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송합니다. 귀차니즘이 발동, 정리하는게 점점 더 느려지고 있습니다. 휴가 마지막 날인데 그래도 뭐 하나는 해야지- 라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몸이 안 따라줍니다. 엉엉.


♠ 파편 여덟 - 평행선의 교차지점 2

『!!』
읏 하고 허리를 세웠다가 꽈배기처럼 몸을 비틀어 흙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비명인지 외침인지 모를 소리가 거품처럼 입에 매달렸다. 부자연스럽게 관절이 뒤틀리면서 닭뼈 부러지는 뚝뚝 소리를 내었다. 구원을 찾아 팔을 뻗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이러다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죽겠다! 그만 일어나!』
화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화들짝 놀란 소녀가 눈을 떴다. 꿈... 꿈! 정말로 꿈인가?

『이, 인간으로 태, 태어나질 말... 라고 나를 저, 저주했...!!』
『뭔 소리야, 어이?』
『제, 제르가디스? 히이익! 제르가디스?』
『그래. 나야. 알았으면 이제 그만 내 멱살을 놓아다고. 이러다간 가위 눌린 널 깨우려던 죄로 내가 먼저 죽겠다. 무슨 아이가 힘이 장사냐!』

제르가디스는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갸냘프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그러나 미련 곰탱이마냥 힘 하나는 끝장나게 센 소녀의 손을 탁탁 쳤다. 아차하다간 숨 막혀 죽게 생겼다. 때문에 아이의 손을 때리는 그의 손길은 제법 매서웠다. 살갗이 새빨갛게 되도록 두어번 정도 더 때렸다.
고통은 효과를 발휘하여 완벽하게 잠에서 깬 소녀는 크게 숨을 들이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전히 얼굴은 땀투성이었고, 경련은 다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벌벌 떨며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어루만졌다. 코와 입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한참만에야... 아주 한참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생난리를 치는 거냐. 이거, 무서워서 살겠나.』
약간은 나무라는 말투다. 그러나 짜증섞인 말투와는 달리 얼굴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고 쳐다보는 시선엔 아픈 자식 대하는 어미의 근심이 가득 들어가 있었다.
『이젠 괜찮아?』
소녀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눈을 뜨면 모든 그림과 소리가 희미해진다. 다만 끔찍하게 무섭다는 것만이 앙금의 찌꺼기처럼 남아 마음을 짐짐하게 만들 뿐이다.
팽 소리를 내며 코를 풀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가 뺨에 흥건했다. 얼굴을 닦아낸 옷자락으로 짠 내음이 났다.

잠을 푹 잤다는 느낌은 없다. 그야말로 눈만 감았다. 그런데도 그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발버둥을 쳐댔으면 발자락 근처의 흙이 뻘겋게 다 파이고, 풀들은 뿌리째 뽑혀나갔다. 손톱으로 마구 긁어댄 자국도 선명하다. 배꼽에 찬바람 들어가지 말라고 덮어준 제르가디스의 망토는 걸레처럼 구겨진 것으로도 모자라 흙투성이로 변해 멀직히 날아가 있다. 게다가 눈 감기 전엔 왼편으로 나무가 보였는데 지금은 오른편으로 자리잡았다. 파격적이다 싶을 정도의 변화다. 그렇게 생난리를 치면서도 모닥불을 걷어차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 다행이었다.
실수로 이불을 적혔다고 해도 이렇게 창피하진 않을 것 같다.
곰이 설쳐댄 듯한 꼬락서니에 뺨이 벌겋게 달았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잠자코 쥐구멍을 찾았다.

『이봐? 갑자기 왜 그래. 토할 것 같아서 그래?』
그걸 아픈 모양이라 엉뚱하게 오해했다.
괜찮은 거냐고 반복해서 물어보며 등을 쓸어내리려 했다. 정 뭐하면 바늘로 손톱이라도 딸 기세다.

등을 두드려주겠다는 걸 피해 소녀는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다 남은 나뭇가지가 딱딱 소리를 내었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그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했다.
잠결에 도둑은 물론, 몰래 남의 침대 옆으로 기어들어와 곤히 잠자는 모습을 관찰 일기에 적으려고 한 모모 마족까지 한 방에 때려 잡은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던 리나 인버스와 비교하자면 그녀의 잠버릇은 사실 껌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 사정을 자세히 꿰고 있을 리 없다. 자고로 여자는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색색 숨소리만 내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아이고, 망신살. 그녀의 귓불이 모닥불의 불빛을 반사해서 무척이나 빨갰다.

약 5분 뒤, 어색한 침묵을 깨고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뭐가.』
여전히 제르가디스의 말투 하나는 기가막히게 퉁명스러웠다.
『너의 목소리... 도움이 되었어. 정말이야.』
『별 것도 아닌데 뭐.』

그까짓 것이 뭐 그리 대수냐는 투다.
하지만 여자는 잘 알고 있었다. 잠을 이룰 때마다 고약한 악몽에 시달리는 그녀를 제르가디스는 항상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혹시라도 모를 마족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불침번을 선다는 건 어디까지나 핑계다. 무릎을 둥굴게 말고 앉아 길고도 지루한 밤이 다 가도록 불편한 새우잠을 이루는 이유는 오직 단 한 가지. 여차하면 악몽에 잡아 먹히게 생긴 그녀를 제깍 두둘겨 깨우기 위해서다.
따뜻하게 손을 잡아준다거나, 부드럽게 어깨를 흔들어 준다거나 하는 센스는 없었다.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귓청이 날아가도록 버럭 고함을 질러댐으로 수렁 같은 악몽에서 그녀를 끄집어냈다.
원래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그렇게 옆에 있어 주었다.

수면 부족 사태는 어디까지나 둘째다. 때로는 바락바락 비명을 질러대며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그녀에게 여차하면 얻어 맞았다. 다행히 많이 아파하는 것 같진 않았지만 분명히 골치 아픈 문제다. 주먹질 당하는게 취미일 리 없으니 그저 미안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다. 어떤 때에는 자기 옷자락을 콧물 닦기 수건 대용품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런 경우엔 남의 이목을 피해 냇가에 내려가 빨래를 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반드시 뒤따랐다. 도둑놈처럼 서두른 탓에 대강 비누칠한 옷엔 지저분한 얼룩이 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르가디스는 일절 불평을 하는 적이 없었다.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곁에 와서 잠자코 체온을 나눠주었다.

제르가디스를 곁눈질로 훔쳐보던 그녀의 얼굴은 서서히 이상해졌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수심에 가득차 오른팔에 매여진 타리스만 팔찌를 어루만졌다. 입가로 쓸쓸함이 번져갔다.
마력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솜씨 좋은 승려에게 부탁해 결계 주문을 걸어놓은 마혈옥은 이제 피처럼 붉은 색이 아니라 화사한 핑크색으로 빛이 바래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면은 유리처럼 매끄러웠다. 손가락으로 쓰윽 문지르자 비누로 방금 씻은 듯한 쾌활한 뽀독 소리가 났다.
그 청량감은 자신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팔찌마저 비웃고 있다.
더미라고. 리나 인버스가 아니라고.
마음이 복잡했다. 뭐랄까... 분했다.

『아,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뭐, 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에 제르가디스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어깨 너머로 놓치고 싶지 않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천자락 너머로 통하는 온기가 황송했다. 그녀는 안으로 움츠러들어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자의 오른손을 붙잡고 타리스만 팔찌가 끼어진 손을 진귀한 골동품 감상하듯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타리스만의 고유 파장을 봉인한 주문은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지. 혹시나 타리스만 때문에 제로스 녀석에게 추적당한 것이 아닐까 하고 걱정하는 거라면 염려 붙들어 매. 제로스가 다시 우리들을 찾아올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그 녀석 발바닥이 마.당.발.이기 때문이야. 녀석... 정말이지 물건이지. 난 가끔 놈이 진짜 마족인지, 그게 아니면 솜씨 좋은 뒷골목의 소식통인지 헷갈리는 적이 많아. 뺀질거리는 건 그렇다치고 기가 막힐 지경으로 사람들 틈바구니를 잘 비집고 돌아다니거든? 자기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캐내는 일엔 도사급이라고 할 수 있지. 아무리 내키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일을 건성으로 대충대충 처리했으면서도 겨우 10일만에 우리들 꼬리를 잡다니... 무서운 놈.』

투덜대며 자연스럽게 그녀와 손을 깍지꼈다.
손가락으로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하여 각자 깨달았다. 세상에 오로지 단 둘만 남았다. 피가 통하는... 같은 어미로부터 태어난 사이 좋은 오누이처럼 손을 붙잡고 그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제로스라...』
그녀는 심호흡을 해 보이며 눈동자를 위로 치켜 올렸다.
『뭐야. 그렇게 말하는 걸 듣고 있자니 어쩐지 칭찬하는 것 같은데?』
『빌어먹을 자식이긴 해도 인정해야 할 건 해야지. 녀석이 진짜 우리들의 적이라면 승산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런 면에선 제로스 녀석이 너의 일에 대해 다소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천만 다행이다. 이제 너도 잘 알았겠지만 놈은 아주 무섭지. 아니, 방금 한 말은 취소하마. 아직도 넌 그 자식에 대해 잘 모른다고 봐야만 옳을 거다. 녀석이 진심으로 날뛰는 걸 아직 보지 못했으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난 예전에 딱 한 번 그 녀석이 본래의 힘을 모두 사용하면서까지 광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때의 난 비로소 깨달았지. 그야말로 황금 용족을 거의 전멸로까지 몰아넣은 전설의 마족이었다는 걸 말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가운데 하늘은 크게 일그러졌다. 붉은 피의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땅이 꺼져가고, 그 벌려진 지옥의 아귀로 모든 것이 남김없이 휩쓸려가는... 하여 죽음의 권속마저 비명을 질러대며 땅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 제발. 이렇게 빌어요. 날 버리지 말아주세요.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제르가디스는 입을 다물었다. 동시에 화난 눈빛으로 타리스만을 노려보았다.
아니, 화났다라기 보다는 너무나 무서워서 단단히 굳은 눈빛이었다.

- 가지 말아요.

뾰족한 엘프의 귀가 볼품 사납게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머리 속으로 휑한 바람이 불어왔다.

모든 의문은 리나 인버스, 그녀를 중심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멍한 눈빛, 딱딱하게 말라붙은 갈색의 피, 뻥 뚤린 가슴 위로 둥실 떠올라 낯선 생명체처럼 불타오르고 있던 황금 빛 심장... 끝도 없이 아래로 길게 펼쳐진 어둠의 계단을 한없이 걸어 내려가는, 무섭고도 존엄한 왕... 그녀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아닌 것.
다신 보고 싶지 않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과 똑같은 얼굴... 이마에 까만 점이 없다는 것 정도만 빼고 완벽하게 똑같은 얼굴이다.
사랑은 탄식보다 깊어서... 여자는 울 듯한 표정으로 어두운 밤 하늘을 올려 보았다.

《너는 인형이다.》
《아냐, 나는 인형이 아니야! 나는 인간이야! 사람이라고!》
《그래... 그렇게 말해주길 나는 기다렸다. 자아. 소녀여, 자유를 얻고 싶은가.》
《당연하잖아.》
《그렇다면 이렇게 하자. 나는... 할 테니까... 대신... 너는...》

순간 이름마저 가지지 못한 소녀는 못 견디겠다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추워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닌데도 제르가디스는 반사적으로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가지고는 모닥불 속에 훌쩍 집어 넣었다. 잠시 잠깐의 황홀한 불빛을 내뿜으며 타들어가는 잎사귀들과 하얗게 무너져 내리는 나뭇가지들의 형상이 그저 아름다웠다. 모닥불의 빛으로 물들은 제르가디스의 옆 얼굴도 바람을 타고 나르는 선녀처럼 그저 곱기만 했다.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시든 장미처럼 사랑스러웠다.

《명심하자. 그는 나의 것이 아니야. 리나의 것이야.》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깊숙이 파묻었다. 못견디게 쓸쓸했다.
불꽃이 타닥 소리를 냈다. 제르가디스가 다시 그녀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나아가 할 말이 있다는 식으로 그녀의 어깨를 쳤다.

『이봐. 그렇게 불편하게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지 말고 내 곁에 누워 좀 더 자도록 해. 동이 트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 앞으로 먼 길을 가야 하니까 시간 있을 적에 푹 쉬라구. 나중에 졸립다고 징징거려도 난 모르는 척 할 거야. 내 친구인 가우리 녀석이 무사히 편지를 건네받았다는 연락을 사흘 전에 받았으니까 우린 갈 길이 바빠. 오래 전에 한 약속 그대로 성지에서 녀석과 재회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해. 지금부터 우린 꽤 높은 산을 두 개나 넘어야 한다구.』
그는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탕탕 치며 어서 누우라고 재촉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무릎을 빌려주겠다는 태도다. 원한다면 깔고 누워도 괜찮다는 식이었다.

『성지라... 뭐, 아무려면 어때. 난 몰라.』
여전히 무릎 사이로 코를 박은 여자는 일부러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야. 어쩐지 그곳엔 가기 싫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하지만 난 널 억지로 끌고서라도 성지에 갈 거야. 널 여기서 그냥 놓아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널 이용해서 리나를 찾을 거야. 뭐, 나쁜 놈이라고 마구 욕해도 좋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너의 의견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네가 이 일에 연관되기 싫다고 바둥거려도 난 너의 목덜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거야. 리나를 찾기 위해서라면... 안됐지만 이건 내 진심이다. 나는 친구의 믿음을 배반하고 싶지 않아. 아울러 아주 오래 전에 그녀에게 했던 그 약속을 지키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나는 너의 존재를 이용해야만 해.』
『이용한다라... 거리낌 없이 직설적으로 선언하시는구먼. 그래. 맘대로 날 이용해. 화를 내진 않아. 나는 13년만에 나타난 중요한 단서이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의외로 낮고 온순했으며, 순종적이기까지 했다.
『정확하게는 13년 하고 4개월 8일이지.』
그가 즉각적으로 정정해 주었다.
『뭐, 아무려면 어때. 다 지겨워.』
체념조로 그녀가 말했다.

눈을 부비며 허공으로 녹아들어가는 작은 불씨들을 응시했다. 공기가 차가운 것도 아닌데 괜히 눈이 시렸다. 자꾸만 착잡한 심정이 되고 있었다. 얼굴 피부가 빳빳하게 당겨지는 느낌이다.

《내가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이유... 즉, 나만의 가치.》

그건 일종의 강박관념과도 같았다.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를 증명하고 싶은 건 어쩌면 신앙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태어났으니까 살아간다고? 그건 거짓말이다. 모든 것은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가치가 없다면 그건 종말이다. 살아도 되는 이유가 없다면 그 즉시 어둠 속으로 집어 던져지고 만다. 필요 없는 존재는 말살당해야만 한다. 그건 세상에 존재하는 숨겨진 법도이다.
몸이 떨려왔다. 약간은 흥분한 상태에서 소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부드러운 베개로 얼굴이 덮혀져, 부모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받아가며 숨이 막혀 죽어가는 갓난아기가 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사랑 받으며, 희망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그렇게 쓸모 있는 인간이 되면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받을 수 있지 않을까.
죽고 싶다는 욕구에 반동하여 살고 싶다는 집착은 매일 커져만 갔다.
누군가 허락을 해주길 기다렸다. 이제 살아도 된다고. 숨 쉬고 웃어도 된다고.
후욱, 숨 쉬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는 그저 예전에 매듭짓지 못한 일을 마무리하고 싶다고 말하지. 때문에 나를 붙잡은 거라고 단단히 못을 박았다. 내가 필요하다고 너는 말했다. 그래. 너는 나를 필요로 한다. 나는 쓸모가 있다...』

매마른 눈을 깜박였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런 걸 기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 기쁜 것이다. 그녀는 움츠렸던 다리를 길게 뻗으며 자세를 좀 더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말이야, 제르가디스.』
『왜.』
나뭇가지 하나를 모닥불 속으로 집어 넣으려다 말고 그가 대답했다.
『계속 궁금했었어. 나,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이 여자...』
그러면서 소녀는 자기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도대체 이 여잔 뭐지? 리나는 당신의 뭐였지? 이거였어?』
라고 말하며 그녀는「애인」이라는 뜻의 새끼손가락을 처억 들어 보였다.
희미하긴 했으나 분명 짓궂은 미소가 입가에 걸려져 있었다.

제르가디스는 흉칙할 정도로 입을 벌린 채 꼼짝을 못했다. 그 새끼손가락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기에 무어라 대답을 하면 좋을지 더더욱 난감했다. 머리 위로는 냄새 고약한 가스가 가득찼고, 자기 손에는 막 불을 붙일 성냥이 들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하다.

『아, 아냐. 나는 그녀의 친구야.』
제르가디스는 급소를 얻어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치, 친구이자 동료이지.』
어랍쇼. 친구라... 동료? 소녀의 얼굴에 거짓말 하지 말라는 빛이 떠올랐다.
『자자, 지금은 아무도 없다구. 그러니까 아저씨? 지금은 우리 둘 뿐이야. 뭘 망설이는 거야. 시원하게 확 불어버려.』
『뭐,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냐. 도, 동료라구. 절대 애인은 아니었어!』
그 절.대.라는 수식어가 영 수상쩍다는 느낌을 준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헤∼에, 수상하다.』
소녀의 입술이 장난스레 일그러졌다.
『같이 자거나 하지는 않은 거야? 그저 순수한 짝사랑이었어? 정말?』
『우아악!! 아, 아니라고 했잖아!』
지나치게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제르가디스는 손에 든 나뭇가지로 땅바닥을 휙휙 쳐댔다.
『얼씨구? 화내는 걸 보니 영락없구먼. 고백은 했는데 차인 거야, 아니면 숫기가 없어서 접근조차 못해본 거야. 어느 쪽이야? 뭐, 대충 보아하니 후자에 가깝겠구먼. 겨우 손이나 붙잡고 속으로 좋아라 했겠지. 쯧쯧. 동료 좋아하시네. 남자들은 죄다 똑같아. 언제 옷 벗기고 깔아보나 상상하는 주제에 우린 곧 죽어도 친구라고 하지.』

쿨럭쿨럭하고 비참할 지경으로 숨 넘어가는 기침 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졌다.
소녀는 혀를 차며 얼른 등을 토닥거리는 것으로 질식사의 위험에서 그를 구출했다.

『그, 그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말하면...』
『뭘 그렇게 당황해 하는 거니. 너도 참 한심하구나. 뭐, 어느 쪽이든 좋아. 그러니까 제르가디스?』
그렇게 말하면서 소녀는 슬며시 자기 손을 제르가디스의 무릎 사이로 끼어 넣었다.
『이건 생각나는대로 그냥 말하는 것이 절대 아니야. 난 말이지... 네가 내 목숨을 구해준 답례를 하고 싶은데, 현재 내 수중엔 그럴 듯한 것이 하나도 없지 않겠어? 타리스만이 있긴 하지만 원래부터 그건 나의 것이 아니었고, 아울러 넌 그걸 받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말하는 건데 네가 원한다면 나랑 자도 좋아.』

지금의 제르가디스는 그야말로 여자 스타킹으로 목이 졸린 사람 바로 그 자체였다.
『뭐?』
머리 속으로 오만가지 단어들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그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아쉽게도 이게 전부였다.
『뭐?』
『다시 말해줘? 생각 있으면 날 안으라구.』

제르가디스는 눈을 아래로 내려 자기 무릎 위로 얹어진 가냘픈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가? 피부가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고 입안이 바싹 말랐다. 손과 다리가 따로 돌고 있는 가운데 바로 머리 위에서 대형 폭죽이 터졌다.

『나, 경험 많아.』
그녀는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면서 엉덩이 걸음으로 한층 더 가까이 다가왔다. 하얀 팔이 소년의 가느다란 허리를 은밀하게 휘감았다. 땀에 절은 여자의 체취가 제르가디스의 콧속으로 확 풍겨왔다.
그는 한층 더 동요했다.
여자였다. 여자.
먼지 투성이의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흐트러지게 쏟아져 내렸다. 졸음을 호소하는 어린애처럼 부드럽게 안겨오는 소녀의 가슴이 그의 뱃가죽을 나긋나긋하게 쓸어내렸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익숙한 태도로 소년의 무릎 위로 슬그머니 올라탔다.
『기분 좋게 해줄게.』

제르가디스는 놀란 나머지 숨을 헐떡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술에 취하지도 않았건만 팔다리가 노곤했다. 그녀가 손바닥으로 툭 밀치면 그대로 뒤로 자빠질 것은 누가 뭐래도 확실했다. 그렇게 일단 바닥으로 쓰러지면... 끝장이다. 자제력이고 뭐고 송두리째 증발해버릴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쉬피드여, 그녀의 손이 내 배꼽을 어루만져주길 간절히 바라나이... 틀려!
차라리 라틸트 주문 곱배기를 얻어맞지... 소년은 소리없이 울부짖었다.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마침내 제르가디스는 고개를 들어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데 눈에 힘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눈동자가 콧잔등 위로 해서 한 지점에 나란히 모여 있었다.
완벽한 사팔뜨기.
따악. 제르가디스는 손가락을 튕겨 리나를 닮은 소녀의 이마 한 가운데를 가격했다.

『아얏!』
왕벌에게 쏘이기라도 한 것처럼 소녀가 펄쩍 뛰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어린애가 그딴 소리 하는 거 아냐. 쓸데없는 짓 말고 빨리 잠이나 자!』
『뭐야! 난 기껏 생각해서 말해준 건데! 왜 인상 쓰면서 노려보냐구! 나 자존심 상했어! 물어내!』
『시, 시끄럿! 반갑지 않으니까... 손톱은 세우지 마. 자자, 잠이나 자라.』
『칫! 웃기고 앉았다. 혹시 여자 경험 없는 총각 딱지야? 어린애처럼 뒤로 빼고!』
『그래! 말 진짜 잘 했다. 난 아직 어린애라고. 그래서 이런 건 무섭단 말이야. 알겠냐! 네가 싫은 거 아냐. 난 무섭단 말이야. 미, 미움받을 짓 따윈 절대로 안해. 그러니까... 제기랄. 날 시험하려 하지 말아.』

그녀가 어이고 어이고 노래 부르며 이를 으드득 갈아댔다. 아이는 여전히 종알종알 악담을 잘도 떠들어댔다. 총각은 얼어 죽어라, 얼간이 백토끼는 조루증이다... 떠벌떠벌. 그러나 제르가디스는 모닥불만 열심히 노려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이 붉어 보이는 것이 모닥불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 하염없이 앉아만 있었다.

간혹 잊혀질만 하면 서로 각자의 입으로 욕설을 읊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생난리였어도 표정만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무척이나 안심한 표정으로 소녀는 동녁이 밝아올 때까지 제르가디스에게 한층 더 달라붙었다.

밤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진정한 평화라는 이름의 작은 파이 조각 하나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