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 열 - 성지를 순례하는 3인조 3

『뭐가 지나가요? 아, 이런 거 말인가요?』
제로스의 눈동자가 옆으로 또록 굴러갔다.
하여 리카익도 알아차렸다. 작은 눈송이처럼 살랑 흔들린다. 허공에서 작은 빛의 덩어리가 춤추며 내려왔다.
빛의 눈송이다. 환호성을 지르며 펄쩍 뛰어오른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예쁘다!! 빛의 정령 룬카세이 아냐?! 꺄악, 이렇게 실제로 보는 건 머리에 털 나고부턴 생전 처음이야. 엄마야, 너무 좋아! 반딧불보다 더 예뻐!』
저걸 좀 보라며 제로스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겼다.
덕분에 옷이 멍망이 되었지만 그는 화내지 않았다. 대신 하염없이 흔들리며「네, 네. 나도 보고 있어요.」라는 말만 차분히 반복했다.
『우와아! 외롭고 쓸쓸한 곳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저런 것이 있었군!』
심지어 바르테일러조차 모든 악감정을 다 잊어버린 채 눈 맞은 강아지처럼 펄쩍 뛰었다. 눈 맞은 강아지처럼 빛나는 함박 눈을 잡으려 난리쳤다. 꼬리라도 달렸으면 마구 흔들었다.

『외롭고 쓸쓸한 곳? 농담도. 이곳은 신과 마의 힘이 공존하는 세계의 특이점이라 별 놈의 것들이 한꺼번에 죄다 몰려든다고요. 외로울 틈이 없죠.』
빛의 정령 룬카세이를 무슨 날파리인양 쫓아내면서 제로스는 싸늘하게 말했다.
『신족과 마족은 기본이고 가끔씩 성질 더러운 인간이 등장하는데다가 정령은 양념으로... 그리고 때로는 구제불능의 떨거지들까지 죄다 나타나곤 하죠. 바로 저렇게요.』

모험가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 하는 1순위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가장 꺼려하는 곳.
제로스가 손가락질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을 적에 리카익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흠뻑 젖은 털복숭이가 어둠 속에서 뭉글뭉글 움직인다. 기분 나쁘게 단체로 목을 울어댄다. 무리가 움직일 적마다 쉬어빠진 빵에 끼어넣은 썩은 소시지 냄새가 났다.
저게 그냥 길을 지나가던 길의 야생 소떼라면 얼마나 좋겠랴만은... 쉬피드에게 맹세코 그런 일은 결단코 있을 수가 없다.
맙소사, 브라스 데몬이다. 그것도 떼거리다!

모래밖에 없는 들판에서 그들을 피해 무사히 비껴갈 수 있는 확률은 얼마나 될까.
리카익은 되지도 않는 머리로 확률을 계산하다가 중도에 그냥 포기했다. 아홉에 다시 여덟을 더하라면 더했지 곱셈에 나눗셈이 들어간 복잡한 계산은 능력 밖이다.
게다가 천둥 치는 짐승의 울음은 저편이 아니라 이편에서 들렸다.

『핫핫핫! 쌈질이다! 리카익? 저길 좀 봐. 야생 브라스 데몬이 가득이야. 핫핫핫!』
단지 싸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대 만족이라는 구제불능의 반항아는 이게 웬 떡이냐는 시늉을 해 보이며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자신이 내지른 커다란 탄성 소리에 브라스 데몬들이 더욱 흥분했다는 건 염두에도 두지 않는 눈치다. 데몬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면 오히려 환영이다.
리카익은 손바닥으로 식은 땀이 송글 맺힌 이마를 쓸어내렸다.
녀석의 취미는 일부러 마물들을 찾아가 사냥하는 것이다. 도∼오∼망? 나폴레옹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가 삭제되어 있었듯이, 바르테일러의 국어사전은 도망이란 단어가 지워져 있는 불량품이었다.「때와 장소를 가려 싸움할 장소를 찾는다」는 모험가들의 격언도 없었을 뿐더러,「여차하면 다 죽여버린다」라는 수식어가 쓸데없이 앞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테일러의 불량품 사전이었다.

『난 못살아...』
『못살긴 뭘 못살어, 리카익. 어서 싸우자니까!』

뭐하고 있느냐며 리카익의 손을 끌어당겼다.
하는 수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채 태세를 갖추었다. 싸움이라면 딱 질색이라던 제로스야 두말없이 바위 틈새로 몸을 숨겼지만 리카익은 그럴 수가 없다. 15살이 되던 해에 악마에게 잡아 먹히게 될 거라는 자신의 서글픈 팔자를 바꿔보겠노라며 죽도록 힘을 기르는 중이었고, 최강의 전사임을 보증해 준다던 그놈의 정부 보증 [드래곤 슬레이어] 수입인지 딱지를 어깨죽지 위에 멋지게 붙여 보겠다고 아버지와 손가락 걸고 약속했다. 그때까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기로 맹세하지 않았더냐.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 한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야 굴뚝이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굴한다면 운명의 여신을 상대로 싸움을 벌일 수 없다.

침을 뱉고 적장해 보이는 이상한 질감의 몽둥이를 얼른 집어들었다. 시험삼아 휘둘러보니 느낌이 제법 괜찮다. 석화된 나무 줄기가 아닐까 싶다. 빛깔도 허연 것이 그런 추측을 가능케 했다. 길이도 적당하고 손아귀에 찰싹 붙는 감촉도 마음에 든다. 몽둥이 찜질을 한바탕 해주기엔 더도 말고 안성맞춤이었다.
몽둥이를 쥔 손가락을 다시 한 번 폈다 접었다. 어깨의 근육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부풀어 올랐다. 그녀는 벌목 일을 하던 아버지를 빼어 닮아 팔뚝 힘 하나는 여느 장정 부럽지 않도록 막강하게 생겨 먹은 특이 체질의 소유자다. 객관적으로 봐도 지금의 리카익은 그럭저럭 용사 종류 비스므리하게는 보였다. 최소한 제 앞가림은 하게 생겼다.

『준비 완료 되었냐, 리카익?』
『준비가 되지 않았어도 할 거잖아.』
『물론 하고 말고. 그럼 간닷.』

바르테일러는 알라에게 기도하는 광신도처럼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기분이 좋아 입이 찢어졌다. 무어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지긋이 눈을 감았다. 쩡 하면서 공기가 크게 원을 그리며 둥글게 돌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작은 불꽃들이 생일 축하용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이 불길하기 짝이 없는 현상들이 뭘 뜻하는 것인지 익히 잘 알고 있던 리카익은 무릎을 굽혀 얼른 자세를 낮췄다. 엉뚱한 벼락을 맞아 머리가 날아가면 그건 억울하다.

『위대한 자연의 숨결이여, 부드러운 바람의 숨이여, 호흡이여. 나의 의지를 받들어 모두와 함께 춤을 추자.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발광하자구~♡ 아이고, 좋은 것!』

괜찮은 먹잇감을 발견했다며 브라스 데몬 또한 아가리를 벌렸다. 콧김을 내뿜으며 홍염의 불꽃을 토해냈다. 삼류라고는 해도 마족은 마족, 떨거지라고는 해도 괴물은 괴물. 화이어볼을 능가하는 뜨거운 불꽃의 덩어리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조심해, 바르테일러! 통닭구이용 불꽃이 네 정면으로 날아오고 있어!』
『아이고∼, 걱정도 팔자셔. 왜? 머리카락이라도 태울까봐서?』

콧방귀를 뀌며 바르테일러가 팔을 앞으로 힘차게 내질렀다.
폭발음이 들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바르테일러가 만들어낸 바람의 줄기는 브라스 데몬들이 토해낸 불꽃을 삼키고도 모질라 성지의 메마른 흙바닥을 날카롭게 할퀴며 곧장 괴물들의 면상을 향하여 돌격했다.
길죽한 자상이 생겨났다. 날카로운 검날에 베이기라도 한 것처럼 브라스 데몬의 몸으로 붉은 줄이 그어졌다. 검정이 섞인 핑크빛의 피 안개가 허공으로 피어올랐다.

『Go, Go! 날아라, 리카익!』
『알았음!』

바르테일러가 보낸 신호와 함께 리카익은 대지를 박차고 흔쾌히 날아 올랐다.
서커스의 광대처럼 재주넘기를 해보이며 몽둥이를 똑바로 세운 채 브라스 데몬의 머리통 위로 수직 낙하했다.
제로스는 이걸 가리켜「똑바로 날아 이마 깨기」라는 지독하게 평범한 이름을 붙여 놓았지만... 왕실 기사단장도 감히 흉내 내지 못한다는 데몬 프린세스 파우라다. 이 기술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정확한 판단력과 속도, 그리고 그 어떤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강대한 담력이 필요하다. 정면 공격은 공격인데 그게 정수리 위에서부터 가해지는 공격이다. 그 위력이 대단한 만큼 실패했을 적의 위험성은 상상 초월이다. 왜냐고? 공격시 두 다리가 땅에 안 붙어 있으니까. 공중에 붕 떠있는 상황에선 2차 동작은 대단히 힘들다. 프린세스 파우라는 방어를 포기한, 철저한 공격 위주의 기술이다. 속칭 자멸 검법. 안되면 걍 죽으면 되지 스타일이라 할 수 있다.

『이야압!』
와그작 소리가 정겹다. 몽둥이와 부킹한 괴물의 머리통이 깨지면서 양 옆으로 활짝 벌어졌다.
앞으로 벌컥벌컥 쏟아져 내리는 내용물을 피해 비스듬히 넘어지는 브라스 데몬의 어깨를 밟았다. 하여 다시 뒤로 점프! 재주넘기하며 발차기하여 데몬 둘을 추가로 더 날려보냈다.

남의 집에 불 났다며 멀직히 싸움 구경을 하던 제로스가 귀부인처럼 우아하게 박수를 쳤다.
『브라보∼♡ 멋있어요, 리카익. 드래곤의 뼈로 정말이지 확실하게 날려보내는군요.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자기 멋쟁이∼♡』

음? 드래곤의 뼈라니.
불길함을 느끼며 리카익이 뒤쪽을 흘끔거렸다.
그런게 어디 있다고 그래.

『어디에 있긴요. 바로 리카익이 들고 있는 거 말예요. 드래곤의 손가락 뼈 같은데요? 그렇죠, 바르테일러. 내 말이 맞지요? 아무리 봐도 당신 동족의 뼉따구 같은데.』
『말 붙이지 마, 땡중. 나 지금 한창 바쁜 거 안보여?』
야생 브라스 데몬들과 한 덩이가 되어 주먹질에 바쁜 바르테일러는 당연히 짜증부터 냈다.
맨 주먹으로 데몬들을 때린다는 것 부터가 상식 밖이다. 그런데 틈새가 보인다 싶으면 짧은 작열음을 내며 발길질을 명중시켰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질 않았는지 갈기갈기 찢겨진 상처 자리를 손으로 잡아뜯었다. 괴물들이 오히려 공포에 질려 어색한 발걸음으로 뒷걸음질 칠 정도이니 말은 다했다.
가슴과 복부, 그리고 목 한가운데를 정통으로 얻어맞은 데몬 하나가 신음소리를 내며 설설 기었다.
그걸 보고도 추호도 용서 못한다는 식으로 등짝을 마구 밟았다.

『테일러. 테일러...!!』
그가 괴물을 무식하게 때려 잡든 말든. 리카익의 관심은 그게 아니었다.
『이거... 나... 이, 이거! 이 몽둥이!』
『젠장. 귀찮아 죽겠구마. 손가락 뼈 맞아. 드래곤의 뼈. 그게 어때서.』
숨을 고르던 바르테일러는「대답했으니 이제 됐지?」라는 표정을 짓곤 다시 데몬 때리기에 열중했다. 왼주먹, 오른주먹. 순수한 폭력에 취해 돌아볼 생각도 안 한다.

그런데 그 바르테일러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다.
흥분한 리카익 가브리에프다.
『지, 징그러워! 드래곤의 뼈... 뼈!』
날카로운 비명이 귓청을 찢었다. 실수로 손바닥에 3도 화상이라도 입었나보다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면 고압 전류에 감전되었다? 바들바들 떨면서 손에 잡고 있던 몽둥이, 정확한 용어로 말하자면 블랙 드래곤의 검지손가락 기절골을 허공을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꺄아아아~!! 누가 어떻게 좀 해줘! 내가 드래곤의 뼈를 만졌다구우우! 손바닥이 썩는다아~!!』
하얀 뼈는 고속으로 회전하면서 바르테일러의 뒷통수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따아악. 홈런이다. 아니, 사구인가.
누런 흙먼지를 일으키며 쿵 소리와 함께 바르테일러가 넘어졌다.

『썩긴... 뭐가 썩냐... 인석아.』
사나이가 흘리는 비탄의 눈물이 사막을 적혔다. 돌 맞고 기절한 멧돼지 앞에서 인디언은 춤 추고 있지, 거기다 양념으로 제로스는 코웃음을 치고 있다. 바르테일러는 전의를 깨끗하게 상실했다. 내부 분열을 틈타 데몬들이 절둑거리는 발걸음으로 줄행랑을 치든 말든, 지금으로서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두툼하게 부어오른 뒷통수를 만지작거리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잘은 몰라도 내일 이맘때쯤이면 두 배로 부풀어 오를 것은 뻔했다. 보통의 인간이었으면 진작에 머리가 깨졌다. 과연, 엄지손가락 하나로 못질을 해낸다던 유명한 천하장사의 핏줄이다. 새삼 핏기가 가셨다.

『알고 계십니까. 당신이 죽으면 리카익은 소원대로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 겁니다.』
『그딴 농담, 하나도 안 우스워.』
『어라. 재미 있으라고 한 얘기 아닌데.』
그럼 나더러 얌전히 살해당하라는 거냐.
세로로 길죽하게 찢어진 바르테일러의 눈동자가 한층 더 좁아졌다.

저녁이 지나 이미 밤이 시작되었건만 성지는 여전히 못말리는 3인의 순례자 탓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활기에 젖어 있었다.



♠ 파편 열 하나 - 엥그라포

커다란 구덩이가 곳곳에 그 시커먼 입을 벌려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사람의 인기척은 그 어디에서고 간에 들리지 않는다... 인가가 밀집된 곳으로부터 겨우 세 시간 걸었을 뿐인데 풍경이 확 달라졌다. 소름 끼치도록 갈갈이 찢겨진 건물의 잔해는 오랜 세월동안 방치해둔 탓에 작은 바람에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이렇게 흉물스런 전쟁의 상흔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건 국가에서 쥐꼬리만한 예산을 핑계 삼아 붕괴 조짐이 확실한 건물들의 잔해를 철거하길 거부한 탓이다.
못되먹은 놈들. 세금은 지 호주머니에 작작 처넣느라 정작 필요한 부분에 쓸 돈은 없다고 언제나 불평이었다.
《세월이 모든 것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망할 놈의 장관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렇게 선언해버렸다.
물론 그의 말은 궁극적으로 틀리진 않다. 허나 세금 꼬박꼬박 내는 사람 입장에선 듣기 싫은, 괘씸한 발언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쨌거나 마도사들이 집중적으로 드래곤 슬레이브를 퍼부운 끝에 깡그리 멸망해버린 구도시를 폐쇄한지 올해로 만 4년.
신의 섭리였을까? 비바람과 폭풍이라는 자연의 거대 에너지가 구도시의 쓰레기들을 서서히 치워나가기 시작했다. 아울러 신도시의 빈민들이 슬금슬금 옛 주거지로 모여들면서 망짝이 난 거리는 야금야금 정돈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더딘 속도였지만 맑은 물 속에 떨어진 검정색 잉크 한 방울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확실했다. 무너질 것이 다 무너지고... 그래도 가끔씩 쿠궁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버텨오던 바윗덩이가 허공을 가르며 대지를 강타하지만... 어쨌든 4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은 구도시 지역에도 사람이 지나다닐 길 다운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전쟁 종결 직전에 용병들이 작전을 위해 깨끗하게 치워둔 진입로의 계단참을 두 계단씩 밟아 올라가며 소년은 숨을 헐떡거렸다. 약 10분동안 미친 듯이 전력 질주로 달린 탓에 다리는 천근 만근 무거웠고 머리는 윙윙거렸다. 언덕을 오르고 장애물을 뛰어넘었다. 여기저기 다리 근육이 당기면서 타는 듯한 격렬한 통증을 호소했다. 폐는 차가운 공기를 요구하며 부풀어 갈비뼈를 압박했다. 심장은 지나치게 쿵쾅거렸고 체온은 뜨거웠다.
그러나 소년은 달리는 속도를 늦추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직 탈수 현상은 일으키고 있지 않다. 체온이 높으면 어떠냐. 내리막길을 달리고, 가루가 된 건물들의 잔해 사이를 비집고... 죽어버린 도시는 그를 껴안았다. 폭삭 무너질 것처럼 보이는 말라 죽은 나무들의 숲이 소년을 포위했다.

묘지는... 무덤은... 아아.
감히 살아서 이곳을 방문한 자들은 천벌 받아라.

뼈대만 남은 마을은 을씨년스러웠다.
소년은 잠시나마 발걸음을 늦추고 바람에 묻어나는 죽음을 감상했다.
주위를 에워싼 나무들은 모두 말라 조금만 만져도 보풀이 가시처럼 일어났다. 쓰레기들과 함께 산을 이루고 있는 마른 풀잎 더미에선 엄청난 열기와 함께 죽은 동물에게서 나는 것과 비슷한 역겨운 냄새가 풍겨왔다. 어쩌면 가까운 곳에 들개라도 죽어 널부러져 있는 지 모르겠다. 개가 아니라면 고양이나 쥐, 또는 죽은 지 오래된 사람 시체라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송장 썩는 냄새였다.
그렇다. 이 냄새는 새끼를 낳으려고 애를 쓰다가 절명해버린 고양이가 해골로 변해갈 때의 냄새, 길거리에서 굶어죽은 개가 하나의 보풀덩이로 사그러질 때의 냄새, 얼음이 떨어진 냉동실에서 쇠고기가 썩어갈 때의 냄새였다.

냄새에 반응, 소년은 썩어 문드러진 나무 기둥을 부둥켜 안고 구역질부터 했다. 그러나 생난리를 치며 헛구역질만 몇 번 했을 뿐 나오는 것은 없었다. 하루종일 먹은 것이라곤 눅진해진 비스킷 몇 조각과 김 빠진 레몬 티가 전부다. 기껏 나오는 거라고는 가래 섞인 물컹한 액체 뿐이었다.

더러워진 입가를 손으로 대충 문질러 닦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봤다.
소리라곤 어디에서고 들리지 않았다.
비바람에 넘어진 기둥들의 잔해를 피해 이리저리 걸으면서 소년은 오래된 유적을 조사하는 고고학자라도 된 듯한 다소 낭만적인 착각에 빠져들었다. 구역질나는 쥐똥 냄새가 나는 것도 그렇고 풍화된 석탑들도 그렇고 주변에 널린 것들이 다 오래된 왕들의 무덤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유감스럽게도 발뿌리에 걸리는 것들은 목이 부러진 천사 조각이나 날개 달린 사자의 파편 따위가 아니다. 귀찮을 정도로 발자락에 걸리는 것들은 낭만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생활 쓰레기였다. 종이나 옷, 아니면 생선 뼈 같은...
그러고보면 참 희한한 일이다. 쓰레기들은 항상 발목 높이까지만 덮고 무릎 이상으로 차오르는 일이 없다. 치우는 사람도 없건만 언제나 그래왔다. 어디를 가도 그랬다.

『죽은 자들의 땅에 무슨 일인가. 망자의 땅에 왜 살아 있는 몸으로 왔지?』
순간 말라 빠진 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그림자 하나가 때 아닌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낮잠이라도 자고 있었던 것 같다. 잠이 확 달아난 얼굴엔 눈곱이 덕지덕지 달라 붙었다.

덩달아 놀란 소년도 동그랗게 떠진 눈을 깜빡거렸다.
묘지에 거지가 살고 있다? 대서양의 홀로 남은 섬에서 살아 남은 로빈슨 쿠르소?
자세히 뜯어 보니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좀 어려웠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좀비 같은 눈을 갖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자라난 은회색의 머리카락과 수염은 통제 불능의 밀림처럼 온통 얼굴을 뒤덮었다. 오래된 피부병 탓에 노인의 두 다리는 온통 부스럼 투성이다. 덧난 상처에선 썩는 악취가 났다. 헤어진 바짓단에 하얀 구더기가 붙어 있다.

안스럽다는 따위의 사치스런 감정 때문이 아니라 그저 싫어서 소년은 노인을 외면했다.
『남 말 하고 있네. 그러는 당신은. 당신도 아직 죽진 않았잖아. 그게 아니라면 내가 지금 귀신을 보고 있는 건가?』
『나야 이미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니까 상관 없지. 하지만 자넬 보아하니 땟깔이 고운 것이 수백 년은 더 넘게 살겠구먼.』
『내가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보이나.』
『겉 가죽은. 하지만 속은 그냥 죽어버렸군. 내 말이 맞지?』

소년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들썩거리며 뾰로퉁한 표정을 지었다.
노인 역시 길게 하품을 하고 난 뒤에 군소리 없이 자리에 도로 드러누웠다. 발을 대자로 뻗고 눕자 이제 노인은 인간이기 보다는 원래부터 거기에 놓여져 있던 자연 그대로의 커다란 바위처럼 보였다.

『어린 녀석아. 그만 가거라. 여긴 살아 있는 사람이 올 곳이 아냐. 여기선 벌건 대낮에도 길 잃은 유령이 나온다. 이승과 저승이 같이 공존하는 이상한 장소라고. 죽음의 세계에 한쪽 발을 집어 넣은 나라면 또 모를까, 젊은이는 썩 물러가게. 안 그러면 나쁜 유령에게 홀릴거야.』

눅진한 바람이 한바탕 불면서 소년의 하얀 망토가 펄럭였다.
『죽은 자들이 출몰하는 땅이라니. 바로 내가 찾던 장소야.』
『이봐. 난 농담한 거 아냐. 그렇게 히죽 웃기만 하면 어떻게 하나. 지금 자네 어깨 위로 피투성이 여자의 손이 보이는데도 웃을 건가?』

아아, 천국에 가지 못하도록 매일 밤 빌어.
기뻐하라, 그녀는 아직 이 땅에 남았음이다.

『웃고 말고. 기절하도록 기뻐할 거요.』
그렇게 대답하고 소년은 달을 등지고 심호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