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 일곱 - 냉혹한 미소의 방문자 2

핏물은 바닥을 흥건이 적시고도 남아 작은 개울을 이루었다.
그 붉은 개울에 아무렇지도 않게 발을 담고 머뭇거림 없이 이쪽을 향하여 다가온다.
여전히 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있던 제로스는 눈을 가늘게 했다.
걸음을 옮길 적마다 불가항력적으로 핏방울이 튀어 하얀 바지단에 시뻘건 얼룩을 만들었다.
하얀 색과 빨강... 의외로 궁합이 좋다.
그것은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이었다. 여왕의 다이아몬드 왕관을 장식한 루비 같다. 환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있다. 거슬리면서도 시선을 끌어당긴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죄악의 빛깔이다 - 라고 마족은 생각하고 기뻐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 자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저런 놈을 끌어들여 내가 미안하군.』
피 웅덩이를 지나온 자는 제로스 쪽은 깨끗이 무시하고 바텐더를 향해 인사조로 턱을 까딱였다.
『그냥 날 팔면 될 걸 가지고... 일부러 죽음을 자초할 필요까진 없잖아?』
『어이구. 하지만 우리가 가족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요. 왜 여기로 나왔수, 이래가지고는 도망갈 시간을 벌어준 우리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갔잖소. 어린애처럼 쓸데없이 고집만 강해가지고는... 쯧쯧. 앞으론 절대 그러지 말아요. 사람이 말이야... 호의를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신호를 그렇게 보냈으면 알아서 움직여요, 바보 마스터님. 그냥 도망가면 누가 어떻게 한답니까? 엉덩이 무겁게 질질 끌다가 막판에 이딴 식으로 밖으로 기어 나오다뇨.』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며 되려 핀잔이다.
아직도 그는 남에게 비난받는 일에 익숙하질 않았다.
지금 바보라 하였나.
귓볼이 빨갛다.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이봐. 이건 좀 너무한데.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핀잔줄 수 있는 거야? 내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면 자넨 이미 뼈도 못추렸을텐데.』
『그거야 물론 그랬겠지만... 그래서 뭐요. 나에게 감사하라고?』
바텐더는 그렇게 대꾸하면서 곁눈질로 제로스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랍쇼. 살기등등하게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흥미진진해 죽겠다는 투다. 편안하게 턱에 손을 괸 자세로 어서 계속하라는 시늉이다. 때 아닌 말다툼을 벌이는 그들이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아무리 남들 싸움 구경이 즐겁다고는 하나...
방금 전에 그 난리통을 쳐대던 녀석과 동일인물 맞아?
그리하여 바텐더는 아주 혼란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두어번 흔들어 감정의 티끌을 가까스로 털었다.
집중하자, 다시 집중.

『허나 말입니다, 제르가디스님. 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깁니다. 당신 같은 분이 신경을 쓸 일이 아니지라우. 최강을 자랑하는 마스터 그로스 (※Gros, 12의 제곱인 숫자 144, 소속 소드 마스터의 인원이 랭킹 1위부터 144위까지 모두 144명인 점에서 비롯됨), 우리 소드 마스터 길드의 세 번째 서열인 당신이 나 같은 최하위 말단을 감싸려다 꼴깍 죽기라도 해봐요. 그러면 영광스런 길드의 존명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기사님들은 세간으로부터 바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아가며 엄청나게 욕지거리를 먹게 됩니다요. 끝장나게 창피한 일입죠.』
『허! 그로스의 써드 마스터 직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러는...』
『지금 무시라!』
멎적게 꺼낸 - 조촐한 항의는 당연히 씨도 먹히지 않았다.
가재미눈을 뜨고 원망을 퍼붓는다. 침방울을 튀겨가며 흥분하여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겸손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보쇼! 퍼스트 마스터께서 이 사실을 알아봐요. 화니마엘님이 펄펄 뛰는 가운데 동료들이 알아서 땅을 파줄 겁니다. 전 깨끗한 양복으로 갈아입고 묵묵히 벌레 투성이의 바닥에 드러누워야 하겠지요. 그러면 제 묘비 명엔《제 주인을 말아 먹은 끝내주는 바보 천치 여기 묻히다》라고 적혀질 겁니다. 이게 농담이면 난 돼지 자식이오. 아∼암∼요! 주인이 아랫것의 목숨을 아끼는 것은 좋지만, 욕실의 미끄럼 방지 발판 같은 놈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주인의 모습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오. 그런고로 감히 말씀드립니다. 지금의 당신은 나같은 놈에게 말을 들어도 싸요.』
『그, 그렇게 흥분하지만 말고...』
『내가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소?! 일부 극성 칼잽이들은 당신이 이슬방울만 먹고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다고 믿고 있단 말이오. 성격도 냉정해서 아랫 것들은 사뿐히 즈려밟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하고 있고. 어울리는 이미지라는 거... 무시 못하잖소. 당신은 그저 왕처럼 군림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환상을 깨지 말아 달란 말이야.』
『이봐? 난 이슬 같은 건 안 먹어. 빵과 수프, 그리고 가끔씩 고기를...』
『되었수!』

되기는 뭐가 돼.
듣기 싫다는 표현으로 손가락으로 귀를 막았다. 이러다간 길드를 관장하는 써드 마스터로써의 품위 유지 및 행동 방식에 대한 일장 훈계가 날밤 지새워가며 계속되게 생겼다. 설교는 싫다.
『이걸 어쩌나∼ 앞으로는 이슬만 먹어야 하겠네. 이걸 어쩌나∼ 고기 먹으면 큰일 나겠네.』
제로스가 옆에서 방실방실 웃으며 바람 아닌 바람을 넣었다. 손바닥을 둥굴게 말아 메가폰처럼 입가에 대고서「이걸 어쩌나」후렴구를 장난스레 반복했다.
『이걸 어쩌나~』

『너어...』
주먹이 절로 쥐어진다. 제르가디스는 아주 오래 전에 그랬던 것처럼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입 닥치고 가만히 있지 못하겠어!」라고 크게 고함을 지르... 려다 혀를 깨물었다.
이놈아 저놈아 하며 어줍잖은 말다툼이 가능하려면 한참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세숫대야로 피를 퍼부운 벽을 노려보고 현실을 인식했다.
과거에서만. 오로지 과거에서만 가능하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원수를 더욱 더 증오하라 - 하여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싶었던 냉혹한 살인자에게로 얌전히 고개를 돌렸다.

버림받은 강아지 신세로 전락했던 제로스는 이제야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냐며 무척이나 반색했다.
『이제사 저에게 눈길을 주시는군요. 정말이지 반갑습니다, 제르가디스씨. 열흘하고 반나절만에 다시 뵙게 되어서 이 제로스는 무척이나 기쁩니다. 솔직히 이런 같잖은 소동을 벌려 당신을 밖으로 끌어낸 보람이 있는데요?』
『보람 같은 소리. 그나저나 일하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군. 예전엔 신경질적이다 싶을 정도로 조용히 일을 마무리 짓던 네가 이런 식으로 난폭하고 요란하기 짝이 없는 쇼 타임을 가질 줄을 몰랐어. 예의 신관용 석장을 멀직히 집어 던진 탓에 늙은이 같던 행동도 사라진 거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만 마족의 성깔까지도 화끈하게 변하는 모양이군.』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며 제로스가 말했다.
『그거... 분명 칭찬은 아니죠?』
『난폭하다고 했잖아. 마족에겐 충분히 칭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으응. 좋아요. 당신이 그렇다고 하신다면... 뉘앙스가 좀 수상하긴 했지만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그럼 제르가디스씨? 그것에 대한 답례를...』

답례?
깜짝 놀라 검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솔직히 말해 그건 순전히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울러 부질 없는 짓이기도 했다.
검을 뽑으면 뭐하나. 실력으로 따지면 이쪽은 장난감 새와 다를 바 없다. 필사적으로 발버둥을 친다 할지라도 겨우 몇 분 정도 버티는 것이 고작일 터, 저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어깨에 한기가 드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소를 띈 마족의 모습이 청은색 눈동자에 고스란히 반사되었다. 게다가 그 반사되는 이미지는 급속도로 크기가 커져 갔다.
코 앞으로까지 다가와 손가락을 뻗어 병아리를 움켜쥐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게임 오버. 술래는 잡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가운 손가락이 뒷 목덜미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기를 쓰고 버둥거려 도망가고자 했지만 빠지지가 않는다. 고개조차 마음대로 돌릴 수가 없다.
장미 향과 계피 냄새가 섞인 체취가 코를 통해 스며들었다. 불쾌감 이전에 소름이 돋아 참을 수가 없다. 까딱하면 목이 부러지게 생겼다는 것도 잊었다.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체취다. 봉인된 기억이 자물쇠를 부수고 튀어나와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따뜻한 코코아에 넣어 마시던... 계피 가루 냄새.
섞여서 코를 간질이는 건 눈물이 나도록 그립고, 또 그리운...
소중한 여자의, 여자 아이의.

『싫다! 싫다고!』
제르가디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뽑으려 했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제대로 반항은 해볼 작정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소드 마스터다. 고양이가 살갗을 할퀴는 것에 불과할지언정 뽑고 보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쥔 제로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무엇을 떠올린 거죠.』
이어진 건 의외의 행동이었다.
옴짝달짝 못하고 있는 제르가디스를 향해 매끄러운 입술이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며 들어왔다. 억지로 입 맞추는 행위에선 온기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냉동시킨 시체처럼 차갑다... 매끈한 뺨에서 희미하게 가랑비 냄새와 먼지 냄새가 풍겼다.
『뭐, 뭐하는...』
『나쁜 사람이네. 심장이 뛰고 있잖아요.』
점자책을 읽어 나가는 맹인의 그것처럼 제로스의 손가락이 제르가디스의 목덜미 위로 섬세하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기겁을 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덕분에 가슴이 더욱 밀착되었다.
혀가 다시 밀고 들어왔다. 집요하고 끈질긴 탐색이다. 아랫입술을 빨았다가 다시 놓는다. 그리고 혀 끝으로 문질렀다.

『무드가 영 꽝이네. 눈을 감아 주시면...?』
『거절하겠다.』
연인처럼 키스할 수는 없다. 이를 악물고 거부 의사를 표시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허어, 벌써 굳어버리긴.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요.』
귓불에 키스하며 제로스는 키득 소리를 냈다.
예민한 부위가 자극받자 제르가디스는 금방 창백해졌다.

『더러운 놈.』
『어제도 머리를 감고 목욕했습니다.』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
『아뇨? 모릅니다. 그러니 가르쳐 주세요. 그 입으로 말해줘요. 나에게 말해봐요.』
『나쁜 놈!』
『아아. 그렇게 화내지 말아주세요. 나에겐 오직 당신밖에 없으니까. 이건 솔직한 나의 심정... 정말이지 전 항상 당신만을 생각했어요.』

남이 들으면 대단한 고백이다.
그러나 제르가디스는 속지 않았다.
『웃기지 말아. 너야말로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런 속 보이는 거짓말을 왜 나에게 늘어놓는 거지. 나는 리나가 아니야. 그리고 그 대사는 나에게 향해진 것도 아니야. 넌 그 대사를 이미 오래 전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리나에게 꺼냈었지. 난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그 댓가로 넌 무려 3일 동안 빨랫방망이로 엄청나게 두둘겨 맞았지. 둔치 가우리가 시키는 대로 대야 한 가득 물을 받아 오고, 아멜리아가 마을로 내려가 빨랫집게를 빌려왔었지. 빨래판 위로 혹독하게 구겨진 네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뭐가 솔직한 심정이고, 뭐가 진심이라는 거냐. 너는 항상...』
『항상 뭐요. 늘 거짓말만 하고 있다?』

제로스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크게 치켜 뜬 보라색 눈동자 속으로 사나운 폭풍이 몰아쳤다. 자세를 바꿔 제르가디스의 한쪽 팔을 움켜쥐고는 뒤로 비틀어 안았다.

『아윽!』
『그렇게 남의 속을 휘저으니 기분 좋으십니까. 센스 한 번 대단하십니다. 그래요. 당신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뭐요. 댁이 뭘 알아.』
제로스는 마족의 진실된 얼굴을 하고 제르가디스를 응시했다.
모르는 사이에 새된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 그만!』
언젠가 아멜리아는 제로스의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으면서 동시에 세차게 튕겨 나온다. 정신을 갈고리 발톱으로 후벼판다. 천 톤 무게의 바위로 단단히 짓누른다는 느낌이다. 그 눈동자 너머로 일렁이는 파멸의 세계가 두렵다.
죽음을 너머선 완전무결의 無.
갈기갈기 찢겨져 해체되는 건 육체가 아닌 정신.

『그녀가 당신을「나의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않았어도... 그놈의 망할 피의 맹세가 아니었다면... 빌어먹을. 나를 더 이상 화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장난은 그만합시다. 그러니까 제르가디스씨? 이제 그만 슬슬 우리들의 소유물을 돌려주시죠. 도둑질은 우아한 당신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소유물이라. 그거 무지 기분 나쁜 단어로군. 사전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단어야.』
『이 와중에도 말장난입니까. 계속 이러시면 저, 화내겠어요.』
『이미 화내고 있잖아.』

그것도 불처럼 화를 내고 있음이다.
팔을 잡은 손아귀로 어찌나 힘을 주었던지 손톱이 살점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옷자락 위로 선명하게 피가 베어나왔다.
윽 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돌로 덮힌 피부를 뚫고 근육을 파먹고... 아프다. 지독하게 아프다!

『제르가디스씨. 다시 한 번 말하겠어요. 그.것.을 어디에 숨기셨나요?』
광기에 가깝다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집요하게 쳐다보는 그 시선에 숨이 막혔다.
『모른다.』
팔을 잡은 제로스의 손아귀로 한층 힘이 더해졌다. 느끼는 고통은 배로 늘어났다.
살갗이 깨졌다. 이번엔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주저 앉았다. 이미 뼛속까지 손가락이 닿아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뼈까지 끊어버리는 것은 식은죽 먹기처럼 간단할 거다.
이미 어깨를 지나 가슴 부분까지 붉게 젖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하얀 옷의 마검사가 아니었다.

『팔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들은 채로 제로스가 나지막히 경고했다.
『숟가락조차 들지 못하게 만들 수 있어요.』
『팔을 잘라내시겠다? 전날 내가 날려버린 네 팔뚝에 대한 복수인 건가. 이는 이, 눈에는 눈?』
『호오.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정말 그랬었다면 당신은 이미 가루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이 십수년 전에 내게 한 행동을 생각한다면야 곱게 으깨어 물에 타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죠. 자아... 제르가디스?』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제로스는 상처 입은 그의 팔을 위로 세차게 잡아당겼다.
순간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악!』
『말해요, 당신. 우리들의 소유물을 어디로 숨겼지요?』
『이...정도...론 어림...없어. 안 가...르쳐 주...겠다.』

순간 벽 안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다.
「시, 싫어. 제, 제르가... 우웁.」
꺽꺽 숨 넘어가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곧바로 조용해졌다. 정강이를 걷어차고 반항했어도 에워싸고 있는 사람 수가 열이 넘는다. 사내들에게 강제로 입이 틀어막힌 모양이다. 제압은 순식간이었고 여자는 끽 소리 내지 못 했다.
그러나 분명 실수다. 
제로스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는 걸 제르가디스는 알아차렸다.

「들켰어. 죄다 들켰어. 그렇게 떠들면 어쩌자는 거야.」

피가 말라간다.
제로스는.
저 아일 밖으로 끄집어내다가...
그대로 두동강이 내버릴 것이다.

『시선을 돌리지 말아요, 제르가디스씨. 벽장 속의 하찮은 쥐새끼들에게 신경을 쓰다니요.』
순간 머릿속에서 전구가 번쩍했다.
어- 하는 표정이 되어 제로스를 응시했다.
마족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눈썹을 찡그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아. 이번 한 번만 다시 묻겠어요. 그 아일 어디로 숨겼지요?』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거... 농담이지?』
『전 농담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다시 물어도 대답은 같아. 난 모른다. 그 아인 도망쳤어.』
『흐응.』

그리 말한 제로스는 입 모양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재빨리 속삭였다.
《서둘러요, 시간을 낭비하거나 하진 말아.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요.》
《뭐...?》
《모르는 척 하거나 하면 정말로 죽여 버릴 테야. 때가 왔습니다. 자아, 제르가디스씨...?》

나무토막 버리듯 제르가디스의 팔을 놓아버렸다.
몸이 기울어졌다. 그대로 제르가디스는 바닥에 얼굴을 박고 쓰러졌다.
개처럼 헐떡대는 거친 숨소리만이 그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제로스는 흡사 누구 들으라는 듯 짐짓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도망쳤군요. 잘 알겠어요. 괜히 헛걸음을 했군. 그럼 전 지금부터 그 아이의 흔적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먼지를 탁탁 털며 마족은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제...로스? 너...?』
마족은 그답지 않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안돼! 그건 허락할 수 없어요.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마세요.』
『어째서...』
『어째서냐고요?』

제로스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보란 듯이 손가락 하나를 탁 튕겼다.
『잊었습니까?』
순간 장식장에 진열된 오만가지의 술병이 일시에 박살이 났다. 술은 주변을 뒤덮은 핏자국과 피냄새를 죄다 지워버렸다.
『저는 마족입니다.』
그것이 그의 작별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