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있잖는가.
꿈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거기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 말이다.
가느다란 실처럼 생긴 밧줄에 매달려 어떻게든 아래로 내려가고자 기를 쓰고 있는데, 그놈의 엉성한 밧줄은 길이마저 짧아 땅바닥으로부터 5미터 높이에서「The End」처리가 되어 있다. 게다가 저 밑으로는 사나워보이는 커다란 개가 두 마리나 지키고 있어「어서 떨어져라, 맛있는 저녁밥~」이러고 있다. 밧줄을 잡은 손가락에 아무런 감각이 없으니 현실이 아니라는 건 분명한데... 미치겠다.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깨어날 수가 없다.
상당히 억울하다. 기왕 꿈을 꾸는 거라면 오색찬란한 하와이안 비치에서, 맛있는 음료수를 들고, 멋진 남자랑 세트로 알로하 댄스를 추는 내용이어야 할 거 아닌가. 지금처럼 허공에 대롱 매달려, 개들에게 노림을 당하는 줄거리라니.
마침내 밧줄을 붙잡고 있던 손이 미끌어졌다.
개들이 왕왕 짖었다.
짖기만 했던가. 지옥의 검둥개가 달겨들어 팔뚝을 와작 물어버렸다.
동시에 눈이 번쩍 띄여졌다.

「뭐야, 이거. 오늘 하루 재수 옴 붙었군.」

으-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뒤척이다말고 리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꿈에 개가 나오면 재수가 없다. 개는 천덕꾸러기라나 뭐라나, 어른들은 꿈속에 나오는 개를 일컬어「근심 덩어리」라 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리나에게 말하길, 꿈에 개가 보이면 귀엽다 생각하여 머리를 쓰다듬지 말고 죽어라 돌팔매질을 하여 쫒아보내되,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반드시 굵은 소금을 뿌리라 하였다. 

「죄송합니다, 아부지. 정신이 없어서 미처 돌팔매질을 하지 못했어요.」
거기다 칠칠치 못하게 팔뚝까지 물렸으니 이 일을 워쩐다.
「이거, 이거. 오늘 하루는 누가 뭐래도 조신하게 굴어야겠군.」
톱 클래스의 마도사가 미신을 신봉하는 게냐 욕해도 하는 수 없다. 어릴 적부터 귀가 아프게 그 소리를 들었음이다. 개가 나오는 꿈은 흉몽이다. 리나는 다시금 끙 소리를 내며 베개를 끌어당겼..........

당기려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으아- 역시나 무지하게 재수 없군.」

방안에 시커먼 반가사유상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오묘한 미소를 자랑하는 백제 시대의 국보님이 슬레이어즈 세계로 굴러 떨어졌다는 건 아니고... 리나는 베개 모서리 부분을 움켜잡았다. 다리를 꼬고 앉은 한 사내가 책상 모서리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있다가 인기척에 반응하여 이쪽을 빼꼼 쳐다보았다.
그렇게 눈치를 살살 살핀다고 용서할 것 같냐. 리나는 냅다 하고 베개를 집어 던졌다.
원 스트라이크.

『놀랐잖아!』
『놀랐다고요? 놀란 사람 표정이 아니던데요, 리나 님.』
『오냐, 그럼 정정하마. 짜증나잖아!』

아무나 좋으니까 이놈의 잘난 마족에게 에티켓을 가르쳐다오.
리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나이트 가운을 주섬주섬 몸에 걸쳤다. 셔츠처럼 생긴 잠옷 윗도리의 단추를 목 위에까지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 가운까지 걸친다라. 이래서는 지나친 오버 아닌가 싶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만서도. 요는 애니콜 협찬 시보 현재 시각이 새벽 4시였으며, 나아가 상대의 외모가「그래도」남성이었다는 점에서 과잉반응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멋! 그래도 남성이라뇨!』
『흥! 건강한 여성을 임신도 못 시키는 남자를 과연「남자」라 할 수 있겠니?』
『그런 차별적 발언이! 힘들여 정관수술(피임수술)을 받은 뭇 남성들의 아우성이 환청처럼 들려오고 있네요.』
『그 사람들이야 당연히 할 말이 있지. 하지만 너는 정관수술도 받지 않았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잖아.』

울컥했던 것 같다.
순간 제로스의 주둥이가 거짓말처럼 열 개로 증식했다. 그리고 열 개의 입이 동시에 말했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 나두 (열 개의 입으로) 할 말 있어요.×10》

리나는 시트자락을 이마 정수리 부위까지 끌어다 올리면서 한참을 투덜거렸다. 그 작은 얼굴이 입술로 도배되었다. 에일리언 마스터도 아니고 이게 무슨 록키 호러 픽쳐 쇼란 말인가. 에이, 징그러워 못 참겠다. 할 말 있다고 치자. 그러면 될 거 아닌가.

『그래서 뭐.』
《그래서 뭐라뇨.×10》
『이 눈치 밥탱이. 이 오밤중에 날 괴롭히는 까닭이 뭐냔 말이다. 그리고! 당장 그 망할 놈의 주둥이, 원상복구시켜!』

괴롭혀? 내가?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제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종이 봉지 하나를 슬그머니 내밀었다.
영문도 모른 채 받아들고 보니 제과점에서 파는 베이비 슈크림 과자였다. 둥글게 에워싼 월계수 문양에 빵 바구니 그림. 요 앞의 가게 간판에 걸린 그림이 맞다.
하지만 말이다. 새벽 댓바람부터... 슈크림?
두꺼운 종이로 만들어진 포장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말고 리나의 눈이 의심을 담아 가느다랗게 변해갔다.

『설마하니, 이것이 바로 불사의 계약 요리 제2탄이라는 건 아니겠지.』
『으아- 제발 부탁이니까 그건 잊어줘요.』
『너라면 잊을 수 있겠니. 말이 불사의 스튜이지 그건 얄리꼴리 스프 재탕이었어.』

그 악취와 그 색깔! 한 번 당해본 전적이 있는지라 미리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움찔- 하고 그대로 기절. 가우리는 경련을 일으켰고, 제르가디스는 돌아서서 사흘 먹은 음식을 모두 토했다. 뿐만 아니다. 반경 20미터 안에 자리하고 있던 죄없는 일반인 다수가 구토, 이어지는 건「어딘가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라는 시민 제보였다.
리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당신들, 도대체 시체를 어디에 숨기고 있는 거요?!」라며 모두로부터 의심을 받아는 봤나. 졸지에 토막 살해범, 내지는 시체 도굴꾼 취급을 받아가며 반쯤 열려진 창문으로 줄행랑 치는 기분,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아마 쉽게 이해하기 힘들 거다.
『이 웬수야~』
그래서 리나는 굴러다니던 슬리퍼를 들어 제로스의 면상을 향하여 냅다 집어던졌다.
투 스트라이크.

이마에 신발자국이 난 그대로에서 제로스는 울먹였다.
『슈크림 좋아하시잖아요~ 그런데 왜 이래요오오오~』
『하여간 너! 앞으로 식칼을 쥐거나, 앞치마를 걸치거나, 프라이팬을 들거나, 다 끓인 라면에 김가루 뿌린다고 하거나, 감자 껍질을 벗긴다고 깐죽거리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어!』
『어쩜. 남의 취미 생활을 그리도 단칼에 부정하시다니.』
『그게 어딜 봐서 취미냣! 엄연히 살인 미수 행위이지!』
버럭 고함을 지른 뒤, 리나는 종이 봉지에서 슈크림 하나를 꺼내들고 재차 물었다.
『그래서 난 걱정이 되는 거다. 이거! 이 슈크림! 예의 살인 미수 행위의 연속 아니냐?』
『아니예오오오~ 리나 님 생각해서 일부러 돈 주고 사왔단 말예오오오~』
그거 먹어서는 안 죽어요. 제로스는 털퍽 쓰러져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주장했다.
『나도 깨달았단 말예오오오오~』

무엇을?
여전히 리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뭘 깨달았는데?

『불사의 계약 요리는 앞으로는 다신 안 만들 거예요.』
흐음, 저 표정을 봐선 뭔가 있긴 있었구나. 리나는 므흣한 얼굴로 팔짱을 끼었다.
호기심이 개구리를 죽인다고 한다. 이럴 적엔「아아, 그랬냐」하며 무심한 표정으로 받아 넘겨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러지를 못한다. 망할 놈의 호기심. 그 까닭이 궁금해서「왜?」라고 꼭 묻게 된다.
그러면? 싸가지 없는 마족은 철 없는 강아지도 아닌 주제에 얼랑 침대 쪽으로 뛰어올라「제 말 좀 들어보세요~」라며 같지도 않은 신세 한탄을 주절거리게 된다.

역시나.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오오오~ 어흑. 제 말 좀 들어보세요오오오~』
매번 당해왔는데도 궁금해 죽겠다는 투로「왜?」라고 물어보는 건 이쪽의 머리가 나빠서일까. 온기 없는 무게감에 침대가 옆으로 기우뚱 기우는 것을 느끼며 리나는 스스로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제로스가 문제의「불사의 스튜」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 사흘 전.
앞서 말했지만 냄비 뚜껑을 열기가 무섭게 리나 일행은 혼절, 근방에 있던 사람은 기절, 숟가락을 들고 한 입 먹어본다는 일은 그 어느 누구도 꿈을 꾸지 못했다. 게다가「시체가 썩는다!」라는 말도 못할 대 소동으로 일이 커진지라 제로스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 틈새로 냄비를 들고 달아나느라 바빴다. 리나가 정신을 차리면 일벌백계의 드래곤 슬레이브를 날릴 것은 불을 보듯 뻔했고, 리나가 드래곤 슬레이브를 날리지 않는다면 최소한 곡괭이로 중무장한 마을 주민들의 난입은 기정 사실이었다.
샤브라니구드시여.

『어쨌거나 너, 잘만 도망쳤잖아. 이쪽 사정은 생각도 않고 무책임하게스리 말이지.』
여기서 리나는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하고 보았다.「나와 그대가 힘을 합쳐, (곱배기 스페샬로) 멸망을 내려줄 것을~」이 부분까지 주문을 외우고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만? 제로스는 그 날렵한 궁둥이를 흔들며 이미 언덕 하나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여 곡괭이로 무장한 마을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건 리나 일행이었지 결코 제로스가 아니었다는 말씀.

그녀는 끄응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상상을 해보자.
당사자는 도망갔고.
앞에는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성난 민중들.
그 상황에서「내가 안 그랬어요」, 하고 변명해봤자 눈빛이 변한 사람들이 그 이야길 곧이 곧대로 믿어줄 리 만무.
하여 이어지는 건 무한으로 증식한 스미스 요원과 구원자 네오와의 한판 대결이다.
주먹 날리셨습니까. 그럼 옛소, 곡괭이 한 번 받으시오.

『덕분에 무지무지 열 받았다구, 나.』
『아하하하...;; 그건 죄송. 하지만 저라고 팔자 편했던 건 아니랍니다.』
안 편해? 반사적으로 리나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거 뭔 소리? 도망쳤잖아! 나처럼 두 손바닥으로 날아드는 낫 가로막기 같은 거 해봤어? 안 했잖아!』
『물론 해보진 않았죠, 리나 님. 하지만 내 장담하는데 무한증식 스미스 요원과 붙는게 훨씬 더 괜찮았을 거예요.』

냄비 들고 뛰기를 약 30여분.
숨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르는 않았다만 놀란 나머지 헐떡거리는 건 똑같았다. 거기다 당황해서는 어찌할 바 모르고 안절부절,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그런 제로스를 두고「무지 뜨거운 냄비를 들고 있었던 것 같더라」라고 입을 모았다. 얼마나 냄비가 뜨거웠으면 울며 불며 제자리에서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돌았겠느냐는 거였다.

『호오. 그래서 냄비는?』
『버렸죠.』
『어디다가?』
『쓰레기통에요.』
『그런데 뭐가 아쉬워서 스미스 요원과 붙는게 훨씬 더 나았을 거라는 거냐.』 
『아, 그게 말이죠. 덕분에 치안유지대 대원에게 잡혔거든요.』
『에?』

그러고보니... 리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귓동냥으로 들은 내용이 있다. 일부 마을에서는 일반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 그리고 재활용품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배출한다고 들었다. 만약 일반 쓰레기 속에 음식물 쓰레기를 몰래 섞어 버리다가 당국에 발각이 되면 엄청난 벌금이 부과된다. 어디 그뿐인가. 제대로 쓰레기도 못 버린다며 공개 망신을 당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환경문제에 유독 민감한 이웃집 아주머니들로부터「자랑스런 우리의 초록별 지구를 잘 알지도 못하는 외계인들의 손에 넘기려 하는」반역자 취급을 받게까지 된다.

이쯤해서 리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냄비와 (썩은) 스튜.
그럼 질문.
아녀자와는 달리 살림에 대한 지혜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신 우리의 단발머리 마족 님은 그 두 가지를 과연 어떤 쓰레기통에 집어 넣으셨을까요?

『어디다 넣긴요, 쓰레기통이었다니까요.』
어이구야, 제대로 분리하여 안 버렸다에 한 표. 리나는 가만히 실소했다.
『잡혀갈만 했네, 뭐.』
그렇다면 그 죄목은? 아마도 상한 음식물 쓰레기 무단 투기...

『동물학대 방지법 위반이었습니다.』
『뭐?』
리나는 정색하고 표정을 굳혔다. 잘못 듣지 않았다. 동물학대 방지법 위반? 비둘기 다리를 분지르거나, 강아지를 붙잡아 몽둥이로 때리거나, 토끼를 거꾸로 들어 천장에 매달거나, 고양이 꼬리에 불을 붙이는 그런 행위... 동물 학대라고?
말도 안된다. 쓰레기통에 냄비 채 (살인적으로 냄새가 나는) 스튜를 버리는 것과 앵무새 깃털을 모조리 뽑아버리는 행위가 언제부터 동격이었나?
제로스는 그 질문에 눈알을 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못 들은게 아니라... 진짜로 동물 학대?』
『예.』

문제는 예의 쓰레기통이 수거가 제 때 이루어지지 않아 그만 넘쳤다는 것이고,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정신 나간 얼룩무늬 도둑고양이 한 마리가 썩은 고기라도 감지덕지라며 겁도 없이 혀를 가져갔다는 것이다.

사흘을 내리 굶어 머리가 헤까닥 했다고 해도 말이다. 아아, 진짜로 무모했다.

고양이는... 폭발했다.

『뭐~셔?!』
리나는 팔을 뻗어 얼른 제로스의 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걸레짝처럼 비틀었다.
『너, 너, 너라는 놈은! 그런 걸 사람 먹으라고 들고 왔다는 거냣?!』
『쿠엘렉, 쿨렉! 저, 저라고 미리 알았던 건... 쿠엘렉! 저기!』
『죽엇! 이 미친 놈의 마족 시키! 뭐라구? 고양이가 폭발해?!』
『몰랐다니까요! 쿠얼럭!』
『나쁜 자식. 이 몸이 펑~ 하고 분해되면 기분 좋겠어?! 앙?!』
『저, 저기! 목을 잡고 비트는 건 좋은데 흔들진 말아줘요. 어, 어지럽다고요!』
『어지럽기만 해? 오냐. 내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더 비틀어주마. 죽엇! 죽엇!』
『우와악! 어지럽다니까요~!!』

산소가 떨어진다고 뇌사에 이르는 몸은 아니지만 역시 목이 졸리는 경험은 그리 달갑지가 않다. 한참만에야 겨우 풀려난 제로스는 기운이 죽 빠진 표정으로 흐느적댔다. 1초에 세번씩 머리가 좌우로 대롱거리는 경험을 15분간 지속해보자. 멀미난다. 제로스는 불가항력적으로 침대 모서리로 손을 짚었고... 이어 웩- 하고 헛구역질 했다.

『흥!』
그렇다고 마나님의 동정표를 구하기는 역부족.
리나는 펄펄 뛰며 동네방네 소리 질렀다.
『자알~ 체포되셨습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리나는 분한 나머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러지 말고 아예 바다 밑바닥으로 풍덩 가라앉혀 버렸으면 오죽 좋아!』
체포되어서 뭐. 어차피 벌금형으로 끝날 거잖아. 고양이가 폭발했다고 교수형에 처해지겠어, 아님 강제노역에 동원되겠어. 하마터면 도둑 고양이 대신 몸뚱아리가 박살날 뻔했던 리나는 참지 못하고 제로스의 엉덩이를 향해 킥을 날렸다.
『이 망할 놈의 자식. 체포당한게 그가 뭐가 대수냣!』

아직도 웩- 하고 멀미하던 마족은 그 발언에 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래봤자 벌금형이라니오, 리나 님.』
어두워진 밤 하늘의 빛깔로 그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보였다. 그리고 침묵했다.
『벌금 금화 3개?』
『아니오. 강제노역 사흘.』
『에~엑? 뭐가 그리 쎄.』

강제노역 사흘? 고양이 하나 잡았다고? 빵 하나 훔쳤다고 징역 15년? 장발장이냐?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리나는 어느새 제 위치로 돌아온 베개를 붙잡고 토닥토닥 손을 퉁겼다.
물론 동네에 따라서는 단순한 경범죄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심각한 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종교적인 이유로 쥐를 숭배하는 곳에서는 쥐덫 하나 잘못 놓았다간 밤늦게 강가로 끌려나가 밤새 물을 먹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를 신성시 하는 동네에서 소 잡아봐라. 목숨을 다하여 다른 주민들을 뒤로 하고 뛰어야할 것이다. 그러니까 때로는 비루먹은 고양이 한 마리에 사람 목숨 다섯이 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근방에서 고양이에 죽고 못 산다는 사람들을 만난 기억이 없다. 왕 같은 고양이? 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붕에 고양이 장식이 달린 건 구경 못했다. 도둑 고양이들에게 친절하게 먹이를 주는 사람도 없었다. 되려 빗자루를 쥐고 쫓아내는 건 봤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그거 말고 또 다른게 있었구먼?』
『있었죠.』

혹시 소액 민사 재판을 하는 법정에 한 번이라도 들어가본 적이 있으신지.
리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두 팔을 벌렸다.
『알다 마다. 재판장이라고 하면 연상되는 엄숙함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지.』
그렇다. 상상초월이다. 하얀 옷에 국적 불명 상투머리를 한 사내 여섯이 구석에 모여 앉아「왜 길거리에서 도를 믿으십니까- 하고 질문하는게 위법이라는 거지?」라며 불만을 토로한다. 한편으로는 낡아빠진 문서 한 장을 들고 나온 백발의 할아버지가「사기당해 뺑덕 어멈에게 집을 빼앗겼소」라며 울기만 한다. 이 와중에「네 놈이 내 돈을 떼먹고 무사할 줄 알았어?!」라며 고개를 숙인채 말싸움을 하는 중개상인 나으리들까지 등장한다. 판사는 피곤에 지쳐 방망이를 휘둘러대고, 사건번호 0000번 증인은 어서 앞으로~ 라며 쉰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댄다. 엄숙함? 진지함? 그리고 숙연함? 기대를 할 걸 기대하라. 그런 건 형사 재판에나 있다. 초 스피드로 오만가지 사건들이 한꺼번에 버무려지는 곳, 그런 곳이 민사 법정이다.

여기서 제로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평했다.
『별별 사람이 다 모이는 곳이잖아요. 덕분에 톡톡히 당하고 말았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외나무 다리에서 딱 마주친다는 속담이 그대로 들어맞더라니까요.』
『저어... 제로스? 그 속담은 어딘가가 잘못된 것 같은데. 원수를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거 아니었어?』
『하여간 당했다니까요. 그리고 거기엔 리나 님 책임이 커요.』
『울라? 내 책임이라니?』

투덜대며 의자에 앉아 자신의 이름이 불려질 차례를 기다리던 제로스는 누구보다도 가벼운 지갑을 들고 한숨을 쉬느라 바빴다. 지난 천 년간 획기적 수준의 판공비 인상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여 어깨에다 띠를 두르고 외치는 구호는 아끼고 절약하여 근근히 살아가자. 이런 마족에게 있어 과다한 범칙금 납부는 곧 활동의 위축을 의미했고, 나아가 임무 수행의 포기로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제로스는 머리를 쥐어잡고 끙끙거렸다. 그렇다고 상부로 가서「돈이 모자라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를 해보자. 수왕이「그러냐」하고 고개를 끄떡일 리는 없다. 최소한 채찍으로 얻어맞던가... 보드라운 깃털로 발바닥이 근질여질 것이다. 그녀 - 수왕은 무표정으로 화를 내는 성격이었다.
아니, 아니, 그 이전에!
그렇게도 먹고 싶었던 아이스크림도 참아가며 어렵게 모은 돈이다.
그 아까운 걸 벌금으로 죄다 날릴 거라고 생각하니 참았던 오열이 터져나오려 하였다.

푸웃 하고 리나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그래서 울었어?』
『울면 뭐해요, 누가 100원을 주기라도 한대요?』
운다고 해결된다면 진작에 울었다.
『그럼 거기서도 도망쳐보지 그랬어. 그거, 네 특기잖니. 줄행랑.』
특기라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분위기상 불가능할 때도 있는 거다.
『어휴. 사람 눈이 몇 개인데 도망칠 생각을 해요. 뒷일 생각은 하지도 않고 아스트랄 사이드로 달아나봐요. 귀신 나왔다며 심령물을 전문으로 하는 잡지사에서 자기네 기자를 수십 명 파견할 걸요.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제 모습을 고스란히 스케치한 그림이 신문 가판대 위에 올라올 것이고, 믿거나 말거나 제 이름이 전국 유명 유령 인명부에 올라서 우물 처녀 사다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법정 호러로...』
『잠깐 기다려. 어차피 그 얼굴은 가짜잖아. 다른 얼굴로 뜯어 고치고 살면 그만인데 뭐가 문제야? 가판대 위로 네 초상화가 올라온다고 큰 문제될 거 있어?』
리나의 지적에 제로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틀려요. 리나 님이 살아계실 동안엔 나는 다른 얼굴을 가진 모습으로의 육화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겁니다. 제로스는 당신이 죽을 때까지 이 얼굴 그대로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제로스의 표정이 다시 미묘하게 달라졌다.
리나 인버스, 당신이 죽으면 나는 가장 좋아하고 있는 그대의 얼굴로 육화할 겁니다.
물론 마지막 말은 쏙 빼먹고 그는 다시 웃었다. 다만 이번의 미소는 앞의 거와는 질이 틀렸는데, 전자가 부드러웠다면 후자는 비참했다.
제로스는 다시금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었다. 같은 얼굴로 오래 살아갈 거라는 맹세가 이런 식의 곤란함을 야기시킬 수도 있었다.
「이게 누구야!」
남들과 마찬가지로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불편한 얼굴로 재판 순서를 기다리던 남자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법정모독 및 제1급 중죄형 소란행위라는 건 새까맣게 잊어버린 채 제로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저 녀석! 내 음식점에서 땡전 한푼도 없이 무전취식하고 도망친 녀석이잖아!」

리나는 놀라움에 손뼉을 짝 쳤다.
『어머나. 이거 생각 밖이네? 너도 무전취식을 할 때가 다 있었니?』
『설마, 내가 그런 쪽팔리는 짓을 하겠수? 딱 부러지게 말해 무전취식은 리나 님이 하신 거잖아욧! 저야 단순하게 리나 님 뒤를 따라 달려나간 죄밖엔 없고요. 리나 님이 계산서는 나 몰라라 하고 달아날 적에 엉겹결에 엉거주춤 달려나간 단발머리 신관이 바로 나예요! 그런데 거두절미하고「무전취식한 녀석」이라 소리를 질러대다니!』

난 아니란 말이다-
무지 억울하다. 배가 뒤틀리도록 억울하다. 제로스는 지금 시간대가 새벽이라는 걸 무시하고 서럽게 울부짖었다. 따뜻하게 덥힌 우유와 토스트밖에 안 먹었는데! 졸지에 오무라이스 2인분, 함박 7인분, 모듬전골 4인분에다가 해물 스파게티 12인분, 감자탕 8인분에 카레 돈가스 10인분을 일시에 해치워버린 엽기적 식욕의 소유자로 몰려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그 많은 걸 먹고 나서 몰래 토껴버린 재수 무지 없는 녀석으로 낙인찍혔다. 법정 안의 모든 사람이 괴물 쳐다보듯 바라본 것이 생각났다. 하다못해 흰 옷에 상투를 튼 사이비 종교 신봉자들까지 손가락질을 했던 것이다.
『억울해요!』
왜 몰라주느냔 말이다. 분명히 그는 테이블 위로 우유값과 토스트 값을 남기고 떠났다.
『리나 님만 돈 안 내고 달아났잖아요오오오~ 그런데 왜 나를 잡느냐고요오오오~』

묻지마.
다쳐.

리나는 반대편 벽을 응시하며 짐짓 하품했다.
가끔은 사람을 착각하고 그럴 수도 있는게지. 뭘 그리 일일이 억울하다 하소연을. 떽.

『입장 바꾸고 생각해봐요. 그런 일이 닥치면 리나 님은 가만 있겠어요?』
『내가 왜 가만히 있냐. 드래곤 슬레이브라도 한 방 날렸지.』
『그것 봐요. 화낼 거잖아요.』

여기서 리나는 제로스의 어깨에 두 손을 떠억 얹었다. 그리고 얼굴을 부풀렸다.
『하지만 넌 마족이잖아. 네 놈이 나쁜 일을 당하는 건 그간의 업보가 큰 탓이예요. 나처럼 착하고, 순진하며, 베리베리 큐트한 소녀가 나쁜 일을 당하면 누구라도 분노를 하고 남쥐. 그치만 마족에게 닥친 나쁜 일이라는 건 순전히 인과응보일 뿐이란 말씀. 하여 너는 그저「하늘의 섭리라는 게 과연 있기는 있었구나」하고 고개만 끄덕이면 되어요. 화를 내긴 뭘 내. 그건 당연한 거야! 나쁜 놈은 벌을 받아야쥐.』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답디까!』

리나는 눈 똑바로 뜨고 제로스를 응시했다.
어디에 있긴.
여기에 있다.
당연한 거구먼. 그래서 강제노역 사흘? 괜찮았어, 괜찮아. 한 편의 멋진 법정 드라마였어.

『카가각! 하나도 멋있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를 죽인 죄로 잡혀와서는, 무전취식의 죄까지 덤탱이 쓰고, 마지막으로 할 말 있느냐는 판사에 말에「억울합니다!」라고 한마디 했더니만은,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없으니 가중처벌 하겠다는 말로 망치 땅땅땅! 제로스는 아악- 하는 표정으로 고꾸라졌다.

『거기다 어디서 강제노역을 했는 줄 아세요?! 말도 마요!』
『어디로 갔는데. 아오지 탄광에라도 끌려갔어?』

구체적인 대답 대신 제로스는 주머니에서 작고 하얀 조각 하나를 꺼네 리나에게 훌쩍 던져주었다. 엉겹결에 받아쥔 리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뿌연 흰 빛... 딱딱하다? 돌은 아니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표면이 맨질맨질한 것이 윤기가 좌르르 돌고 있다. 설마. 상아? 하지만 상아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리나는 조각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돌은 이 근방 마법상점에서 특산품으로 팔고 있는 진귀한 그. 물.건.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가격은 천문학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마법사들이 군침을 꼴깍꼴깍 집어 삼키는, 짠순이 리나마저 보따리로 패물을 싸들고와「하나 더!」를 외치게끔 만드는... 마법용 자료의 궁극이라 불리는 바로 그것!

『이거 혹시, 드래곤의 뼈 아니냐?』
제로스 역시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 그것도 골드 드래곤의 뼈입니다.』
『우왁! 마족이 골드 드래곤의 뼈를 캐러 갔다구?!』
『이후의 소동이 상상은 가시는지요.』

머리가 쭈삣 선다.
골드 드래곤과 제로스는 철천지 원수 사이이다. 항마전쟁 시기에 전멸에 가까울 정도로 그들 드래곤의 개체 수를 줄여버린 당사자가 바로 제로스다.
그런데 그 제로스가 골드 드래곤의 무덤으로 내려가 뼈를 캤다고? 리나는 공포에 질려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우와아아아~!! 드래곤의 원념이 튀어나와「네 이놈, 제로스으으~」하진 않았냐?!』
『소리만 질렀겠습니까. 아주 지진을 일으키던데요.』
『그러고도 남지! 너! 도대체 그런 곳에 왜 내려간 거얏!』
『내가 가고 싶어 갔느냐고요. 강제노역으로 끌려간 건데.』
『그렇다고 손가락만 빼물고 있었단 말이야?! 분위기 봐서 이건 아니다 싶으면 재빨리 드래곤 화석 캐기 대신에 화장실 청소 1년으로 바꾸면 안 되겠느냐 물었어야지!』
『그런다고 나에게 화장실 청소 시키겠어요?! 리나 님도 말 되는 말씀을 하세요!』

어라, 이 녀석. 지금 가만히 보자 하니까... 어이? 나에게 신경질 부리고 있으십니까?
『나두 화가 날 때가 있단 말예요~! 그게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어떻긴.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다시는 앞치마 걸치지 말아. 알겠어? 식칼 들고 설치지도 말아. 네 주제에 라면 끓일 생각일랑 100년은 접어. 마족이 무슨 요리를 하겠다구...
『어우야. 참으로 쌀쌀하십니다. 이런 나에게 위로는 안 해주시는 거예요?』
위로? 개뿔 같은 소리!

리나는 웃으면서 슈크림 봉지를 열었다.
마족에게 왜 위로가 필요하나. 어차피 마이너스 에너지로 살아가는 인생인데.
슈크림 하나를 꺼내 입에 넣었다. 밤새 차갑게 식었지만 맛은 좋았다.

『그래서. 내가 네 녀석 팔자에 뭐라고 위로를 해줄 거라 생각했었어? 제로스?』
마족은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다.
『사실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로스는 부스럭대며 뒷주머니에서 어연 팜플렛 하나를 꺼내들었다.
『제 기분이 영 엉망이어서 말이죠. 그래서 스트레스도 풀고 기분 전환도 할 겸 근처 온천에나 놀러갈건데 이건 동행해주지 않으실까 하고 생각은 했죠.』

오오옷?
리나의 눈이 벌어졌다.

『온천?』
『이미 예약은 해두었습니다.』
『나, 돈 내야해?』
『몸만 오시면 됩니다.』

럭키-

『간다~♡』
『그렇군요.』
『언제 출발이야?』
『아침 8시입니다. 모시러 오죠.』
『약속했다? 도중에 말 바꾸기 없기!』
『그건 이쪽에서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도장밥 찍었다.
제로스는 답지 않은 얼굴로 음습하게 씨익 웃고 사라졌다.

음?
찜찜하다?

그제야 리나는 팜플렛으로 시선을 돌렸다.
- 전통의 노천탕
나쁘진 않은데 말이지. 그런데 그림이...
- 가족과 오붓하게 즐기세요. 남녀혼욕 전문입니다.

리나는 컥- 하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