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편 일곱 - 냉혹한 미소의 방문자 1

때아닌 가랑비가 하루종일 질척질척 내렸다.
우산을 쓰자니 귀찮고 그냥 가자니 머리카락이 더러워지는 것이 영 신경 쓰인다.
흡사 어항 속을 연상시키는 눅진한 습기는 하나의 덩어리로 꽉 차올라 길 가던 사람들을 한층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빨래가 제때 마르지 않을 적에 나는 그런 퀴퀴한 냄새가 골목마다 코를 찔렀다. 보도블럭이 깨진 길바닥은 군데군데 웅덩이진데다가 개울가의 징검다리처럼 미끌거려 아차하다간 넘어지기 딱 알맞았다.
아마 그래서인가 보다. 마을은 음습함으로 이미 짜부라졌다.

아직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형편없이 술에 취한 남자들은 술병을 집어 던지며 예의 한바탕 소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허연 담배 연기가 무슨 아궁이 장작더미 타듯 피어올랐다. 담뱃내는 오만가지 찌꺼기 냄새와 섞여 그야말로 눈을 뜰 수조차 없게 만드는 악취로 다가왔다.
그래도 이미 익숙해진 냄새다. 코가 마비된 사내들은 때가 잔뜩 낀 몸뚱이와 기름진 머리를 긁어대며 끼리끼리 낯뜨거운 욕설을 주거니 받았다. 가끔씩 지붕이 떠나가라 호탕하게 웃는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웠다. 황소의 웃음에 맞추어 엉덩이를 원색적으로 까발린 거리의 여자들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소란스러움... 짧은 향락의 밤.

그런데 그날따라 난잡한 풍경 속으로 묘한 이질적인 존재 하나가 슬그머니 끼어 들었다.
그랬다. 더러운 쓰레기통 사이로 매끈하게 잘 빠진 검은 색의 물고기 한 마리가 비늘을 번득이며 유유히 헤엄을 쳤다.
소지품이라고는 오른쪽 가슴을 가로질러 걸친 낡은 갈색의 가죽 가방이 전부.
단아한 디자인의 검정색 옷을 입은 청년은 하늘에서 비가 오든 말든 별 개의치 않고 느긋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오랫동안 우산도 없이 걸어다녔는지 싸구려 여행용 로브의 끝자락은 이미 푹 젖어 있었다. 짙은 보랏빛의 머리카락 역시 축축하게 젖어 이마 아래로 드리워졌다.
피곤해서일까. 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사람 틈새에서 사내는 마치 깊은 심해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물고기인양 앞으로 걸어갔다.

수분... 물방울... 물고기는 언제나 목이 말랐다.

『이봐∼요, 새침떼기 예쁜 도련님. 어딜 그리 가시나? 재미 보려고 구경나왔수? 어때요. 누나가 맘먹고 좋은 거 해줄까? 따뜻하게 해주지. 생각 있으면 말만 해요.』
하얀 밀납을 곱게 얼굴에 펴 바른 금발의 여자 하나가 건물의 처마 밑에서 인위적인 교성을 냈다. 짧은 스커트 자락을 슬그머니 치켜 올려 두툼한 안쪽 허벅지 살을 보여주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은화 두개만 내요. 기절시켜 줄게.』
어지간한 남자라면 군침을 흘릴만한 포즈로 가슴의 깊은 굴곡을 자랑했다.
『입으로도 서비스해줄 수 있어. 으응. 날 가지고 싶지 않아?』

그러나 문제는 그 청년이 어지간한 남자가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청년은 차분히 미소지으며 자신을 붙잡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상냥해 보이는 입술이었다. 하지만 짙은 자수정 빛깔의 눈동자엔 폭발하듯 불쾌감이 떠올랐다.
사내는 팔을 잡으려 하는 여자를 밀었다.
『제 몸에 손대지 말아주세요.』

단지 그뿐이었다. 욕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공손히, 얌전하게, 손을 떼라고 요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엉겨붙으려 하던 여자는 비명을 지르려 했다. 입 냄새 뒤섞인 커다란 숨이 토해졌다. 강도라도 만났다. 크게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감자 깍는 칼로 썰어내도 될 만큼 두껍게 분칠을 한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잔 금이 갈 지경이었다.
『하지 마, 하지 말아요!』
여자는 기다시피 해서 달아났다.

남자의 입장에선 그저 황당할 따름이었다. 남의 얼굴을 보고 그런 식으로...
『뭡니까! 내가 어떻게 생겼다고 그러는 겁니까. 숙녀에게 실례잖아요!』
도대체 누가 숙녀라는 것?
아무튼 샐쭉한 표정이 되어 한참을 투덜거렸다.

사내는 괴물 납시었소- 반응이 영 신경쓰였던 모양이다. 고개를 돌려 불 꺼진 쇼 윈도우로 코를 박고 유리창에 비쳐진 자기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음음, 코는 하나. 눈썹은 둘. 이 사이로 고춧가루는 끼지 않았음.
내심 불안했던 걸까. 콧등을 누르고 뺨을 잡아당겼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이마를 비볐다.
『잘 생기기만 했네. 못된 인간의 여자. 이마에 뿔 났다며 난리 치긴.』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확실히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유리창에 비친 갸르스름한 얼굴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물기를 촉촉히 머금은 보랏빛의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고, 피부는 여자처럼 고왔다. 솜씨 좋은 조각가가 손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콧날은 단아하다. 살집이 오른 입술은 키스하듯 눌러대면 느낌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가 좋지 않았다. 방실방실 웃는 얼굴이긴 하지만 그놈의 미소라는 것이 남이 볼 때엔 영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칼날이 숨겨져 있다. 어찌 보면 비웃음에 가깝다. 피 냄새가 느껴진다. 살기등등하고 비릿하다.
『...』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어엿한 순마족 제로스였으니까.

다소 귀에 거슬리는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잡아 당겼다.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밖에까지 울려퍼졌다.
허름한 술집이었다. 입구서부터 난장판, 좁고 더러운 벽에 건장한 사람들이 엉덩이를 깔고 앉아 시덥잖은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쉽게 접근이 불가하다. 멀리 돌아가는게 안전하겠다.
얼핏 눈에 들어오는 내부는 온통 현란한 색채의 바다다. 분홍색과 노란색의 꽃무늬 벽지가 사방에 둘러진 가운데 허공에 매어달린 고래기름 등잔이 눈이 아프도록 이리저리 흔들렸다. 덕분에 곤드레만드레 술에 취에 골아 떨어진 인간들의 군상이 마치 무시무시한 래비아단 괴물처럼 보이고 있다.
짙은 담배 연기가 자욱해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다.
모래와 뒤섞여 미친 듯이 깔깔거리는 소음이 귀를 때린다.
병째로 술을 들이키는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제각각 여자들을 겨드랑이에 꿰차고서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점액질로 막을 두른 피부와 피부가 어지럽게 교차한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젓가슴을 주무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치맛단 속으로 손을 밀어넣고 안쪽 살을 쓸어내렸다. 다리와 다리가 엇갈리면서 짙은 애무가 펼쳐졌다. 어딘가로부터 정액 냄새가 난다.
제로스는 인상을 찌푸리며 짐짓 콧구멍을 가렸다.

『여어, 귀여운 언니!』
언니가 아니라니까!
『뭘 그렇게 보고 있어? 어때. 나랑 한 번 해보지 않을래? 구경만 말고 언니도 즐겨야지. 내가 확실하게 천국으로 보내 줄게. 응?』
끈적거리는 손길이 어깨를 붙잡았다. 허락도 없이 다짜고짜 허리를 감싸쥐었다.
일말의 배려라는 것도 없고 친절함도 없다. 이래선 강간 무드다. 겁탈하듯 품에 안고 벽으로 몰아세웠다. 솥뚜껑처럼 생긴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마구 주물러댔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으로 끌어당겨 하반신을 비벼댔다.
바로 코앞에서 푹푹 내뿜는 썩은 시궁창 냄새 때문에 골치가 다 아파왔다.
제로스는 답지 않게 벌컥 짜증을 냈다.

『그만해요. 그 더러운 혓바닥으로 어딜 핥는 겁니까. 지금 내 기분은 최악이니까 당장 멈춰요.』
『이야∼!! 그렇게 쏘아 보긴. 가시가 많은 장미는 이래서 맛이 그만이라니까.』
곱게 말을 알아들을 상대가 아니다. 술취한 사내의 손길은 점차 엉덩이 굴곡을 따라 안쪽으로 위태롭게 파고 들었다. 더듬는 손길이 조급하다 못해 빨라졌다. 남자의 호흡이 가빠졌다. 여길 이렇게, 이렇게 쓰다듬어서, 손가락으로 구멍 부위를 살짝 눌러서...
그러다 깜짝 놀라 손을 뗐다. 취기가 싹 가셨다.
가랭이 사이로 자신과 마찬가지로 묵직한 놈이 달려 있다. 그것도 표준 사이즈보다 좀 크다.
『남자잖아!』

제로스는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식으로 피식 웃었다.
화를 내고 싶은 건 오히려 이쪽이다. 그런데 저쪽이 되려 손이 썩는다며 펄펄 뛰고 있다.
기분 나쁘다.
『예의라곤 눈꼽만큼도 없군. 손만 썩지 말고 다른 것도 한 번 썩어 보시지.』
남자의 가슴 위로 손가락 하나를 가져갔다. 순간 푸른색 불꽃이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작은 빛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했다.
주정뱅이의 눈이 확 벌어졌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물 먹은 솜뭉치처럼 맥없이 주저앉았다.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오줌을 흥건히 싸기 시작했다.
『쓰레기.』
망설임 없이 널부러진 몸뚱이를 확실하게 밟았다.

잠시 잠깐의 소동은 잊자. 쥐의 시체는 그대로 썩어갈 것이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사람들을 어깨로 힘들게 밀어대며 안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거울이 달린 카운터 앞으로 사람 셋이 서 있었다.
『여어, 이 근방에선 못 보던 젊은이로구먼. 지나가는 여행객이우?』
앞머리가 살짝 벗겨진 바텐더가 제로스를 향해 흘깃 시선을 던졌다. 손목을 기교적으로 돌려 칵테일 글라스를 뽀독뽀독 소리가 나도록 닦아내던 동작엔 멈춤이 없었다. 아니, 되려 더 빨리지는 듯하다.
표정은 구겨진 걸레 그 자체.
낯선 청년이 대단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바텐더는 기분 나쁘다는 내색을 감추지도 않고서 제로스를 위아래로 빤~히 흩어보았다. 주문을 받을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되려 내쫓을 눈치다.

『곱상하게 생긴 것이 술도 무쟈게 못마시게 생겼구먼. 침대를 덥혀줄 남자라도 찾으러 나왔수? 그 잘난 똥구멍을 거시기로 후벼줄 작자 말이야.』
『아닌데요.』
『저런. 내가 실수했네. 그렇게 여자에게 깔리고 싶었어? 그런데 형씨, 내가 충고 하나 할까. 댁처럼 몸이 비실거려선 여자들이 안 좋아해. 금화를 준다고 해도 안 쳐다봐. 그러니 맹물이나 드시고 열기나 식히셔.』
바텐더의 이죽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술꾼 하나가 커다란 유리컵에 넘실거리도록 물을 담아 건냈다.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그들은 하나같이 낯선 방문자를 달가워 하지 않았다.

의도적인 도발에 제로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차가운 맹물이라... 나쁘진 않죠.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닌데요.』
그리 말하며 자신의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텐더의 인상이 구겨졌다.
힘든 노동이라는 걸 모르는 귀부인의 손이었다. 손가락을 탐스럽게 장식한 붉은 보석 반지 하나가 조명을 받아 영롱한 빛을 내뿜었다.
설마, 저 손등에 존경의 키스하라는 건가.
- 라고 해도 검지 손가락으로 자기 목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으니 그건 아닌 듯 싶다.
유리잔을 닦아내던 손수건을 허공에 대고 탁탁 털었다. 웃자. 웃으라고 한 짓일게다. 이날 이때까지 별 지랄같은 인간들과 마주했던 그였지만 이런 식의 반응을 보이는 남자는 어디까지나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깟 손으로 뭘 하겠다고? 앙 소리를 내가며 손가락을 덥석 깨무는 시늉을 해 보였다.

『허허허! 이봐? 지금 나랑 지금 놀자고? 웃겨 죽겠구먼. 이보게, 자넨 지금 실수한게야. 시체로 변해 바깥으로 내던져지고 싶은 건가? 건방떨지 말고 저리 가시지. 음료수를 주문하지 않으려면 당장 나가. 용건이 있다면 정중히 머리를 숙이고 부탁을 해. 저쪽에서 우릴 보고 있는 녀석들이 하나같이 인상을 쓰고 있구먼. 자네의 바보 같은 행동이 그들의 예민한 신경을 건들이고 있는 모양일세. 아, 참고로 말해두지만 그들은 꽤나 거칠지. 게다가 불행인지 다행인지 놈들은 날 아주 좋아해. 자, 이제 알아들었어? 알았으면 저리 꺼져.』

그게 신호였던지 구석에서 처박혀 얌전히 술만 마시던 남자들이 부스스 일어났다. 여자를 무릎에 올려놓고 한창 재미를 보려던 것도 망설임 없이 뒤로 미루었다. 술병을 테이블 위로 올려놓고 의자를 거칠게 뒤로 밀었다. 묘한 표정이 입가로 올라왔다.
언제 시끄러웠느냐는 듯, 가게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간간히 터지는 헛기침이 전부라고나 할까, 음악소리는 이미 오래 전에 멈추었다.
거칠고 호기심 많은 여자들이 어서 피를 보길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모두의 눈이 하나같이 희번득거리기 시작했다.
싸움이다, 싸움!
사내들 중 하나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검집에서 날카로운 검을 끄집어 손에 쥐었다.

『이 기생 오래비 같은 놈아. 네 놈의 버르장머리를 원망하라구. 안됐지만 죽어줘야겠다.』
그런데 겁 주기가 안 통한다.
제로스가 뒷짐을 지고 사내를 응시했다.
『절 죽여요? 천 년은 빠릅니다. 어째서 당신들은 겉모양만 가지고 상대를 판단하길 좋아하는 거죠? 이따위 거죽 너머로 무엇이 보이는지 잘 살펴봐야 오래 살지요.』
『하! 뭘 믿는 건지 모르겠다만...』
『믿는 건 없습니다. 제 자신조차 믿지 않고 있는데요. 말썽 부리지 말고 참아야지, 하고 생각해도 손이 먼저 나가버립니다. 바로 이렇게요.』

바로 그 순간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기가 부드럽게 움직인다 싶었는데 갑작스런 외마디 비명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오른 팔이 어깨서부터 뿌리째 잘려져 나갔다. 절단면이 얼음처럼 매끄럽다. 피범벅이 된 사내가 세상이 떠나가라 악을 쓰며 바닥을 뒹굴었다.
낯선 이방인이 일방적으로 두둘겨 맞을 걸 생각하던 이들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 하나를 손가락으로 날개 찢어진 똥파리 뭉개듯 쉽게 망가뜨렸다?

『이, 이게! 도깨비 같은 놈!!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아무 짓도.』
『거짓말 마라. 이야압~!!』
그 외침이 신호가 된 모양이다. 검을 쥔 남자들이 와아아 함성을 질러가며 일제히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아앙~!!
일제히 쏟아져 내려오는 수십개의 칼날을 단 하나의 손가락으로 간단하게 막아내었다.
사람이 아니다?
사내들의 눈동자에 공포의 빛이 넘실거렸다.

제로스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놀아줄 거예요?』
순간 가게 내의 모든 사람이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람 살려! 사, 사람 살려! 괴물이다아아!!』
서로 도망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수의 사람이 서로 내가 먼저 나가겠다고 난리를 치던 탓에 정작 문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힘 없는 여자들 몇 명은 뒤에서 밀어대는 손길에 앞으로 넘어졌다. 하지만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도나도 밟아대며 날뛰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넘어진 사람들은 생으로 죽어 나갔다. 코가 깨졌고 어깨가 탈골되었다. 이마가 찢어졌고 귀가 떨어져 나갔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즐겁다. 이런 걸 보고 날뛰는 양떼들을 유린하는 즐거움이라 하려나.
달밤에 체조라도 하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두 팔을 휘둘렀다. 잡히는 족족 사람이다. 손만 뻗으면 되었다. 쥐고, 비튼다. 잡고, 흔들고, 놓았다 다시 당긴다.

죽으라지.
나무토막을 둘로 분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으아악!』
맞는 사람 입장에선 달밤의 체조는 분명 아니다. 주먹맛이 장난이 아니었음이다.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뼈가 부러진 팔이 해파리처럼 흐믈거렸다. 전의를 상실하여 도망치려 하자 얼굴에 발길질이 날아왔다. 울상을 짓던 사내의 얼굴이 180° 돌아갔다. 여전히 몸은 앞을 보고 있는 채였지만 머리는 뒷통수만 보였다.

『이런 식의 재미없는 장난을 걸어온 당신들이 나빠요. 저는 본디 선하게 창조되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저의 참을성을 시험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지요. 자아, 이제 알겠나요? 알아들었으면 얌전히 뒤로 물러서세요.』

색깔이라고는 없는, 그야말로 무채색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오히려 두려웠다.
그나마 아직까지 두 다리로 서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시키는대로 얌전히 뒤로 물러났다.
그때까지도 포기 못하고 검을 만지작거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간댕이 큰 녀석도 간혹 한두 명 보이긴 했지만... 아서라. 덤벼서 몸이 안 남겠다.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제로스는 손을 털고 다시금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인정하자. 졌다. 안색이 핼쓱해져선 윤이 나도록 닦은 유리잔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져 박살을 냈다.
이어지는 건 나지막한 한숨이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당신 맘대로 하쇼! 삶던지 굽던지... 맘대로 해!』
『진작 그렇게 나왔으면 좋잖아요.』

언제 피바람이 불었느냐는 식이다.
나무 기둥에 몸을 비스듬히 걸치고 서선 한가롭게 손톱을 탁탁 튕겼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물어보지요. 당신들의 써드 마스터는 지금 어디로 숨었죠?』
『써드 마스터님이라니? 난 전혀 모르는 일...』
『전혀 모른다?』
그 입에 침은 바르셨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손톱 장난이다.
『방금 전의 소동이 교훈이 되지는 않았나요.』
『아무리 그래도 소용 없소. 미안하게 되었수다. 우린 가족을 팔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나에게 대답을 들을 기대랑 아예 하지도 마쇼. 그냥 입을 찢으라니까.』
『오호라, 대답을 기대하지도 마라... 그거 아쉬운 일이군요. 이대로 죽으시겠다? 잘 알았어요.』

싱겁다는 듯이 손가락을 들어 바텐더의 이마를 정확하게 가리켰다.
그게 무슨 뜻인지, 이제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싫든 좋든 입이 무거운 적군 포로는 가차 없이 총살되는 법... 살려달라 구차하게 빌지 말고 명예롭게 죽음을 맞이하자. 바텐더는 차렷 자세를 취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만!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사람을 죽이지 마.』

슬그머니 눈을 들어 그들 사이로 끼어든 제3의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티 하나 없는 하얀 색의 옷차림, 깊게 눌러 쓴 후드와 머플러, 호리호리한 몸매, 불길하게 번득이는 눈동자와 옆구리를 장식한 단아한 검 한 자루.
아직 소년이라는 느낌의 그림자.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며 다며 바텐더가 자기 혀를 깨물었다.
『죄송합니다요, 써드 마스터 제르가디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