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 여덟 - 평행선의 교차지점 1

갑작스럽게 시작된 두 사람의 입맞춤...
비밀 벽감 속에 숨어 얌전히 두 눈만 깜빡이던 소녀는 바늘 구멍 저편에서 벌이지는 광경에 놀라 어깨를 흠칫했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신경전을 할 때는 언제이고 돌연 태도를 바꿔 열렬한 키스라.
어물전 앞에서 언성 높여 싸우던 꼴뚜기와 문어가 별안간 고래 박사 주례 하에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식이어서 적응이 힘들었다.

제르가디스는 제로스의 품에 안겨 온몸으로「꽥」비명을 질러댔다. 명색이 써드 마스터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다. 생전 처음 무도회장에 나갔다가 낯선 청년에게 도둑 키스라도 당하는 시골 아가씨다. 처음에는 물고기처럼 파닥거리며 반항이라는 걸 해 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얌전해지는 모습이 더더욱 그러하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 했지만 상대의 리드에 자연스레 몸이 따라가고 있다. 체중이 앞으로 쏠리면서 포옹은 한층 더 격해졌다.
그것은 탐닉... 서로의 팔이 상대의 몸을 덩굴처럼 휘감는다. 족쇄처럼 묶고 그물처럼 끌어 올린다.
제르가디스가 다리에 힘을 잃고 휘청이자 100년 이력의 기둥 서방처럼 눈치껏 허리를 받쳐 안았다. 넘어지지 않을 터이니 안심하라며 자신에게로 체중을 실리게 한다.
혀와 혀 사이로 미끌어지는 타액의 끈적임이 더욱 커졌다.
이제 그들은 마치 오랜 이별 끝에 다시 만난 연인처럼 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손을 잡았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할 것이다. 연인들은 서로의 체취를 확인하며 심장이라는 이름의 강으로 눈물을 흘려보냈다.

헤에, 잠깐만. 정말로 감격의 포옹이던가.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찜찜하다. 틀리다. 연인끼리는 저런 식으론 절대 키스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닫자 꽉 쥔 주먹으로 땀이 흥건히 고였다.
무서워지려고 한다. 속옷 아래로 오줌 한 방울이 흘러나왔다.

제르가디스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제로스는 두 눈을 멀정히 부릅뜨고 상대를 응시했다. 기다란 속눈썹 사이로 광물질의 눈동자가 묘한 광택을 내며 반짝거렸다.
무감동. 무감정. 그야말로 감정의 찌꺼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완벽한 인공물.
돌 같은 눈으로 상대를 냉랭하게 내려다보며* 억지로 밀어넣은 혀를 굴린다.
어려운 수술을 집도하기에 앞서 절개선을 넣을 환자의 복부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 있는 의사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전하고 있는 블랙홀에 관한 중력장 방정식의 해답을 얻고저 진지하고 고민하는 학자다. 숨이 막혀 시뻘겋게 달아오른 제르가디스와는 달리 그 얼굴엔 혈색 조차 없다.
키스 같은 것이 아니다. 소녀는 희미한 신음 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눈동자가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쪽을 보고 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단순히 우연일 거라고 믿으려 했다.
허나 믿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기만이다. 그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가로막은 벽은 존재를 상실했다. 마족은 - 보랏빛 눈으로 훤히 꿰뚫어 보았다.
속옷까지 발가벗기는 시선으로 여자를 느긋이 쳐다보며 - 제르가디스와 키스했다.
빨리고 빨리운다. 당겨지는 피부가 부어오른다. 하아, 하는 가냘픈 호흡... 무릎이 후둘거린다. 

떨리는 손을 들어 입술을 만져봤다.
지긋이 손가락으로 눌리는 감촉 위로 뜨겁게 핥고 지나가는 사내의 혀가 느껴졌다.
《이제 깨달으셨습니까.》
마족의 눈이 짖궂게 구부러졌다.
후- 하고 제르가디스의 목덜미에 숨을 불어넣더니 손으로 휘어잡고 그 손가락에 힘을 준다.
《당신은 절대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이제 목이 조여지고 있는 건 그녀.
혈관을 압박하는 손가락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입안 가득히 시큼한 위액이 올라왔다.
필사적으로 팔을 허우적거림으로 자신의 목을 휘감은 사신의 밧줄을 떼어버리려고 기를 썼다.
그럴 수록 올무는 더욱 더 죄여왔다.
두 눈이 튀어나오는 것을 느끼며 켁켁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한줌의 공기를 갈구하며 입을 벌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분 나쁜 것이 하나 가득 들어온다.
목젖을 부자연스럽게 누르는 감각에 토기가 올라왔다.
《시키는 대로 해. 시키는 대로... 얌전히 굴어.》
비릿한, 더러운 수컷의 냄새.
입안에 든 걸 뱉어내고 도망가려 하자 머리카락을 잡고 거칠게 위로 잡아 당긴다.
사내들이 킬킬 웃으며 음란하게 허리를 움직인다.
죽도록 두렵고, 미치도록 혐오스럽다.

『이봐, 이봐! 또 시작이냐? 그만 좀 바둥거리고 진정해. 넌 지금 나쁜 꿈을 꾸고 있을 뿐이야. 이봐! 내 말이 들리나.』
누군가 손등으로 아프지 않을 정도로 해서 뺨을 때렸다.
『눈 좀 떠. 여기가 현실이고 거기는 꿈속이야. 어이?』

그런가. 꿈인가.
어눌한 목소리로 의미 불명의 단어 몇 개를 중얼거리던 소녀는 발버둥을 멈추고 긴장을 풀었다.
하나... 두울... 세엣. 아래로 계속 떨어져 가는 것, 흘러가는 것...
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냄새는 부드러웠다. 발치에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의 온기에 위로를 얻으며 태아처럼 몸을 구부렸다.

풍경이 변해갔다. 흥겹게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공간이 곱게 부풀어 올랐다. 맛있는 냄새가 났다. 달콤하면서도 따뜻했다. 소녀는 묘한 안도감과 함께 멸망에 가까운 허기를 느꼈다.
《보리 빵 한 덩이의 가격은 22데나이, 버터 바른 빵은 30데나이∼!!》
방금 화덕에서 구워낸 것이 분명한 빵을 잔뜩 진열해 놓고 커다란 앞치마를 두른 사내가 딱딱 박수를 쳤다.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장바구니를 든 아낙네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흥정의 시간이다. 단골로 눈도장을 찍으면 기분이 좋아진 상인이 1데나이를 깎아줄련지도 모른다.
《금방 나왔습니다. 보리 빵에 버터 빵~ 빨리 사가세요~》
그 틈에서 소녀는 형체가 없는 이방인처럼 주춤댔다.
할 수 있다면 진작에 흙이라도 파 먹었다. 뱃가죽에서 괴물이 꼬륵대며 밥을 달라 아우성을 쳤다. 하얀 빵이 시선을 잡고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견딜 수 없어 퀭한 눈빛으로 손가락을 빨았다.

《저기, 돈은 없어. 하지만 버터 바른 빵을 주고 대신 이걸 받으면 안될까?》
소녀는 주섬주섬 호주머니를 뒤져 제법 묵직한 물건을 끄집어 들었다.
커다란 마혈옥이 박힌 마법 부적 팔찌였다.
빵 장사꾼의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중간중간 거무틔틔한 얼룩이 생긴 것이 느낌은 좋지 않다. 그러나 특수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진귀한 물건이라는 점은 코흘리개 어린애라도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운데 박힌 보석 알은 탐스러운 석류알처럼 큼지막했고 보는 각도에 따라 무지개의 빛이 났다. 버클의 장식에도 섬세한 수공이 들어가 있다. 이름 높은 대 마도사가 장신구로 쓰면 꽤나 어울리겠다. 빵가게와는 맞지 않는 물건이다.

아주 한참만에야 부적 팔찌에서 눈을 뗀 장사꾼이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아가씨, 지금 농담해? 그 정도의 물건이면 10년치 먹을 빵을 한꺼번에 살 수 있겠구먼. 거스름 돈 없어요. 차라리 그러지 말고 저기 보이는 전당포나 마법도구점 같은 곳에 가보쇼. 원한다면 아마 금화로 바꿀 수 있을 거요.》
그리고 돌연 차갑게 변해 말했다.
《훔친 물건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은 가격으로 사주는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난 이걸 훔치지 않았...》
《난 바빠요, 알았으면 이제 그만 저리로 가. 훠어이∼!!》
생선 가게 주인은 손버릇 나쁜 도둑 고양이를 멀리 쫓아냈다.
《전당포...? 마법 도구점?》
《보리빵 한 덩이의 가격은 22데나이, 버터 바른 빵은 30데나이∼!! 어서옵쇼! 마님.》

그녀는 타리스만이 싫었다. 그 물건이 어째서 수중에 들어가 앉았는 것인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팔찌에서는 오래된 피 냄새가 났다. 금으로 만들어진 장식 버클에 혀를 살짝 가져가면 쓰디 쓴 죽음의 맛이 났다.

왕의 권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아름다운 시체.

타리스만을 볼 적마다 눈을 부릅 뜬 채로 움직이지 않는 그 시체가 떠올랐다.
그래서 타리스만을 금화 100개를 받고 눈빛 고약한 마법 도구 수집가에게 기꺼이 넘겼다.
껌 값보다 못한 헐값이라는 걸 알았지만 상관 없었다. 오히려 앓던 이가 빠진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하얀 옷의 남자... 그로스 길드의 세 번째 직위 마스터라던 사내가 문제의 수집가를 한 방에 때려눕히고 그녀에게 타리스만을 되돌려주러 왔을 적엔 오히려 좌절감마저 느꼈다.

《뭣 하러 그걸 나에게 돌려주러 하는 거지.》
《그걸 왜 나에게 묻는 거냐. 이상한 아이군.》

남자는 되려 반문하며 눈썹을 찌푸렸다.
얄밉다 생각하여 얼굴을 똑바로 쏘아보며 돌려받은 팔찌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자 남자는 고등어 생선 뼈에 뒷구멍 닦은 더러운 휴지들 틈새로 몸을 날려 팔찌를 꺼내왔다.
그 남자의 소매춤에 묻은 누런색 오물이 화를 돋궜다. 
버럭 소리 지르며 이번엔 타리스만을 강물에 던져버리려 했다.
이를 눈치 챈 남자는 얼른 윗도리를 벗어 수영 준비를 끝마쳤다.
하는 수 없어 포기하고 팔찌를 허리춤에 넣었다.
남자는 마음이 그제야 놓였는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어지는 건 고유 파장이 어떻네, 마력 추적이니 뭐니 하는 이해 불가능의 이야기들이었다.
하루 반나절 내내 끝도 없이 이어진 설명이 지겨운지라 여자는 귀를 막았다.

《듣고 싶지 않아. 알고 싶지 않아. 나는 그저...》
창백한 얼굴을 들어 앞을 보았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도록 어두운 그곳으로 축축한 밤 안개가 발등을 소복히 덮었다. 시끄럽게 울어대던 새들도 모두 떠났다. 멀리서 으스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의 틈으로 죽음의, 절망의 잔류 기억이 녹아들었다.

약간은 코맹맹이에다 짜증날 정도로 말꼬리를 줄줄 늘이는 괴상한 버릇을 가진 여자가 툴툴거렸다.
《마마? 정말 이걸 여기다 버려도 되∼애? 나중에 곤란한 일 당하는 거 아니야? 시키는 대로 하긴 하지마안, 솔직히 난 찜찜해∼애.》
《시끄러워. 다른 사람 볼까 두렵다. 염려 붙들어 매고 서두르기나 해.》
나이가 많은 쪽의 여자가 신경질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달빛 한점 보이지 않는 으슥한 강둑으로 둘둘 말린 짐을 내렸다. 원통형의 짐꾸러미는 축축하고도 끈적였다. 덕분에 손이 자꾸만 미끄러져 그걸 다루던 젊은 여자를 무척이나 애 먹게 만들었다.
《좇나게 무겁네∼애. 그런데 마마? 방 청소는 했어?》
《두말하면 잔소리지.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치웠다. 모두 화롯불에 태웠다고.》
싸구려 향수 냄새를 풍겨대던 늙은 여자가 초조한 투로 서둘러 대꾸하곤 손을 부볐다.
좀처럼 가만히 있질 못하는 여자였다. 머리를 흔들었다가, 매무새를 가다듬다가, 강가로 부는 습기찬 바람 때문에 가뜩이나 시린 무릎을 문질렀다. 초조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성격 자체가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럼 이것만 처리하면 된다는 거로군요오. 알았어요∼오.》
젊은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 짐 꾸러미를 재빠른 손놀림으로 끌러댔다.
어스름한 달빛을 받아가며 안에 담겨있던 것이 앞으로 왈칵 쏟아졌다.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어린 소녀다.
기껏해야 11살? 아직 가슴도 나오지 않았고, 털도 나지 않았다. 몸에 발려진 피 때문에 진한 벽돌색의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 이마 위에는 묵직한 둔기로 맞은 듯한 상처가 있고, 팔뚝과 허벅지로는 길게 베인 자상이 선명했다. 허벅지 안쪽은 한층 더 심각해 칼로 깊숙이 찔린 자국이 여럿이다. 상처는 옆구리까지 길게 이어져 붉은 갈고리 자국을 남겼다.

익숙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낯선 그 얼굴은...

《알고 싶지 않아!》

두터운 구름 사이로 잠시 초승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둑으로 부는 바람을 타고 짙은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젊은 여자는 구역질을 참아가며 아이의 몸뚱이를 강가로 질질 끌어내렸다. 강물 속으로 집어 던지려면 거리가 좀 더 가까워야 했다. 팔뚝 힘이 장사가 아닌지라 작업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서둘러, 데라렐.》
《서두르고 있어요오. 누가 게으름 피운다고 그러는 거예요오오.》
최종적으로 해야 할 일 딱 한 가지를 남겨두고 젊은 여자가 흐르는 땀을 훔쳤다.

《마마? 여기 좀 봐요. 나를 보라구. 일부러 이럴 필요 있어? 그냥 대충 내버려 두고 가면 안될까∼아? 어차피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배고픈 들개가 와서 뼈까지 씹어 먹을텐데... 얼굴을 망가뜨릴 필요까지 있느냐구우.》
커다란 돌을 들어 아이의 얼굴을 막 내리치려던 젊은 여자가 멈칫거렸다. 그리고는 동의를 구하려는 듯 뒤돌아 일행을 바라보았다.

강둑에 선 늙은 여자는 딱 부러지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일의 마무리를 재촉했다.
《안돼.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데라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려는게 전부는 아니다. 그게 목적이라면 염산이나 초산을 들이붓는 쪽이 훨씬 더 간편하지. 비록 살점 녹는 그 특유의 냄새 때문에 며칠은 밥을 먹지 못하게 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 편이 편하지. 데라렐? 아직도 모르겠어? 보렴. 그 아이... 아직도 끈질기게 숨이 붙어있잖니. 제발 부탁이니 그만 투덜거리고 그앨 편안하게 해주려무나. 빨리. 그리고 우리도 맘 편해져 보자.》

사람 목숨은 억세게 끈질겼다. 거의 두동강이 나버린 목구멍으로 슉슉 소리를 내가며 어렵사리 숨을 토해내었다. 진흙에 손가락을 박고 자신을 도와줄 그 무엇인가를 붙잡고저 흙바닥을 긁어댔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잡았다.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그녀의 손짓엔 필사적인 그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었다. 살려 달라고, 죽고 싶지 않다고, 애원을 담아 손톱으로 흙을 팠다.

《징그럽게 아프겠지.》

늙은 여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어린 창녀를 발가벗겨 온통 새빨갛게 치장한 방으로 집어던진 이는 바로 그녀 자신.
굶주린 늑대가 돌아다니는 우리로 닭이 던져졌으니 그 결말이야 뻔했다. 달아나고 도망쳐도,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숨어도 늑대의 발톱은 끝까지 추격했다. 결국 아이는 강제로 남자에게 겁탈당했고 반항의 댓가로 수없이 얻어맞고 칼부림을 당했다. 작고 연약한 그녀의 자궁이 남성을 잘 받아주지 않는다며 투덜대던 노인은 번득거리는 흉기로 아이의 다리 사이를 후볐다. 비명지르며 펄쩍 뛰어오르자 장식용 대리석 조각으로 머리를 때렸다. 얼이 빠져 숨을 헐떡거리자 이참에 확실하게 해두자며 더 때렸다. 상대가 자지러지자 쾌감을 만끽하던 작자는 칼로 아이의 하복부를 난자했다.
그때의 비명이 아직도 귀에 울린다. 늙은 여자는 눈을 감았다.

《젠장, 젠장. 내가 꼭 해야 해?》
《그럼 이 나이에 내가 하리?》
늙은 여자가 벌컥 화를 냈다.
《알았어, 알아. 하면 되잖아. 제기랄. 마마. 정말이지 다음부턴 그 돼지 자식을 손님으로 받지 말아요. 아무리 돈을 궤짝으로 같다 바친다고 해도 이젠 싫어. 어디 무서워서 살겠어∼어? 자기 손녀 뻘의 아이에게 무슨 짓거리야. 잔인해.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권력자라고 허구헌날 아이를 잡아 거지발싸개처럼 만들다니. 매일 젖가슴도 나오지 않은 아이들을 가져다 바치는 우리들 생각도 해줘야 할 거 아냐. 그러고도 근엄한 척 낯짝 들고 설치는 꼬라지를 보면 내 속이 다 시커멓게 되요. 에라이 퉷!》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내 손에 묻은 피의 값을 나에게 말고 그 망할 돼지 영감에게 돌리소서.
짤막한 기도문이 끝나고 이어 희미한 달빛 아래 두툼한 돌멩이를 집은 두 팔이 휙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거의 숨이 끊어지기 일보직전인 상태에서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올린 어린 소녀가 그리 길지도 않았던 생애에서 최후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웃기지도 않게 쟁반같이 둥근 누런 돌멩이가 자신이 누운 땅 아래로 곤두박질 치는 모습이었다.

《이것으로... 끝이야. 다음 번엔 아예 인간으로 태어나질 말아라!!》

철퍽.
둔중한 충격이 다가왔다. 곧 이어 수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고, 풀밭으로 누런 액체와 회색의 덩어리가 여기저기 흐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