭐하고 있나. 저 사람을 어서 밖으로 내보내!』

명령조로 - 아니, 정말로 타인에게 명령하며 나타난 건 일곱 살의 어린 남자 아이였다. 무릎 부분이 늘어진 바지의 모양새로 보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다녔던 것이 분명한 아이는 오른손으로 연필을 쥐고 엉망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표독하게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이방인을 내쫓으라는 것이다.

기가 막혀서.
할머니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애 엄마를 돌아다 보았다.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아이 엄마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빨리 나가주셔야 겠어요.』

굿지는 두 번째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은 심장이 철렁 주저 앉는 소리였다.
『나, 나가라니. 기가 막혀서.』
그저 모자의 상태를 알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돕고 싶었다.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니다. 그치만 결과적으로는 싸우러 온 셈이 되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이고, 주여!』
오래 살아서 별 흉악한 꼴을 다 당한다.
『거기다 뭐? 어른에게 날뛰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 버릇이냐!』
흥분한 굿지는 문밖으로 후퇴하는 대신 아이를 향해 진격했다. 경고를 담아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어대며 - 그게 아이가 제일 싫어하는 동작이라는 건 미처 모르고 - 아이 엄마가 채 뜯어 말리기 전에 펑퍼짐한 궁둥이를 좌우로 흔들며 부엌 문지방을 넘었다. 야단을 칠 것이다. 아주 따끔하게 버릇을 고쳐 줄 것이다. 하여 다시는 건방진 소리를 하지 못 하도록...

순간.
그녀는 천둥 벼락을 맞고 그 자리에 가만 멈추어 섰다.

하늘색 리놀륨 바닥으로 온통 그림이 그려져 있다. 낙서 같은 것이 아니다. 동그라미와 세모, 네모, 그리고 뭔지 모를 이상한 글자들, 뜻을 모를 기호들, 직선과 곡선... 너무나 어려워서 알아볼 길이 없는 그림이었다.
엉겹결에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양초와 죽은 닭, 그리고 잘리워진 양의 머리만 있으면 영락 없이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가. 마왕을 불러내고, 귀신과 접신하며, 악령의 속삭임을 듣는다. 빽빽이, 빈틈 없이, 가느다란 연필의 선은 끊어지는 일 없이 계속 뻗어나가 굿지의 발 아래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선은 멈추지 않고 뻗어나가 마사가 서 있는 곳을 지나, 세상에, 천장에까지...

핑글 하고 눈앞이 회전했다. 무엇을 밟고 있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오, 주여!』
겁에 질린 시선은 다시 연필을 들고 있는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마귀다. 사탄이다. 오멘이다.

『작업 중이다. 방해하지 말고 사라져.』
아이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달아난다. 나이를 잊은 노인은 지팡이를 두고 간다는 사실도 잊고 휙 소리가 나도록 등을 돌렸다. 악마다, 악마를 부르려 하고 있다. 이 집 식구들은 미쳤다. 정상이 아니다. 귀신 들렸다. 그러니 이 사악한 곳으로부터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이마에 땀이 솟았다. 주여, 주여! 그녀는 공포에 질려 현관 문 손잡이를 좌우 방향으로 마구 돌려댔다. 열릴 지어다. 감옥의 문은 열릴 지어다. 굿지는 절망에 가득차 두 손을 번쩍 들었다가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질러가며 다시 문고리를 세게 잡아 당겼다.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사람 살리라는 외침이 목에 걸렸다.

『워~ 워, 굿지 할머니. 남의 집에서 왜 이러십니까.』
바로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웬 젊은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한 손에 따개가 열린 맥주 캔을 들고, 머리엔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썼다.
사내는 놀라 쓰러지려 하는 할머니의 어깨를 재빨리 감싸 안았다. 간만의 차이로 굿지는 바닥에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허억... 지미? 지미 자넨가.』
사내의 품에 안겨 굿지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진정하세요. 대왕 바퀴벌레라도 목격하셨어요? 그러다 쓰러지시겠습니다.』
『지미?』
『예, 접니다.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
『자네가 지미라고.』
『그렇다니까요. 지밉니다. 굿지? 도대체 저희 집 앞에서 왜 이러세요.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서. 남들이 보면 우리 집에서 살인이라도 벌어졌나 하겠습니다. 그런게 아니라면 어디 편찮으세요? 저어, 굿지?』

여전히 쇼크 상태인 굿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돋보기 안경을 고쳐 썼다.
『실 없는 말 말게. 난 건강해.』
지미? 마사의 남편이라고?
순간 속이 울렁거리며 뒤집어졌다. 일찍 먹은 저녁이 통째로 올라오려 했다.

『혹시 이거, 몰래 카메라?』
『에?』
『얼굴을 봐선 내가 아는 지미가 영 아닌데 지금 뭐라고...』
『세상에, 굿지. 저예요. 지미라고요. 지금 누구랑 착각하는 거죠?』
『늙은이를 골려 먹으려고 다들 작정했나. 아냐. 착각이 아닐세. 지미는 스포츠 형으로 머리를 짧게 깎은데다 몸집이 제법 좋지. 그런데 자네는 무슨 영화 배우처럼 몸집이 호리호리하잖나. 머리카락도 길고.』
세상이 뒤집어지고 있다. 굿지는 또 다시 토기를 느끼고 재빨리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상한 음식을 먹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지럽고 메스꺼웠다. 신 맛의 침이 입에 고였다.
『자네... 누군가?』

『저런.』
남자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뒷통수를 긁었다.
『기껏 멋을 부린 위장술이 제대로 효과를 못 보고 있는 건가. 이거 큰일났네.』
남자의 하얀 손이 노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아님 이 할머니가 대단한「마법사」인 걸까. 응? 어느 쪽일까.』

그리 중얼거리며 남자는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향해 멋지게 웃어 보였다.
『여보, 그리고 내 아들~♡ 정말로 보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반가운 듯했다. 남자의 환한 미소는 분명 거짓이 아니었다.
물론 그 마누라와 아이는 강도라도 만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