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레이어즈 팬픽션에서 한참 벗어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  새로운 배경, 새로운 등장 인물만 우굴거리는 글이 취향이 아니시면 그냥 뒤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 글은 [가족 몰살] 스토리가 됩니다. 아직은 되지 않았지만 곧 그렇게 됩니다. 꾸에~ 하시는 분도 가볍게 돌아가세요. ^^;;
시간의 순서로는 단편 [Rinforzando] 뒤가 됩니다.


♠ 소화불량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은 마사 로이든을 향해 의사는「임신 4주째요」라고 밝혔다. 그 선언을 듣는 순간, 그녀는 뱀파이어에게 피를 모조리 빨린 희생자인양 창백하게 질렸다. 정신적으로 대단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진짜요?』
『임신 맞습니다.』

인디언이 가죽을 벗기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까락이 빠져 자기 나이보다 열 살은 충분히 늙어뵈는 동네 의사 켄싱턴도 덩달아 얼굴이 굳었다. 이는 임신 소식에 기뻐하기는커녕 경악을 금치 못하는 여자 열의 아홉이「그럼 저는 어쩌라고요. 이 애는 낳을 수 없어요」라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동네엔 행복 대신 늘 구정물과 재앙만 넘쳐난다. 켄싱턴은 불편한 듯 자세를 고쳐 잡았고, 왼편 의자 팔걸이가 앤 여왕의 목을 베어낸 전설의 도끼 자루라도 되는 양 움켜잡았다. 1968년부터 법은 낙태를 허용하고 있지만 그는 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처럼 보수주의자였다. 낙태를 하고자 임신부에게 칼을 들이대느니 차라리 의사 면허증을 관계당국에 반납하고 만다. 그래서 팔걸이를 잡은 손가락은 하얗게 핏기가 가셔 있었다. (* 미국에 대한 작가의 일자 무식의 결과로 사실과 틀리는 점이 제법 있을 수 있음)

『남편 분에겐 연락이 되시는지요.』
평소의 축하합니다 - 코멘트를 과감히 생략하고 칼칼하니 가라앉은 목에 힘부터 주었다. 그리고 여전히 넋이 나간 듯한 마사의 손가락을 눈치껏 눈여겨 보았다.
마사의 손가락엔 좁쌀을 1/4 크기로 나눈 크기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결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것은 세월에 찌들어 흠이 많았고, 급전이 필요해 전당포에 맡겨도 그리 큰 돈은 기대할 수 없는 초라한 디자인의 물건이었다. 어쩌면 끼워진 다이아몬드 나석도 진짜가 아니라 가짜일 수 있었다. 진짜라고 하기엔 그 광채가 지나치게 천박했다.
그래도 반지는 반지다. 켄싱턴은 언약의 증거물로 작은 가락지를 그녀에게 끼워준 XY 염색체를 가진 생명체 - 아기를 만드는데 기여했을 불편한 존재를 떠올리곤 땅이 꺼져라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아뇨... 그러니까 지미는... 오, 맙소사.』
의사가 내뱉은 한숨 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젖고는 켄싱톤이 펼치는 검회색으로 점칠된 상상의 나래가 상당 부분 잘못되었음을 지적했다.
『남편과 저와의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예요. 제가 무슨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가까운 시일 내에 이혼하자고 결정이 난 것도 아닌데요, 뭐. 남편은 기뻐할 거예요. 우리가 첫 아이를 가진지 7년이나 지났으니까... 그이도 딸 얘기를 들으면 잔업 수당을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야근 시간부터 늘릴 걸요. 주말엔 친구들을 불러서 맥주 파티도 하고요. 우리 남편은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을 하는데요,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그런 일을 하는 남자들은 축구와 술, 그리고 아이라고 하면 꿈뻑 죽지요. 제가 지금 놀란 건 순전히 다른 일 때문이랍니다.』

손가락으로 코를 문지르는 그녀를 관찰하던 켕신톤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런가요. 그건 몰랐습니다. 맞은편 동네 정비소 사장은 슈퍼볼이라면 환장하던데.』
초음파 진단도, 양수 검사도 하지 않았다. 임신 시약으로 진단만 했다.
『얼마나 환장했으면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는 날엔 뱃가죽에 33번이라 하얀 페인트로 적어놓고 가게 밖에서 미친 사람처럼 덩실 덩실 춤까지 춥디다.』
그런데 저 여자는 뭔 재주로 뱃속에 든 태아가 계집애라고 딱 잘라 단정을 짓는 걸까.

똑딱 소리를 내어 볼펜 손잡이를 눌렀다. 순전히 버릇이었다.
『미세스 로이드? 수정 후 6주까지는 태아는 형태학적으로 양성이랍니다. 아직 아기가 공주님인지 왕자님인지는 소크라테스고, 히포크라테스고, 엘튼 존이고간에 아무도 몰라요.』
『오-』
『태어날 아기가 공주님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모양이신데, 그걸 확인하려면 앞으로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답니다. 분홍색 아기 요람을 구입하기 전에 심사숙고를 해주셔야겠습니다.』

어쩐지 놀리는 듯한 의사에 말에 마사는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는 걸요, 선생님.』
『네?』
『남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하긴 어려워요. 하지만 난 내가 가진 이 아이가 여자 아이고, 빨간 머리라는 것도 알아요. 오, 이런 - 그리고 나는 이 아이 이름이 리나라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녀는 아직 표시도 나지 않는 자신의 배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일곱 살짜리 우리 아들이 일주일 전부터 나에게 그 사실을 반복해서 나에게 일깨워주었으니까요.』



♠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이는 바닥에 동화책을 펼쳐두곤 시선은 엉뚱하게 창문으로 주고 있었다. 장미를 쥔 공주와 마법의 찻잔이 파스텔 톤으로 그려진 책은 일찌감치 버려진 듯했다. 펼쳐진 페이지는 몇 분이 지나도 다음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아줌마들이 보지도 않는 TV를 켜두고 세탁물을 정리한다더니만, 꼭 그 식이었다.

마사가 대형 할인 마트에 식료품을 사러 간 사이, 순전히 선의에서 잠시 이웃 집 아이를 봐주러 온 에이미는 골칫덩이 학교 숙제에서 눈을 떼고 그런 아이를 곁눈질로 쳐다봤다.
마침 비가 오고 있어서 유리창은 온통 작은 물방울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실컷 쳐다본다고 해도 일곱 살 아이가 흥미를 가질 요소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대도시 아파트 촌에선 아무리 비가 와도 개구리가 울지 않는다. 몸에 해로운 산성비는 기름기가 낀 흙탕물이 되어 하수구를 유유히 흘러갈 뿐이다. 그것은 검고, 불쾌한 냄새를 풍겼다.

『책이 재미 없니?』
『...』
『아님 밖에 뭐가 보여?』
『...』

제르 로이든은 자폐증을 앓고 있다. 아이의 엄마 얘기로는 자폐증 치고는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이라고 의사가 말을 했댄다. 하지만 에이미의 생각은 틀리다. 남이 묻는 말에 일절 대답을 하지 않는데 뭐가 증상이 가볍냐! 저 아이를 진찰한 의사는 의과 대학을 꼴찌로 졸업한 것이 틀림 없다.
거기다 이 창백한 안색의 아이는 희노애락의 표현이 거의 없다. 자기 동생은 TV 만화를 보면서 깔깔 웃고 뒹구느라 정신이 먼 외계 행성까지 외박하시는데 동갑내기인 제르는 왜 저런 걸 보고 웃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며 두 눈만 깜빡거린다. 그러다 벽을 쳐다본다. 이때의 아이는 지루해 못 살겠다는 투다. 차라리 벽에 그려진 얼룩이 훨씬 낫다는 식이다.

사내 동생 둘을 치워낸 에이미는 그간의 베테랑적 경험을 되살려 남자 아이라면 누구랄 것 없이 꿈뻑 죽는 로봇 인형을 쥐어주고 웃음을 유도해 본 적도 있다. 결론은? 처절한 실패.
제르는 인형을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고 피곤한 듯이 손가락으로 눈을 비볐다. 마음에 들지 않았을뿐더러 이걸 가지고 어떻게 노는 건지를 잘 모르는 눈치였다.
보다 못해 에이미가「로봇은 이렇게 가지고 노는 것이다」시범을 보였다.
그 결과는 쓰라려 이후 동네 아줌마 여럿이 스타워즈의 다스베이더 포스터만 봐도 웃게 되었다. 그녀들이 다스베이더 가면을 보고 뭘 연상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기선 생략하도록 하자.

뭐, 로봇은 그렇다치고.
야구 글로브, 슈퍼 패미콤, 소리나는 피카츄 인형, 1/24 사이즈의 덤프 트럭 모형들도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그것들은 쨘~ 소리와 함께 선보인 뒤, 썰렁한 반응을 한 번 맛보곤 창고로 곧장 쑤셔박혔다.

정이 많은 에이미는 그런 제르가 매우 가엾다고 느껴졌다. 세상이 얼마나 즐겁고 재미난 것으로 가득차 있는데! 그런데도 아이는 흡사 죽음이 임박한 수도승인양 세상과 이어진 끈을 놓아버리고 자신만의 감옥에 갖혀 살았다.
늘 슬퍼보이는 눈망울에 웃음을 모르는 뺨.
팔을 붙잡고 품으로 끌어당겨 그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배는 안 고프니? 누나랑 같이 과자라도 먹을까?』
『...』
『좋아. 부엌에 가서 먹을 걸 찾아서 가져올게.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리는 거다?』

여전히 아이는 대답을 안 한다. 시선이 동화책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창가로 옮겨간다.
그걸 적당히 긍정의 의미로 해석하고 에이미는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쥐고 있던 연필은 숙제장에 내려놓고 손바닥을 엉덩이에 문질렀다.

『하아. 지져스.』
냉장고엔 유통기한이 딱 하루 남은 우유가, 그리고 찬장 속엔 고무줄로 입구를 묶은 쿠키 봉지가 있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꺼내보니 너무하다 싶게 가벼웠다. 혹시나 하고 위 아래로 흔들어 봤다. 버석거리는 소리로 보아 남은 량이 많지 않다.
이걸로 괜찮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고무줄을 풀고 내용물을 들여다보니 부스러진 과자 가루가 멀쩡한 놈들보다 곱절은 많다. 에이미는 한숨을 쉬고 쿠키 봉지를 도로 찬장에 집어 던졌다.
신선한 오렌지라도 몇 개 있으면 오죽 좋으련만. 그 흔한 시리얼도 안 보인다. 마사의 주방은 임산부와 어린애가 사는 집 같지 않게 냉기가 감돌았다.

『이건 정말 아니라니까.』

마사는 요즘 대단히 힘들어하고 있다. 아파트 종합 네트워크 - 일명 아줌마들의 수다꺼리로 올라오는 밑 반찬 격의 여러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들어보면 시간외 근무를 지나치게 열심히 하던 남편이 황황하니 불 켜진 밤의 직장이 아닌, 다른 여자 아파트에서 목격되었던 것 같다. 그「같다」라는 표현이 비록 객관적 사실이 아닌,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다고 해도 부부 사이에 두어차례 대단한 말다툼이 있었으면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일 게다. 에이미는 밝은 금발머리를 흔들어대며「하여간 남정네들이란!」하고 불평했다.

마사는 하루가 다르게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모든게 좋지 않았다. 배가 불러오는 것과 반비례하여 집안은 더러워졌다. 평소에도 넋이 빠진 듯한 모양새로 거실에 앉아있게 되었다. 때로 감정을 폭발시켜 분노에 찬 비명을 질러대기도 했는데 당황한 이웃들이 달려와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물어봐도 고개만 절레절레 흔드는 걸 봐선 특별한 원인은 아마도 없는 듯했다.

「때로 임신한 여자들은 감정적으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단다, 에이미.」
「알아요, 엄마. 우울증 같은 거 말이죠?」
「그보다 더 나빠. 세상이 온통 적으로 보이는 거지.」
「적으로 보인다고요? 남들이 자길 헤칠 거라고 생각한다고요?」
「그게 아니라 남들이 소중한 뱃속의 아기를 헤칠 거라 생각하는 거란다. 아아, 가여운 마사... 이런 중요한 때에 지미는 바람이나 피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말이지. 그 집 어린 아들도 병을 앓고 있다는데 밥은 잘 먹고 있는지 걱정이구나.」

쥐들이 비웃도록 빈티 나는 찬장을 보니 그 걱정이 현실화 되는 듯하다. 에이미는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쥐었다. 애매한 무엇인가를 향해 자꾸만 화가 나려고 한다. 작고 가느다란 제르의 손이 부러진 쿠키를 쥐는 모양을 상상하자 머리에 대고 권총 방아쇠가 당겨졌다.
이게 올리버 트위스트 뮤지컬이라면 못 참는다.

- 마사 아줌마가 돌아오면 이야길 좀 해봐야겠어.

그리 단단히 작심하고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플라스틱 컵에 우유를 덜었다. 아이가 점심을 든든히 먹었기만 기도하며 - 다행히 제르는 배고파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 머리를 긁었다. 우유를 컵에 따르고 보니 빈티가 더 철철 난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달랑 우유 한 컵? 전자렌지로 데우기만 하면 되는 봉지 팝콘이 보이는데 차라리 이걸 가지고... 주방 일에는 서툰 에이미는 거실 쪽으로 고개를 돌려 제르를 찾았다.

『얘, 제르? 쿠키가 없는데 대신 팝콘 생각 혹시 없...』

동화책 앞에 있어야 할 아이가 안 보인다. 순간적으로 에이미는 더럭 겁이 났다.
아니다.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놀랄 필요까진 없었다. 괜찮다. 어디로 없어진게 아니라 바닥에서 일어나 테이블 쪽으로 위치를 옮겼을 뿐이다. 제르는 연필을 쥐고,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만, 간만에 재미 봤다며, 에이미의 숙제장에 뭔가를 빠르게 적어 넣었다.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 실수를 깨달은 듯하다.
잠시 뜸을 들이고 코를 만지더니 아이는 적었던 걸 지우개로 도로 지웠다.

낙서?
아니다.
어린 아이가 크레용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동작과 연필로 글자를 쓰는 동작은 한눈에 척 보기에도 큰 차이를 보이는 법이다. 한 걸음 양보해서 엊그제 배운 단어를 끄적거렸다고 해도 그렇다. 일곱 살 어린애가 슥슥 소리가 나도록 해서,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으로, 예를 들자면 Apple 이란 단어를 망설임 없이 쓸 수 있을까?
에이미는「그렇지 않다」에 무게를 주었다. 아이들은 손가락 근육 사용이 아직 익숙치 않아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 일도 힘들어 한다. 힘들기 때문에 동작이 굼뜨고, 어설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아이가 연필을 잡는 동작은 흡사 시험지를 채점하는 선생님처럼 민첩했다.

성큼 걸음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제르?』
『...』
『혹시 지금 내 공책 만졌니?』
『...』

평소처럼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에이미는 언제 그랬느냐며 시치미를 떼고 바닥에 앉은 아이를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그리고 숙제장을 힐끔 보았다.

두 다항식 (x-1)(x-2)(x-3),x(x-1)(x-2)²의 최대공약수를 G, 최소공배수를 L이라 할 때, G분의 L의 값을 구하여라.

깨끗하게 지웠어도 흔적은 남는다. 에이미는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형사들이 증거물로 가지고 온 전화번호 메모지를 다루듯 연필심을 살짝 굴려 맨 종이 위를 가볍게 칠했다. 이렇게 하면 필기구에 눌린 자국은 하얗게 뜨고, 그렇지 않은 면은 까맣게 되어 지워진 글자를 판독할 수 있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숨겨졌던 글자들이 드러났다.

(x－1)(x－2)(x－3),x(x－1)(x－2)² 의 최대공약수는 (x-1)(x-2) 이므로, G=(x-1)(x-2).
다시 최소공배수는, L=x(x-1)(x-2)²(x-3).
따라서, L/G = x(x-1)(x-2)²(x-3)/(x-1)(x-2) = x(x-2)(x-3)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울러 아이가 대답하지 않으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꼬치꼬치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항식이 어떤 건지 알고 있니?』
『...』
『최대공약수가 뭔지 알아?』
『...』
『얘? 벽은 그만 보고 날 똑바로 보렴. 지금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거 맞지.』

고개를 옆으로 하고 속으로 뭔가를 궁시렁대는 아이의 눈빛이 불만스러운 것으로 변해간다.
아울러 아이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던 에이미의 감정도 서서히 변해갔다.



♠ 비 오는 거리는 여러 소음으로 가득차 가뜩이나 지친 사람을 짜증나게 만든다. 자동차가 아스팔트 지면을 덮은 물기를 차고 지나갈 적마다 주전자의 물이 끓어 넘치는 듯한 특유의 소리가 만들어졌다. 빗방울이 건물 유리창을 때리는 작은 진동은 크게 모여「그거 알아? 당신은 오늘 밤에 불면증에 걸릴 거야~」노래를 합창했다.

임신 중에는 아스피린을 한 알 먹는 것도 겁이 나는 법.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신체적으로도 약의 도움을 구할 맘은 들지 않았다. 마사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두통을 호소하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눌러댔다. 그런다고 해도 고통이 나아질 기색은 없었지만 말이다.
오늘도 남편은 귀가가 늦어지고 있다. 그게 야근 탓인지, 아니면 친구들과의 한 잔 탓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신경증에 걸린 아내에게 넌더리가 난 나머지 포커라도 치러 간 건지는 알 길이 없다.
다시 한 번 짜증이 치솟는 걸 느끼며 부스스하게 엉킨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것은 정말 싫은 느낌이었다. 씻은지 사흘이 된 머리카락에서 불쾌한 냄새가 났다.
샤워를 해야 할까? 그치만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가 싫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마사?』

그녀가 맛보는 불쾌감의 제1 원흉.
어쩐지 이 감정은 격렬한 증오를 닮았다.

엄마를 이름으로 부르는 어린 아들을 향해 증오라...
스스로가 비참해져 키득 웃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해야 하는 거 아니었던가. 차도로 몸을 날려 대신 트럭에 깔려 죽기도 하고... 그런데 그녀는 자애의 화신이 되기는커녕 주체할 수 없는 살기에 온 몸을 흔들어대기나 하고 있었다.

『왜 그러니 아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깼니?』
『...』
『아니면 또「그 남자」얘기를 하러 온 거니.』

솔직히 말하겠다.
마사는 자기 아들이 귀신 들렸다고 믿었다. 아니면 아들을 죽이고 그 껍질을 악마가 뒤집어 썼다. 그렇지 않고는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마사는 자신이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침대 맡에 선 어린 아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파랗고 투명한 눈동자에 전문가가 만든 인형인양 이목구비가 또렷한 얼굴.
처음엔 여자 후리는 미남으로 유명했다던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조부를 쏙 빼어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사진으로 본 조부의 눈은 저렇게 각이 져서 꼬리가 말려 올라가지 않았다. 그리고 조부의 코는 안으로 다소 굽어 있었다.
그렇다면 누굴 닮은 걸까. 남편인 지미? 콧등 주근깨는 비슷한 것 같다만 남편은 미남이라고 하기엔 생김새가 투박했다. 그러면 본인? 설마, 그럴 리가. 양심상 자길 닮았다곤 말 못 한다. 뾰족하고 앞으로 돌출된 턱이 강한 인상을 주어 틴 에이저 시절엔 데이트 신청도 잘 못 받았던 그녀다. 거금을 들여 치아를 교정하고 나서야 상황은 좋아졌다. 마사는 콧물과 함께 숨을 들이켰다.

남의 아이다. 그렇고말고. 누군가 아이를 바꿔치기 했다. 이제는 배 앓아 낳은 자식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태어나 잘 울지도 않았던 아이, 배고프다 칭얼대지도 않던 아이, 안아달라 졸라대는 법이 없던... 그리고 최근에 이르러선 흡사 성인 남자처럼 말을 거는 아이.
남의 아이다. 내 아이일 리가 없다.

『제르?』
『나는 알 수 있어.「그 남자」가 오고 있어. 아직 그쪽에서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쪽도 그에 대응해서 몇 가지 대책을 세워두어야만 해. 저번보다 기척이 훨씬 가까워졌다는 것도 걱정이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 모두 위험해져.』
『아가, 제발...』
『나도 이러고 싶진 않아. 하지만 난 리나의 안전을 생각해야만 해.』
『기다려, 제르. 엄마는... 엄마는...』
『당신은 안 미쳤어. 그리고 이건 꿈이 아니야.』
『기다리라니까! 그리고 내 말을 끊지 마!』

참았던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한다. 그녀는 양팔을 감싸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놀란 이웃 주민들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아래층에 강도가 들었다며 호들갑을 떠는 건 둘째다. 목이 메인다. 가슴이 아파왔다.

『도대체 엄마는 이해를 못 하겠어. 그 남자가 누구인데 우리가 위험해진다는 거니. 응? 총을 들고 와서 우릴 다 쏴죽이기라도 한대? 매일 와서 한다는 말이 그 남자, 그 남자, 우리 리나, 우리 리나... 그래, 이건 꿈이야. 이건 환상이겠지. 그렇지? 사실이 아닌 거 맞지?』
아니다, 이런 걸 묻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마사가 흘린 콧물이 카펫을 적혔다.
『너는 누구니. 일곱 살 내 아들의 몸을 하고 나타난 너는 누구니.』
그리고 분노는 절정에 이르렀다.
『내 아기를! 내 아들! 내 천사를 돌려줘! 이 악마!』

순간 아이는 상처 입은 표정을 짓고 아랫 입술을 깨물었다.
푸른 눈동자는 피곤에 젖어 한층 그 색이 어두워졌다.
마침 비 오는 소리가 더 커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근처로 천둥이 칠 지도 모르겠다.

『마사.』
『어째서! 어째서! 왜 나에게 나타나는 거야!』
『이 일에 대해선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당신을 혼란스럽게 만든 건 유감이야. 나는 내 잘못을 잘 알아. 이 치졸함에 대해서도 잘 알아. 그러니 이런 날 용서해 달라곤 말 못하겠어.』
고사리 같은 손이 마사를 잡았다.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난 당신으로부터 태어난게 맞아. 나는 당신의 일곱 살바기 아들이야. 이 작은 머리에 먼 과거 - 아울러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지식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는 문제를 가진, 당신의 아이야. 그 때문에 저주를 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짧은 수명을 다 써버리고 곧 죽을... 이봐? 울지 마. 이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모두 나의 죄 값이고, 나의 실수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할게. 내가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도록 제발 그 힘을 빌려줘.』
마사와 마찬가지로 격정에 사로잡힌 푸른 눈동자가 애원하며 다가왔다.
『부탁이다. 당신과 그 뱃속의 아이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날 믿어줘.』

그리고 아이는 마사의 배에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