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곧 죽어도 Go] 단편을 먼저 읽어주세요.


하늘로부터 떨어지는 꽃송이에 떨리듯 작은 파문 일어 바위를 간질이다.

네명의 손님들이 모두 입을 와아 벌렸다.
그런데 그 중 하나의 표정이 앞의 셋과는 뉘앙스가 사뭇 달랐다.
가브가 일격으로 어깨를 싹둑 잘라갔을 적에조차 비릿하게 웃었던 제로스는 이번만큼은 웃기가 약간 힘들었다.
웬일이니. 120년 전통을 자랑하는 노천 선녀탕에 나무 판자를 이어서 만든 남녀구분 칸막이가 긴급 설치되어 있었다. 임시로 대충 세워두었다가 다음날 확실히 철거하겠다는 의사를 뚜렷이 밝히고 있을 정도로 그 모양새는 엉성하기 그지 없었다고 해도... 어쨌든 칸막이다. 덕분에 다른 세 명 - 묘하게 지쳐보이는 리나를 포함하여 생채기 투성이의 키메라군과 시퍼런 멍 투성이의 쿼터엘프군은 기분이 째지는 듯 하였지만 제로스는 저 혼자서만 진한 먹구름의 강림에 몸서리쳤다.

오크를 잡았다 풀었다 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래도 죽자고 일주일 내내 고생한 보람이 있다. 리나가 쌀집 아저씨의 호탕함을 모사하며 껄껄(?)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온천이잖아~ 멋지다. 용케 이런 걸 알았네? 제로스.』
『아하.』
『사람도 드물어 분위기 좋고. 덕분에 호강한다, 야. 땡큐, 땡큐~』

이럴 적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여행에 초대해줘서 정말 고맙다 인사를 받았으면「별 말씀을」이라 답해야 하는데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 아니, 그 이전에 표정관리가 잘 되지 않고 있다. 미소를 짓고 싶어도 자꾸만 입이 찌그러진다. 강제로 웃으려니 이마에 힘줄이 당긴다.
하는 수 없다. 제로스는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빠안-히 쳐다보는 리나를 무시하고 계속하여 굵직한 침묵을 고수했다.

- 이거, 이거. 내가 사람을 과소평가했군. 소심한 사람으로 봤는데 정작은 렛셔 데몬을 풀겠다는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 이건가. 대단한 주인이네.

하지만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선녀탕 주인은 그저 산술적으로 처신한 죄밖엔 없다.
노트에 숫자를 적어보자. 한쪽에는 1을, 다른 쪽에는 3이라는 숫자를 쓴다. 1이라는 숫자 아래로는 렛셔 데몬을, 다시 3이라는 숫자 아래로는 오크라고 적는다.
척 보이지 않는가. 오크 ＞렛셔 데몬.
한 명의 협박범이 푸는 렛셔 데몬보다는 세 명의 협박범이 몰고 오는 오크떼가 더 무섭다. 이쪽은 저쪽의 곱하기 3이다. 따라서 선녀탕 주인은 오크떼 협박에 자동적으로 굴복하게 되어 있다.
제로스는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빌어먹을!」이라 욕했다.

『지금 무어라 말했니? 제로스.』
『아뇨-』

재빨리 기분전환, 제로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렇게 실망하진 말자.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아.
불끈- 해서는 리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씩씩하게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여장을 하고 거리에 나가면 적어도 남자 넷 중 둘은 휘파람을 불어댄다. 각선미엔 자신 있다. 맵시 좋게 엉덩이를 흔들어 보자. 게다가 평소 리나의 입버릇이「넌 남자도 아냐」아닌가. 분명 통한다.
자! 리나 님. 여탕은 이쪽입니다!

『네가 트랜스젠더냐?!』
『언제는 남자도 아니라고 흉 보셨잖아요.』
『그야 몸뚱이는 그렇지. 그치만 마음이 남자여서는 같이 목욕하기가 곤란해. 어이, 가우리? 제르가디스. 이 바보 멍청이를 어서 체포하여 끌고 가도록! 그럼 얘들아? 있다가 휴게실에서 보자♡』
『아아앗?!』

그걸로 끝이었다. 제로스는 양 팔을 모두 잡힌 채 남탕으로 질질 끌려갔다.

그런데 말이다.
제르가디스는 불안하다는 기색을 감추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제르가디스씨.』
아니, 그 뭐랄까... 키메라는 바지를 벗다 말고(?) 턱을 어루만졌다.
문제의 마족 군은 자기 몫의 타월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이 사나와 모든 걸 흘리고 다니는 가우리의 물건까지 알뜰살뜰하게 챙기는 중이었다. 가우리가 앗차 하고 보관함의 열쇠를 떨어뜨리자 생긋 웃어가며 그걸 발목에 채워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징징거리며 울면서, 바둥거리고, 나두 리나 님이랑 같이 목욕할 거다 이러면서 소동을 피워 결국은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지 않을까 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남자 탈의실로 들어온 직후부터 얼굴색을 싹 바꾸더니만 줄곧 조용하게 굴고 있다.
솔직히 말하겠다. 얌전히 있는 제로스가 너무 겁 난다.

마족은 걱정에 사로잡힌 제르가디스를 쯧쯧 혀를 차며 올려다 보았다. 제로스가 무릎 옆으로 개켜놓은 개인용 타월은 모두 세 장이었다. 따스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흰색 타월이었다.
『나는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아닙니다, 제르가디스씨.』
『네 놈이 천 살 잡수신 할아버지라는 건 나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네 녀석 정신 연령은 어디까지나 다섯 살이 맞잖아.』
『말도 안되네요.』
어이 없다는 투로 손사레 쳤다. 정신 연령이 겨우 다섯 살인 마족이 여자아이 속옷에 관심을 보일 것 같냐. 마족군은 베시시 웃으면서 쨘- 소리를 냈다. 그리고 산딸기 무늬가 프린트된 꽃분홍색 브래지어 하나를 꺼내 자랑스럽게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그러니까 다섯 살이라는 거지! 어휴! 언제 리나 가방을 뒤진 거야!』
제르가디스는 불끈 쥔 주먹으로 제로스의 뒷통수를 후려갈겼다.
아아, 앞 날이 훤하다. 소년은 찔러대는 듯한 격한 두통을 느끼고 같이 술 먹자는 가우리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온천욕하면 물에 쟁반 띄우고 마시는 차가운 술부터 생각나는게 정상 아냐? 제르가디스 저 녀석은 의외로 무드가 없어.』
가우리의 입은 한 자나 나와 있었다. 혼자서 먹는 술이라니. 에이. 기분 잡친다. 하여 아저씨는 술잔을 일시에 확 뒤집어 안의 내용물을 깨끗이 털었다. 차갑게 식힌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흐른다. 극락이다. 짜릿한 열기가 피부를 타고 발가락 끝에까지 흘러갔다. 온몸이 후끈거리면서 쌓였던 피곤이 일시에 풀리는 듯하다. 어, 좋다. 상체를 쭉 뻗고 가벼운 신음소리를 토했다.

『속도가 빠릅니다. 그러다간 취할 수 있어요, 가우리씨.』
가우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제로스가 지적했다.
『안 취해.』
『취한 나머지 실수로 물에 빠져도 저는 안 구해드릴 겁니다.』
『걱정 붙들어 매라니까 그러네. 나는 아두 아두 말땅하다고-』
그렇수? 여전히 마족은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본인이 그렇다는데야 뭐. 솔직히 옆에서 오줌을 싼다고 해도 상관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그였다. 방해하지 말아라. 구석에 자리를 잡고 때아닌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독서! 온천욕을 하면서 독서!
탕에 들어가기에 앞서 온몸에 깨끗하게 비누칠을 하던 제르가디스가 비누를 떨어뜨렸다.
뭐, 듣자하니 감전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욕조에 드러누워 라디오를 듣는 강심장의 여자도 있다고 한다. 물론 필자가 그렇다는 얘긴 아니다. 본인의 심장은 콩알만 하다. 아울러 슬레이어즈 세계에 과연 라디오가 있기는 있느냐 묻지는 말고... 제르가디스는 침착함을 가정한 채 허리를 굽혀 떨어뜨린 비누를 도로 주웠다. 어쨌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두 가지 행동을 동시에 하면서 묘한 스릴을 맛보는 인간들도 없진 않다고는 하니까... 밥을 먹으면서 동시에 신문을 읽거나, 옷을 입으면서 면도를 하는 등의 그런 (불량) 마족도 어딘가에는 있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미끄덩 소리를 내며 재차 소년의 손아귀에서 비누가 추락했다.
목욕하면서 독서라니? 

『젖지 않아요. 특수 재질이라서.』
제로스는 제르가디스를 안심시켰다. 잠시 휴가차 온천에 간다고 한바탕 자랑을 했더니만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해장군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친히 손에 쥐어준 책이다. 물고기 족속들의 장군님이 애용하는 물건이시다. 당연히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방수 코팅이 되어 있었다. 물속에 넣고 흔들어도 얼룩 하나 생기지 않는다. 그것이 수증기든, 물방울이든 얼마든지 덤벼봐라. 뜨거운 커피를 뒤집어 써도 끄떡 없다.
제로스는「굉장하죠?」라는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책을 가볍게 흔들었다.
순간 제르가디스는 곤란한 물이끼를 밟은 사람인양 비틀거렸다.
좀 더 고상한 책을 고를 수는 없었던 건가. 책의 제목은「선녀와 나무꾼」이었다.

『놀러 갈 온천의 이름이 선녀탕이라고 했더니만 뭔가 생각나는게 있으셨던 것 같아요.』
『아니, 아니. 그 이전에... 마족이 그런 책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은 거 맞아?』
당연히 괜찮고 말고. 안될 까닭이 어디에 있담. 제로스는 눈을 야리며 쯧쯧 혀를 찼다. 마족에게도 메르헨적 감성은 존재할 수 있다. 해장군이 특히 좋아하는 책은「별주부전」. 육지로 나간 거북이가 거짓말쟁이 토끼에게 속아 간을 얻지도 못하고 용궁으로 돌아왔다더라 하는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그가 얼마나 짜.증.을. 부.리.곤. 하.는.지. 이들 인간은 모를 것이다. 해장군은 턱을 쓰사듬으며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거북이의 심정이 절절하게 이해가 간다네. 해왕님이 추석선물이랍시고 아랫것들에게 물고기밥 세트를 배포시켰을 적에 맛보았던 그런 절망감이랄까, 무기력감이랄까. 말 그대로 탈진 상태인 거지. 난 이 거북이로부터 심리적 동질감을 느낀다네.」

제르가디스가 의심의 시선을 던졌다. 물고기... 밥... 추석 선물세트?

『그때 제법 고생 좀 하셨더랬죠, 해장군님. 내가 금붕어냐, 아님 고등어냐, 이러면서 어인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으니까. 그걸 무마시키느라 애 쓰셨어요. 나랑 마찬가지예요. 가엾은 중간 관리라는 거죠.』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 제로스는 어딘지 모르게 진실성이 부족해 보이는 어투로 대충 대꾸하곤 낱장을 팔랑 넘겼다. 책의 내용은 이제 나무꾼의 지혜로 사냥꾼에게서 무사히 도망친 사슴이 은혜를 갚는답시고 선녀탕 운운하며「기회가 왔으니 이참에 마누라를 얻으세요」라고 떠벌리는 부분에까지 이르렀다.

수풀에 몸을 감추고 선녀의 옷 하나를 훔쳐라. 목욕을 마친 뒤, 벗어놓은 옷이 없어졌다고 모여있는 선녀들 사이에서 난리가 나면 이때 당당히 앞으로 나가 주장을 하도록 한다.
나, 장가 들어야겠다. 옷 주인은 하늘로 돌아갈 생각은 말고 내 마누라가 되도록.

이야, 이거 기 차다. 제로스는 감동했다며 손가락을 튕겨 책장을 탁 하고 쳤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제르가디스가 얼른 제로스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이대로 여자 탈의실로 몰래 들어가 리나의 옷을 훔친 뒤에「옷을 무사히 돌려받고 싶으면 나와 이대로 계약을 해주셔야겠습니다」라고 떠들 거라면 차라리 그 전에 나에게 죽어줘-
마족은 다소 기분 상했다며 붙잡힌 손과 제르가디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거 무지 섭섭합니다, 제르가디스씨. 내가 바보인 줄 아시남? 리나 님 성격에 참으로 계약을 해주시겠습니다. *고디바 부인이 되어 발가벗고 저에게 주먹을 날리면 날렸지, 얌전히 울상을 지어주실 분이 아니지요. 그깟 옷 한 벌 훔쳐서 일이 완료되면 제가 이렇게 힘들어 할 까닭이 없잖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왜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있는 건데?』
앉아. 움직이지 마. 동작 그만.
『정말 이렇게 못 믿어주나. 탈의실엔 안 가요. 저도 가우리씨처럼 술 한 잔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아무렴, 제가 염치도 없이 여자 탈의실에 몰래 잠입할 인간으로 보여요? 자요, 이제 그만 이 손을 놓아주세요. 남들이 보면 엉뚱한 방향으로 곡해하겠습니다.』
곡해를 하라지. 제르가디스는 상관 안 했다. 어차피 그들이 철천지 원수 사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 아니던가. 지금처럼 손을 잡고 있다고 하루 아침에 로미오와 줄리엣이 될 리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오해받기 싫으니 팔을 놔달라는 마족의 이야기는 가뿐하게 씹고~
『그 질문은 애시당초 잘못 되었다구. 보이든, 안 보이든간에 넌 인간이 아니잖아.』
『그럼 바꾸지요. 제가 염치도 없이 여자 탈의실에 몰래 잠입할 마족으로 보여요?』
『보여.』
『카악- 진짜!!』

알았어! 그냥 잡고 있어! 지가 피곤하지 내가 피곤하냐?
제로스는 화를 내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만 들고 있던 책의 낱장을 넘겼다. 의외로 쉽지 않은 동작이었다. 그나마 종이가 두툼하여 다행이었다.
아무튼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나무꾼은 어여쁜 색시를 얻었다. 참하고, 일 잘하고, 뽀얀 피부를 가진 아내였다. 힘들어도 인상 찌푸리는 일 없어 동네 사람들로 입술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단 하나, 싫은 내색 일절 하지 않던 아내도 도깨비처럼 화를 낼 적이 있었다. 텅 비어있는 문지방을 까닭 없이 응시하면서「당신의 날개 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소」라고 변명하는 남편을 대할 때였다.
남편은 시치미를 뚝 잡아뗐다.
- 옷은 그만 잊어버리고 아이나 쑹덩쑹덩 낳아보십시다
하여 아이가 셋 태어난다.

제로스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런 고전적 방법이 효과 짱이야.

『그건 아니지, 제로스. 페이지를 더 넘기면 생각이 확 바뀔 걸-』
누군가 참견해왔다. 제로스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이어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저편에서 리나 인버스가 임시 칸막이 위로 머리를 볼록 내밀고 있었다. 예의 뚱한 표정 - 혹자는 먹던 만두를 땅바닥에 흘렸을 적의 표정이라고 한다 -을 짓고서 말이다. 옆에 있던 제르가디스도 무지막지하게 놀란 것 같다. 그가 짤막하게 악 소리를 질렀다.

『훔, 훔쳐보는 거냐! 여, 여자애가!』
『본다고 닳냐? 아무튼 고추 보인다♡』
- 첨벙
벌겋게 달아서 코만 내밀고 나머지는 물 속으로 잠수했다.
『아무튼 너란 녀석은!』
『소리지르지 마. 이쪽도 편하게 있는 건 결코 아니라구.』
바가지 다섯을 쌓아두고 아슬아슬하게 올라서는 건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게다가 아차하다간 미끄러운 바닥으로 고꾸라져서 머리통 깨먹는다. 그래서 그녀는 몸의 균형을 잡는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고, 필연적으로 남정네들의 몸매 감상에는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할당할 수 없었다. 벗었냐? 벗었나보지. 대신 그녀는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는 것으로「내 말대로 빨리 책장이나 넘겨봐라」독촉을 했다.

그렇다고 책으로 시선을 내리깔면 바보다. 일단 제로스는 반항(?)했다.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닌 거 같습니다만?』
『그럼 뭐가 문제인데. 어허! 지금 나에게 대들겠다는 겨?』
저 서슬 퍼럼엔 대항할 길이 없다. 제로스는 얌전히 항복했다. 분부대로 합니다.

하여 날개 옷을 입은 선녀가 세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가기에 이르렀다. 제로스는 황망해져서 그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저 아래에서 나무꾼이 울부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녀는 남편이 울거나 말거나 위만 쳐다보고 있었다. 한 아이는 오른팔에, 한 아이는 왼 팔에, 나머지 아이는 등에 엎고서 말이다. 저 위를 향해 날아가는 그녀는 무척이나 당차보였다. 후회도, 미련도, 상념도 모두 남겨두고 원래 그녀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어떤 존재로도 방해받지 않겠다는 표정.
그녀는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존재였던 걸까.
제로스는 가볍게 전율했다.

『저기? 있잖아, 이 이야기엔 서로 상반되는 두 종류의 엔딩이 있어.』
리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펼쳐진 두 개의 손가락 중에서 하나를 접었다. 아무래도 발 밑이 점점 더 불안해지는 모양이다. 표정이 아까보다 더 없어졌다. 잠시나마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다시 균형을 잡았다.

『하나는 해피 엔딩. 선녀는 다시 돌아와 나무꾼까지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반면 또 다른 이야긴 내용이 무척 어둡다.
나무꾼은 하늘로 봉화를 올려 아이들을 돌려줄 것을 호소한다. 선녀는 밧줄에 물통을 매달아 그 속에 아이들을 넣어 지상으로 내려보낸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다시 물통을 들어올려 아이들을 데려간다. 이에 나무꾼은 올라가는 물통을 붙잡고 아이들과 같이 하늘로 올라가려고 시도한다. 정원초과가 되어버린 물통은 그만 도중에 뒤집어졌고, 아이들과 나무꾼은 지상으로 떨어져 죽어버린다.

제르가디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살벌하군. 그게 동화책 맞나. 그런 가족 몰살의 엔딩은 난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제르? 우리 언니가 가지고 있던 책의 엔딩은 그렇게 끝났다고. 그녀는 남편 성격상 물통을 잡고 올라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무게를 견딜 수 없는 밧줄을 일부러 걸었다는 거야.』
『여전히 납득이 안 가는군. 도대체 그 책에서 아이들이 어떤 교훈을 얻으라는 거지?』
『그야... 여자를 물로 보지 마라.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핀트가 묘하게 어긋난 것 같은데.』

어긋난 건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드디어 삐긋했던 것 같다. 칸막이를 붙잡은 리나가 악 소리를 내며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어 들려오는 건 다섯 개의 바가지가 일시에 박살나는 굉음... 놀라서 제르가디스와 제로스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리나?』
『리나 님!』
『괜찮네. 아직 안 죽었어. 아야야!』
무어라 욕설을 투덜거리며 바가지를 쌓는 기척이 들려왔다. 조금 기다리고 있노라니 멍자국이 선명한 리나의 머리가 칸막이 위로 다시 떠올랐다. 제기랄, 제2차 남탕 훔쳐보기다. 남자들은 얼굴을 붉히며 풍덩 주저 앉았다. 아니, 정정한다. 제르가디스만 도로 탕속에 앉았다. 반면에 제로스는 똑바로 서서 리나를 마주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어째서 그런 힘든 일을 하고 계신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잖아!』
리나의 얼굴이 다소 벌개졌다.
『이쪽은 혼자란 말이야! 자기들끼리 신나게 떠들고 웃으니까 나도 마찬가지일 거라 착각들 하시는 거 같은데 말이지. 여기엔 아무도 없어! 난 혼자란 말이야! 하나두 재미 없어! 재미 없다구!』

순간 제르가디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걸 보았다.
마족이 상냥하게 웃으며 칸막이 너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달을 그리워하듯, 너무나 애처로워서 절로 울음이 나올 듯한 표정으로 늑대는 팔을 벌리고 있었다. 속삭이듯 짐승이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대면 보름달은 이제 그만 구름 아래로 내려와도 될 것이다. 그러면 마물은 기꺼이 달의 옷을 훔칠 것이다.

『하나도 부끄러워하실 거 없습니다. 타월로 몸을 감고 이리로 건너오세요.』
『시끄러! 그렇다고 내가 네 맘대로 움직여줄 거 같아? 이 승냥이 같은 놈아!』
그러면서 왜 한쪽 다리를 칸막이 위로 슬그머니 집어 올리는 건데?
『제르가디스씨? 원래는 이래선 안되지만 우리들도 허리에 타월을 걸치고 있도록 하죠.』
『흥! 그러니까 누가 그쪽으로 건너간다고 했느냐고!』
어이? 이미 엉덩이 걸음으로 칸막이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런 소리를 하면 설득력이 없다니까 그러네...
『저어... 리나님? 내려오는게 힘들어요? 제가 가서 도와드릴까요.』
『안 간다니까!』
칸막이 붙잡고 있는 그 팔만 놓으면 이미 월담 끝이구마. 제르가디스는 투덜대며 앞 가리개(?)를 서둘러 찾았다.

『저 바보. 그럼 우린 일주일동안 무얼 위해 그리도 애를 쓴 거냐구.』

술친구가 드디어 나타났음을 깨달은 가우리가 기뻐 날뛰며 오토나리 강에 사는 한 마리 갓파인양 술쟁반을 머리에 이고 이쪽으로 헤엄쳐오기 시작했다.
역시 둘로 찢어지는 것보다는 하나로 뭉치는게 훨씬 더 즐겁다.
자, 그렇다면 주거니 받거니 할지어다.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