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 열 - 성지를 순례하는 3인조 1

『핫핫핫! 왔노라, 보았노라, 확실하게 밟았노라.』
벽돌 색의 짧은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쓸어 넘겼다. 원래 생김새 자체가 애띈 모습인데다 너무나 행복한 듯이 웃고 있어 원래 자기 나이보다 두 살은 더 어려 보인다. 어른을 흉내내며 - 정확하게는 담배 찐내가 진동하는 베테랑 모험가를 흉내내며 근처 바위 위에 한쪽 다리를 척 올렸어도 철부지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 어쩔 수 없다.
최소한 헤프게 웃지만 않았어도 분이기 짱인데.
감정 조절이 영 안 된다는 점에서도 애다.

흥분으로 인해 머리카락이 쭈삣 섰다. 두렵다는 생각과 설레인다는 감정이 날줄과 씨줄처럼 서로 복잡하게 얽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가로 멍청이 같은 웃음 소리가 실실 새어나왔다.
소년은 손가락을 번쩍 들어 풍부한 색으로 얼룩진 지평선을 냅다 가리켰다.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한 한니발 장군처럼 기합을 넣었다. 밤새워 필사적으로 연습한 정복자의 포즈다. 적갈색 눈동자엔 색색의 별똥별이 가득찼다.

「아버지. 당신의 하나뿐인 딸... 이 아니라 아들 리카익은 모험가들이라면 반드시 방문하고 싶어한다던 위대한 성지의 흙을 드디어 밟았습니다. 오, 아버지! 15살이 되는 해에 악마에게 잡아 먹힐 팔자를 타고 태어났다던 당신의 리카익은 이제 어엿한 모험가로 굳건하게 성장했다구요!」

웅변대회에 나간 초보 정치가처럼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대지를 포옹한다.
세게는 내 품안에! 모험도 내 손아귀에!
그러나 어서 꿈 깨라는 식으로 사막의 뜨거운 바람이 휘이잉 몰아쳤고...
소년은 싫든 좋든 현실을 직시했다. 누런 흙먼지가 그 머리 위로 소복히 내려 앉았다.

자, 그럼 손으로 나팔을 만들고 악을 써보자.
『무슨 놈의 성지가 이렇게 생겨 먹었냐?!』
생겨 먹었냐∼, 생겨 먹었냐∼!! 아련하게 메아리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환상이 깨지고 난 다음의 풍경은 지나치게 잔인했다.
뜨거운 한 낮의 열기는 고스란히 남아 남의 귀한 살갗을 이글이글 볶아댔다. 녹은 신발 밑창이 쩍쩍 소리를 내었다. 이래가지고는 파리잡이 끈끈이에 달라붙은 파리 신세다. 어디 그뿐이냐. 지상 위로 부는 바람은 폐까지 요리할 정도로 그 위력이 막강한 것이었다. 녹아내린 마그마가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삭막한 지표면을 뚫고 마구 불어닥치는 듯하다.
한증탕에, 삼계탕. 지옥 유황탕.
이래가지고는 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리카익은 자신이 무슨 거북이라고 목을 어깨춤으로 집어 넣고 물끄러미 하늘이나 바라보았다.
저 높은 곳으로 누런 담요처럼 보이는 거대한 먼지 구름이 펼쳐져 있다. 먼지는 이미 확실한 존재감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휘감았다. 덕분에 반경 20㎞ 주변은 노란색의 젤리를 뒤집어 쓰기라도 한 몰골이다.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면 십중팔구 음푹 패이는 자국이 생길 것이다.

《성지를 밟긴 뭘 밞아... 똥이나 밟았어.》

자조적인 말투로 혼잣말을 하면 누군가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좋아질 수도 있다... 즉, 다시 말해 그 말은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다.
리카익 가브리에프의 경우는 후자 쪽이었다.
처절하다고 말하면 딱 어울릴만한 실망감이 소년의 가슴을 후려쳤다. 그것은 아주 더딘 속도였지만 맑은 물 속에 떨어진 검정색 잉크 한 방울이 퍼져 나가는 것처럼 확실하게 리카익을 지배했다.

『이봐, 거기 있는 언니들. 나에게 뭐 할 말 없나.』
소년은 자신을 꼬드껴서 성지로 데리고 온 두 사람을 향해 힐난과 비난의 눈초리로 보냈다.
한 명은 낡아빠진 누런 가죽 가방을 어깨에 걸친, 통풍 하나는 끝내주게 생긴 헐렁헐렁한 디자인의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는 청색의 몸빼 바지에다가 낡아서 솔기가 터진 흰색의 어린이용 셔츠를 걸친 코흘리개 꼬맹이었다.

검은색 사제복의 청년의 이름은 제로스다. 제스라는 애칭을 쓰는 일도 있다. 번갈아가며 제로스와 제스, 두 이름을 사용한다. 본명은 둘 다 아닌 것 같다. 자칭 수수께끼의 파행 사제로 소속된 신전은 딱히 없다. 본인은 늑대의 섬 출신이라 주장하는데 이것도 거짓말일 가능성이 88%다. 최신판 대륙지도 어디에도「늑대의 섬」이란 지명이 안 나타나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정체가 의심스런 땡중.
사물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편으로 지금도 좁은 바위 틈 사이로 얼핏 지나가는 생물체를 관찰하느라 리카익이 쏘아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보아하니 근처에 집을 짓고 사는 도마뱀을 구경하고 있는 듯하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계집애 뺨치도록 예쁘장하게 생긴 낯짝으로 생글생글 웃느라 바쁘다. 좀 더 자세히 본답시며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 올리고서 바위에 달라붙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놈의 잘난 엉덩짝을 빨랫방망이로 먼지가 휘날리도록 신나게 후려갈겼으면 소원이 없을 정도다. (으드윽!)

그 반대편에선 바르테일러가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가 어른 주먹 크기의 녹색 구슬을 들고 나침반인양 이리저리 흔들어보고 있다. 바늘이 달린 것도 아니건만 열심히 보느라 바쁘다.
국가 공인 반항아답게 표정이 무척이나 심각하다. 흡사 변비에라도 걸린 사람 같다. 변비가 아니라면 치질이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다시 감는다. 코도 킁킁거린다.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려는 듯이 발돋음까지 하고 초조하게 사방을 살폈다. 새벽 3시에 갑자기 과자 타령을 하며 아우성을 쳤을 때처럼 그 표정이 안타까움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용서 못한다)

『이봐, 언니들!』
리카익은 약이 올라 한층 더 악을 썼다.

그러든 말든, 제로스는 바르테일러를 향해 살살 손을 흔들었다.
『거기서 그러고 있지만 말고 이리 내려와서 요걸 좀 보세요, 테일러씨. 그렇게 높은 곳에 기어올라가 먼 곳을 살필 필요도 없네요. 여기에 당신이 그렇게도 애타게 찾고 있다던 동족이 살금살금 지나가고 있다고요. 아이, 빨리 와서 구경 좀 해요. 네? 놓치면 평생 후회하지∼♡』
바위 위를 기어가다 낯선 인기척에 반응, 놀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사막 왕방울 줄무늬 도마뱀을 손가락질하며 땡중은 좋아라 했다.
『크아악!! 망할 놈!』
당연한 결과였다. 바르테일러는 두말하면 잔소리라며 그대로 바위 위에서 스카이 점프, 2단 발차기로 제로스의 얼굴을 한 방에 날려버렸다.
국가 공인 불량 청소년의, 사정 안 봐주기 발차기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제로스가 넘어졌다.
『이봐, 땡중. 내 누누히 강조해서 말했지!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드래곤이야, 드래곤!』

간신히 무릎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운 제로스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드래곤이나 도마뱀이나! 둘 다 파충류 맞잖아요! 아이, 아파!』
『파충류 같은 소리하고 앉았군. 제로스? 말이 너무 지나쳐. 목숨은 하나 뿐이야. 그걸 잊지 마.』
국가 공인 깡패의 참 맛을 보여주마. 바르테일러는 살기를 내뿜으며 눈을 부라렸다. 여차하면 또 때리겠다며 주먹을 위로 치켜 올렸다.
문제는 저게 허세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때리는 시늉만 하는게 아니라 진짜 때린다. 바르테일러의 법칙에 의하자면 진정한 위협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으앙!! 리카익님. 바르테일러가 당신의 애인을 마구 때리려고 해용∼!!』
『칵! 누가 누구의 애인이냐. 입 찢어지기 싫으면 똑바로 말해, 이 파문당한 변태 호모 사제야!』
『리카익님, 도와주세용, 테일러가 우리의 러브러브를 질투해요!』

맞기는 싫었던 것 같다. 제로스는 짐짓 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리카익은 그 악질적인 장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징징 우는 척 하면서 눈가에 침 발라대는 걸 누가 모를 줄 알고!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대며 한숨만 쉬었다.
자고로 애들 싸움에 어른(?)이 끼어들면 더 복잡해진다. 이럴 적엔 거리를 두고 중립의 위치를 고수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에잇, 테일러씨.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죠. 엔션트 드래곤은 이미 오래 전에 멸종했다고요.』
『그런 섭섭한 말을! 난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잖냐. 멸종했다니! 말은 똑바로 하라고 입이 달려있는 거야! 이 바보 멍청이 바퀴벌레야!』
『바, 바퀴벌레!! 정말이지 새끼 파충류가 어른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호오∼. 파충류. 그것도 새끼 파충류?! 너, 진짜 죽었다. 해보잣!』

애들 싸움이 육탄전으로 발전했다. 분노한 바르테일러가 번쩍이는 이빨을 세웠다.
리카익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물려본 사람은 안다. 저거, 무지 아프다.
『미친 개! 떨어졋, 떨어졋~!!』
팔뚝을 물린 제로스가 놀라 자기 팔을 황급히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도 찰거머리처럼 안 떨어진다. 오히려 이빨 자국만 더 선명해졌다.
『으아아악~!!』
견디다 못해 바르테일러의 약점 - 귀를 잡아당겼다.
귀는 소년의 급소이다. 효과는 탁월해서 바르테일러는 당장 물었던 것을 놓고 콩 튀듯 뛰었다.

『뭐하는 짓이야!! 우리들 드래곤은 귀가 무진장 약하단 말이다! 히익!! 간지러! 이 마족 같은 놈아, 당장 그만 둬! 히이익!!』
『마족 같은 놈이 아니라 전 어엿한 마족입니다... 테일러씨.』
제로스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테일러의 귓구멍 속에 손가락을 집어 넣었다.
『히잇, 히잇!』
간지럼에 찌릿찌릿함이 엉망으로 뒤섞여 소년은 자지러졌다.
얼굴을 보자. 녹색의 찐빵이다.
어떻게 보면 성적인 쾌감으로 제정신을 잃은 것처럼도 보여 똑바로 보기가 민망해진다.
『그만! 음산하게 목, 목소리 깐다고 마, 마족이냐? 히이익! 네가 마족이면 난 시바의 여왕이다!』
『시바의 여왕? 방금 전까지는 엔션트 드래곤이라고 했잖아요, 거짓말쟁이!』
『거짓말 아니다. 난 앤션트 드래곤이야.』
『그럼 시바의 여왕은?』
『그거야 비유법이지! 넌 초등학교도 못 나왔냐, 아님 유치원도 구경 못 했냐!』

이봐요, 언니들 - 이라고 두 사람을 부르려다 말고 리카익은 포기했다.
서로 뒤엉켜 바닥을 뒹굴고 있다. 흡사 성질 드러운 닭들이 홰치며 싸우는 것 같다.
《대단치도 않군. 잘한다, 잘해. 잘들 논다. 너희들끼리 잘 살아라!》
속으로 그렇게 저주하며 몸을 빙글 돌렸다.

어느 틈엔가 구름이 잔뜩 낀 누런 하늘엔 한가닥 어둠이 스며들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벌써 해가 질 무렵이었다. 태양이 서산 아래로 기울어지면서 한 순간의 색채 마법을 부려댔다. 주변에 흩어져 있는 바위 위로 고운 핏빛의 물이 들었다. 그것도 신선한 핏빛이다.
땅거미에 완벽하게 함락당하고 나면 암흑 속에서 홀로 몸을 일으킨 괴물처럼 보일 바위 기둥들도 지금만큼은 꽤 멋있어 보였다. 어둠이 몰려오기 바로 직전, 만물은 극적으로 생기를 발산하며 최후를 맞는 법... 풍화가 시작된 바위 기둥을 이리저리 바라보던 리카익은 음류시인이라도 된 듯한 낭만적인 착각에 빠져들면서 성지 안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뜨뜻한 바람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슴이 욱씬거리며 아파오려 했다. 펄펄 끓는 국물을 한꺼번에 들이마셨을 때와 비슷하다.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곳이 성지.
위대한 자가 강림한 대지.
신과 악마가 동시에 땅으로 내려와 교접한 장소.
그 충격으로 사람도, 동물도, 나무도, 심지어 곤충까지도 전멸당했다.

오늘에 이르도록 생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눈을 씻고 보아도 녹색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칙칙한 갈색만이 남은 생기 잃은 대지... 썩은 뻘처럼 사방은 농밀한 고독에 휩싸여 있다.
그 와중에 보석과도 같은 반짝임이 소리없이 아우성을 치고 있다. 반딧불처럼 빛났다.
과거, 지옥의 심장부처럼 뜨거웠던 열풍이 몰아쳤던 때에 엄청난 열기에 녹아내린 돌덩이들이 도로 굳으면서 만들어진 보석들이다. 그것들은 모래 속에 촘촘히 파묻혀 석양의 빛을 7배나 더 붉게 만들었다. 화려하다기 보다는 무서워 보였다. 그것은 외로운 밤하늘의 별과 같고... 조물주가 만든 심연의 손바닥 위를 흐르는 가냘픈 영혼과도 같았다.
그랬다. 이곳은 어둡고도 장엄한 우주 그 자체... 냉혹함과 정숙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

리카익은 잠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바닷가에서 조개 줍는 어린 아이처럼 차갑게 속삭이고 있는 유리알을 어루만지려 허리를 굽혔다. 소년의 눈은 이미 꿈꾸는 사람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