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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5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운심부지처에서의 일정은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여 정해진 장소로 이동, 군대식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업무에 들어갔다. 내가 맡은 일은 청소로 도서관인 장서각과 기숙사인 도심실을 돌며 일을 했다.
접객용으로 쓰는 아실이나 초혼을 하는 장소인 명실과 같은 곳에는 원천적으로 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이동 경로가 짧은 편이었다.
오후부터는 짬을 내어 글공부를 했다. 베껴 쓰기가 끝나면 다시 청소를 해야 했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택무군에게 불려가 개인적으로 숙제검사를 받았다.
해가 지면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저녁식사를 끝마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취침 시간이었다.

원래 하인들은 네 명이서 한 방을 사용했다.
나는 별도로 준비된 작은 방에서 혼자 잤는데 몸에 흉터가 많다며 다른 이들이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피부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고작 흉터일 뿐인데 엄청 질색했다.
‘저렇게 맞은 자국이 많은 걸 보면 분명 큰 잘못을 저질렀을 거야. 도둑질을 하다 걸렸겠지.’
의심이 많은 자들은 내가 비싼 물건을 훔치지 않는지 뒤에서 감시했다.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든 말든 글자 외우는 일이 벅차 그 사람들이 날 뭐라고 모함하든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 신라면의 매울 신(辛)과 행복할 행(幸) 구분도 어려워했다.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기까지 하니 짧은 시간 내 생활한자 3천개를 달달 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노력하고 있잖니. 응용력은 없지만 암기력은 그만하면 뛰어난 편이다.”
숙제검사를 하던 택무군이 아정집 필사는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며 빙긋 웃었다.
쓰는 건 여전히 어려워해도 읽는 건 그럭저럭 잘 맞추는 편이라면서 칭찬 아닌 칭찬도 해줬다.
그러면서 다시 내민 건 남씨 자제들에게 내려오는 선조들의 귀한 가르침을 적은 예측편이었다.

정말로 내켜하지 않아하며 구름무늬로 덮인 표지를 넘겼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정과 의를 바로 세워라.’
‘검을 들어 악을 벌해도 마음이 거울 같지 않다면 세상 이치를 모두 놓친 것이다.’
‘도의를 밝히는 것이 군자이고, 이득을 계산하는 것은 소인이다.’
좋은 말씀이다.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표정이 절로 소태 씹은 모양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건 ‘만화보다 재밌는 초등학생 문장 독해’ 이런 거라고 꼭 말하고 싶다.

“다른 제자들도 걸람처럼 공부에 열심을 다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이걸 베낀다는 말은 아직 입에 담지도 않았습니다, 택무군.
“다들 글은 멀리하고 흐트러진 마음으로 작은 악을 지인에게 권하고들 있으니 정말 큰일이야.”
언제부터 연애편지가 작은 악이 된 건가요.
일련의 돌아가는 걸 꿰고 있던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구자씨 집에서 공부하러 온 한 여학생이 연애소설을 가져와 안서각에 숨겨두고 읽다 들켰다는 건 이미 알려진 이야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계인 선생님이 뒷목을 잡을 일이 후속으로 터졌는데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자들 사이에서 연서를 쓰자고 서로를 부추겼다는 거다.
남녀가 유별하니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편지를 써도 배달이 될 일이 없건만.
가랑잎 굴러가는 모습에 까르르 웃는 소녀들은 가상의 로미오에게 열렬하게 마음을 고백하는 글을 적어 누가 더 애절하게 표현했는지를 겨루었다.
그렇게 있지도 않은 로미오와의 포옹을 상상하며 푹 빠져버리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죽겠건만 그들 중 한 명이 함광군을 상대로 절절하게 연서를 썼다.
선자들 중 함광군을 사모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걸 또 꺅꺅 소리를 질러가며 만장하신 가운데 소리 내어 읽어댄다. 좋은 시절이다.

“어쩌겠어요. 한창 그쪽으로 관심이 많을 때죠. 하지 말라고 하면 몰래 숨어서 더 할 걸요?”
“이미 다 해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다 해봤죠. 고백하고 차여본 게 몇 번인데요. 진지한 관계까지 가본 건 딱 한 번이지만 결혼 고민은 해보지 않았으니 잘 헤어진 것도 같고...”
“자네, 올해 몇 살인가?”
“......!”
가끔 이런 식으로 실수를 해서 난처해 죽겠다.
택무군은 표정에 그다지 큰 변화가 없는 상태로 내가 대답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어딘지 무관심해 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로 꾸며내는 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럴 적마다 나는 입을 그냥 다물어버리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갈등했다.

에라, 모르겠다.
“서른넷에 다시 스물하나를 더하는 건 많이 이상하죠?”
“일단 자네는 쉰다섯의 나이로는 보이지 않아.”
“그래도 열셋은 진짜 아니거든요?”
“좋게 생각하자. 예측편을 배움에 있어 부족함이 없는 나이다. 그럼 오늘부터 옮겨 적기를 시작하고... 다음번에 올 적에 여기까지 외워오게.”
“택무군. 분량이 너무 많습니다.”
“배움은 벼를 길러 쌀을 얻는 것과 같지. 많이 수확하면 수확할수록 좋은 것이야.”
“많이 수확을 해봤자 어차피 가규로 내세워 밥 세 그릇 이상은 못 먹게 하면서!”
내 항의를 들은 택무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래도 분량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그래, 내가 이거 다 떼고 조만간 산을 내려가고야 만다.

고소의 등불은 일찍 꺼진다.
취침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모두가 일사불란에게 잠자리에 든다.
하인들은 문하생과 달리 취침시간에 크게 구애받진 않았으나 불을 켜는 초가 귀한 탓에 어차피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게다가 기상 시간이 꼭두새벽이니 늦게 잠들면 잠들수록 다음날이 고되었기에 해시가 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초를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으로 베개를 꾸셔 넣어 사람이 누운 모양을 만든 뒤, 장서각에서 훔쳐낸 초를 쥐고 으슥한 뒷길로 들어갔다. 귀가 예민한 사람들이 많아 행동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들키면 배가 아파 뒷간에 가는 거라고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는데 긴장을 해서 그런지 진짜로 배가 살살 쓰라렸다. 아랫배에 힘을 줘도 똥이 안 나오는 몸인데 장이 왜 아픈 건지 모르겠다.
실수로 나뭇잎을 밟았는지 바스락 소리가 났다. 지뢰라도 밟았다는 투로 발을 아주 조심스럽게 떼었다.
이러다 순찰 도는 사람을 만나면 잣 되는 거다. 부대 탈영병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몸의 자세를 더 낮췄다. 밤눈이 밝았음 좀 좋으련만, 낮에 몇 번을 찾아오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음에도 방향을 짐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문하생들이 평소에도 걸음을 하지 않는 장소로 ‘냉탕’이라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들어가 정신수양을 하는 곳인데 나 같은 하인은 물을 더럽히면 안 되는 까닭에 입수가 전면 금지되어 있었고, 오직 신분이 높은 분들만 이용을 했다. 그 높은 분들이 옷을 벗고 들어가기에 모두가 접근을 꺼렸다. 혹시라도 명사의 벗은 몸을 눈에 담게 되는 날엔 운심부지처 전체가 뒤집어지기에 자연히 접근금지 지역이 되었다.

미친 것도 아닌데 뼛속까지 아릴 물속에 몸을 담굴 생각은 없다.
대신 사방을 더듬거리며 이동하면서 초를 켜도 들키지 않을 장소를 몰색했다.
바람을 등지고 서서 준비한 부싯돌을 당겼다.
느낌이 워째 축각참배 비슷해서 내가 다 소름끼쳤다. 나무에 대고 못을 박을 짚 인형을 준비해온 것도 아닌데 괜히 으스스했다. 영업시간 끝난 불 꺼진 남탕에 혼자 들어와 분신사바 하는 그런 느낌?
서두르는 게 좋겠다 생각하고 품에 손을 넣어 오래되어 삭아 문드러진 종이를 꺼냈다.

효성진 도장은 나를 결계에 가둔 뒤, 새를 이용하여 모두 세 번 서찰을 보냈다.
처음 보낸 글은 내용이 길었다. 순전히 안부를 묻는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아 나를 자신의 스승인 포산산인에게 데려가겠다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무서운 분이 아니니 근심하지 말라고 했고, 자신도 고아의 신분으로 포산산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포산산인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나를 어떻게 데려가겠다는 설명은 없었다.
대신 포산산인 앞으로 나아갈 때 입고 있어야 할 옷차림새에 대해 장황하게 언급했다.
맨발이어선 안 되고, 무릎이나 겨드랑이에 찢어진 곳이 있어선 안 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화려해서도 안 되고, 분 냄새가 나거나 향수를 뿌려도 안 되었다. 피가 묻어서도 안 된다. 이나 벼룩이 있어서도 안 되었다. 아...... 진짜. 아정집 2탄도 아니고.
더듬더듬 읽어나가던 나는 도중에 멈추고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두 번째 글에선 심각한 이야기가 나왔다. 송자침에게 일이 생겼다고 했다.
“백설관, 공격당하다, 사람이 죽다, 눈을 잃다, 독...”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송자침이 언젠가 말하길,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백설관의 막내가 열셋이라고 했다. 눈이 흐려지는 이유로 어둠을 탓하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한자를 읽어냈어도 해석이 매끄럽지 않아 내가 착각한 건 아닐까.
“공격받다, 백설관, 모두, 죽다, 독, 눈을 잃다, 설양... 싸우다, 장례, 송자침 소식불명...”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흙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울고 싶다? 화가 난다? 슬프다? 어이가 없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품고 받아들이기엔 그건 너무나 거대한 감정이었다.
눈을 깜빡이며 종이를 쓰다듬었다. 누가 눈을 잃었다는 거지? 효성진 도장? 아니면 송자침?
백설관 사람이 모두 죽었다. 독을 풀어 공격했다. 매우 비겁한 술수였다. 독에 중독되어 반격도 못해보고 죽기까지 매우 고통 받은 듯하다. 무려 5년도 더 지난 옛날에.
나는 멍하니 넋을 잃고 계곡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5년 전에 이 글을 읽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글은 대단히 짧아 외마디 비명처럼 느껴졌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 동패(同牌). 신의. 아닐 부. 세가. 서머하다.”

신발을 벗고 계곡으로 들어가 세 장의 종이를 차례대로 물에 담갔다.
가뜩이나 약해진 종이였다. 물을 먹자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처럼 물렁거렸다. 그걸 손으로 하나하나 잘게 풀어 흐르는 물에 떠내려 보냈다. 혹시라도 가라앉는 것이 있을까봐 한참을 첨벙거리기도 했다.
차가운 물에 젖은 몸이 떨려왔다. 신음을 목구멍 깊이 삼키고 한참만에야 기슭으로 올라왔다.
물에 들어올 적엔 몰랐는데 바닥 돌이 제법 매끄러워 여러 번 넘어질 뻔했다.
“됐어, 뙜어. 괜찮아.”
그렇게 균형을 잡고 다 올라와선 다시 흙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고 벗어두었던 신발을 찾았다.
생각해보니 진짜 미친 짓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계곡에서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걸람이 자랐던 소산은 물이 귀해서 헤엄이라는 걸 쳐본 적이 없었고, 전생에서도 나는 고무튜브 없인 수영을 못했었다. 발을 헛디뎌 깊은 곳에 빠졌더라면 물에 둥둥 떴을 거였다.
물론 죽는 일은 없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다.
차라리 물에 빠져 다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언뜻 하며 진흙투성이의 발에 신발을 움켜 넣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30 17:02 2021/11/3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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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4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텍스트툴즈가 구닥다리 버전이라 환장하겠어요. 몸통이 비대해져 이사를 할 엄두도 안 나는데 큰일이다... 이 블로그는 태생이 윈도우7 기반이라고.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남들과 똑같다는 걸 참지 못하는 존재다.
민주주의와 공정, 불평등 타파를 앞세워도 누군가는 순서를 정하고 줄을 세운다.
임원 전용 화장실이라던가, VIP 전용 승강기가 왜 만들어졌는데.
하물며 이 세계에선 귀족과 몸종의 구분이 매우 또렷했다.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나아가 그 태생적 지위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긍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예(禮)’라고 생각했다.
정리하자면,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예절이라는 건 자신의 신분에 맞게 삶을 꾸려가는 자세를 일컫는다.

‘남가에서 예를 중시한다는 건 다시 말해 서열과 귀천을 매우 따진다는 뜻이지. 원래대로라면 나 같은 배추 배달꾼은 감히 이곳 문지방도 못 넘었어. 이거 몹시 피곤하구먼...’

문하생들의 옷도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었다.
구름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은 사람은 신분이 높았고, 문양의 면적이 넓을수록 중요한 위치의 사람이었다. 민무늬 백의는 물어볼 것도 없이 집안이 하찮았다. 설양에게 살해당한 용월 수사도 민무늬 흰옷을 입었으니 제일 밑바닥이었다.
머리의 띠도 그런 식으로 구분을 두어 신분의 차이를 표현했는데 이곳 운심부지처에서 지위가 제일 높은 사람은 ‘선생님’ 호칭으로 불리는 남계인, 그리고 직계인 택무군과 함광군 형제였다.
선생님은 남씨 집안 높은 어르신으로, 하고 있는 머리띠의 무늬가 구름이 아니고 무슨 용의 발톱처럼 구불거렸다. 택무군과 함광군은 집안 가르침을 따라 사치하지 않았으나 옷에 들어간 문양이 정교했다.

하인들은 기본적으로 진흙으로 염색을 한 옷을 입었다. 무난한 갈색이거나 어두운 회색이었다.
흰옷을 입은 문하생들은 갈색으로 염색한 옷을 보면 매번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대신 하인들은 머리를 조아려 존경을 보여야 했다. 그것이 예절이었다.

“어? 걸람이잖아? 애기 도사다!”
청소도구를 챙겨 움직이는 나를 보고 남경의가 아는 체를 했다. 이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비파 열매 먹을래? 달콤하고 시원해.”
그래도 아랫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금기시하지 않았다.
“글공부는 잘 되고 있나요? 경의에게 듣기로 아정집 베끼기를 하고 있다던데 어디까지 외웠어요?”
남사추의 말에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건 전형적인 을에 대한 갑질이었다. 글공부랍시고 자기네 가규를 달달 외우게 만들고 있다.

운심부지처 내에서는 뛰면 안 된다. 밤놀이 금지. 맨발로 다녀서도 안 된다. 도둑질을 하면 안 된다. 불장난을 해서도 안 된다. 물장난도 하지 말아라. 수업을 빼먹어선 안 된다. 식사시 금언. 세 그릇 이상 금지. 젓가락 입에 물기 금지. 휘파람 불지 말아라. 어깨동무 하지 말아라. 귓속말 금지...
이거 뭡니까?!
종이는 매우 귀하고 비싼 물건이다. 나 같은 하인이 낭비하면 안 된다.
그런 까닭에 문하생들이 쓰고 버린 허드레 종류를 얻어 어렵게 베껴 쓰기를 하고 있다.
천자문부터 시작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글공부 교제로 받은 건 남씨네 가규를 모은 아정집이었다.

그런데 여기 남씨 사람들은 대단히 이상하다. ‘윗사람을 공경하라’ 이런 건 아이들에게 가르칠 내용이라 납득할 수 있는데 ‘슴가 꼭쥐스 노출 절대 No, No!’ 이런 쓸데없는 걸 왜 넣어둔 건지??
거기다 내 표정이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보고 도리어 어디가 이상하냐고 반문한다.
침 뱉기 금지, 지저분한 얼굴 금지, 헝클어진 머리 금지, 걸으면서 책 읽기 금지, 반찬투정 금지, 그릇에 음식 남기는 것 금지, 식사 도중 일어나기 금지...
다섯 살 어린이용 ‘처음 배우는 한글’ 교재의 첫머리가 ‘화장실에서 용변 볼 적엔 전화통화 금지!’ 이런 꼬라지면 그 책은 엄마들에게 안 팔린다!

“이거 저도 백 번 옮겨 적으면서 글쓰기를 배웠어요.”
사추가 그리운 추억이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도 벌 받기 과제로 가끔 옮겨 적기도 해요. 경의는 저번 주에 한 번 필사했지? 경내에서 이동하면서 몰래 사과를 먹고 있는 걸 들켜 벌을 받았지.”
“그런 건 말하지 마!”
남경의가 꽥 소리를 내며 화를 냈다.
군것질을 좋아하여 자주 과일을 숨겨두고 먹다 걸린다고 한다. 한창 배고파 할 나이의 청소년이니 좀 봐줄 것이지, 내가 저 나이였을 때엔 햄버거에 김밥, 천하장사 소시지에 컵라면까지 한 번에 흡입했다.

“그런데 사추와 경의는 장서각에 무슨 일로?”
“장서각에 공부하러 오지 다른 볼 일이 있단 말이냐?”
“원래 지금은 수업 시간이잖아.”
“선생님이 청담회 일로 바쁘셔서 이틀 간 자가 학습이야.”
“아이고, 이럴 때일수록 놀아야지. 쓸데없이 성실하구먼.”

하인이 문하생에게 반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그런데 얘네들을 보면 까마득한 후배처럼 보이는지라... 충격으로 뒤섞여버린 내 자아는 꼰대 아저씨에 가까워서 뽀송뽀송한 소년들을 자꾸 툭툭 건드리고 만다.
그런 들 어떠하랴, 이런 들 어떠하랴,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를 겨드랑이에 끼고 장서관에 입장하기에 앞서 능숙하게 신발을 벗었다.
솔직히 걸레질과 빗자루질 둘 중의 어떤 방식이 효과적인 청소방식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여긴 쓸고 닦을 먼지 자체가 적었지만 높은 곳의 먼지를 닦기엔 내 키가 너무 작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고 책은 기본적으로 습기를 싫어하니 환기를 잘해야 했다. 미리 준비하여 가져다둔 의자를 들어 창문 앞에 세웠다. 장서각의 청소는 창문을 활짝 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곳의 창문이 모두 열여섯이라 의자에 올라갔다 내려가는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청소를 한다며 부산을 떠는 모습에 개의치 않고 남사추와 남경의가 서안 앞에 앉았다.
사추는 바로 문방사구를 펼치고 먹을 갈기 시작했는데 남경의는 빈손으로 친구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최근 용무 없이 장서각을 출입하는 문하생의 숫자가 늘었기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여성 수사들이 이용하는 안서각에서 숨겨놓은 연애소설이 나왔단다.
이곳에도 중2병이라는 것이 존재하였기에 타지로 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 중 일부가 사고를 치고 가는 경우가 없지 않아 들켜서는 안 될 금서를 사저에서 가져와 서가에 몰래 숨겨놓고 읽는 일이 종종 있는 모양이었다. 표지를 경전으로 위장하는 수법을 써서 친구들끼리 돌려 읽었는데 눈치 빠른 선배 선자가 알아차리고 이게 과연 언제 들통이 날 것인가를 두고 내기까지 했단다. 열아흐레 되던 날 결국 들켰도, 아무래도 여자라서 체벌은 차마 못하고 주동자들이 반성문을 쓰는 걸로 잘 넘어갔던 것 같다.
대신 이게 수사들 사이에 이야기가 번져 ‘안서각에서 연애소설이 나왔으면 장서각에도 춘화집 같이 은밀한 것이 숨겨져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의심으로 커졌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소년들이 경전으로 위장된 춘화집을 찾으러 장서각에 자주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아니거든!”
얼굴이 벌겋게 변한 남경의가 멀쩡한 사람 모함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난 그런 거에 관심 없거든?!”
말은 그렇게 해도 아까부터 경전 종류만 들었다 놓았다 하더라, 너.

먹을 갈던 남사추는 한숨이 깊었다.
“일지 점수가 을하(乙下)이 나와 다시 고쳐 써야 해서요.”
“그래서 내가 최대한 간단하게 적으라고 했잖아. 선생님은 이것저것 길게 적는 걸 싫어하셔. 그리고 개인적 감정이 들어가면 무조건 감점이라고. 뒷방 노인네가 주책맞게 돈을 써서 어린 여자에게 새 장가를 가려고 했다, 재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서방으로 맞이하게 된 여인이 불쌍했다, 그런 집구석엔 귀신이 붙어도 싸다, 이런 식으로 적지 말랬잖아.”
“그렇게 안 적었거든?!”
남사추가 자기 일지 어디에 그런 문장이 적혀 있냐며 ‘을하’ 점수를 받은 글을 눈높이로 들어 흔들었다. 글자를 배웠지만 여전히 모르는 글이 있어 보고도 해석이 절반만 가능했다.

그러니까 월주 지방으로 돈 많은 상인이 돈을 들여 어린 소녀를 데려와 첩으로 삼았는데 여인이 혼인을 거부하고 목숨을 끊었던 것 같다. 자진(自盡)이라 했으니 맞을 거다.
그래서 원혼을 품은 귀신이 나왔......던 건 아닌 듯하고. 더듬더듬 읽어보니 구하다, 비술로, 금전을 들여, 되살려서, 혼례를 계속하고, 음호부, 이런 내용으로 이어졌다.
“신부가 죽자 지참금을 모두 돌려주게 된 신부의 아버지가 급히 달음박질하여 달려와 음호부로 죽은 딸을 되살리고자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비슷하게도 만들어지지 않은 가짜 음호부로요.”
“뭐, 뭐라?!”
“그렇고말고요. 착잡한 일입니다. 추궁하여 물어보니 이릉에서 도술을 배웠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사기를 쳐서 신부의 아버지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라, 사추야! 음호부의 글자로 어째서 호랑이 호(虎)를 쓰는 건데?!”

뒤통수가 얼얼했다. 나는 지금껏 호부를 호신부(護身符)의 준말로 생각해왔다. 보호할 호(護)를 쓰는 호부 말이다. 그래서 여러 모양새와 물건으로 상상을 했고 막연하게 은붙이나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상서로운 조각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름에 호랑이가 붙으면 너무 뻔해지는 거 아닌가. 그건 호랑이 조각이었다!
‘효성진 도장이 일단 보면 알아차릴 수 있다고 쉽게 말한 까닭이 있었구나! 호랑이였어, 호랑이!’
유레카. 나도 모르게 사추의 손을 꽉 맞잡았다.
“호랑이였구나!”
남경의는 구제불능의 바보를 보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호랑이 말고 뭐라고 생각했는데. 여우(호狐)?”
방해하지 말고 청소나 계속하라며 남경의가 날 물리쳤다. 그리고 시어머니처럼 대나무 발에 쌓인 먼지는 걸레로 하나하나 닦아내야 한다고 잔소리했다.
그래도 자신이 서가에서 꺼내 어지럽힌 책은 본인이 정리할 테니 힘들게 옮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넌 음호부에 관심 두지 마.”
경전을 읽는 척하던 남경의가 깍쟁이 같은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지금까지 운이 좋았던 거야. 아까 말했던 죽은 신부의 아버지와 그에게 가짜 음호부를 팔았던 일당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아? 사마외도라면 치를 떠는 운몽 강씨 수사들이 몰려와 갈가리 찢어버렸다고. 그거로도 성이 차지 않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기까지 매질을 했어. 하필이면 팔아치운 물건이 음호부라서... 거기 종주가 눈이 돌아갔거든. 강씨 종주는 나이가 어리든 많든, 성별이 여성이든 처벌을 함에 있어 가리지 않아. 사마외도라고 의심하면 일단 때리고 보지. 네 몸은 한 대만 맞아도 그냥 두 동강이 날 거다. 그러니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렇고, 절대로 사술잡기나 음호부에 관심 갖지 마.”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있던 자들을 떠올린 건지 소년의 낯빛이 심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나는 호랑이 조각에 대한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쑤시는 통증이 느껴져 여전히 아물지 않은 유일한 가슴 상처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낸 호랑이 조각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은 가짜가 아니다.
저 바깥 어딘가로 아직도 나를 저승에서 불러낸 음호부가 돌아다니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초조해졌다.

Posted by 미야

2021/11/29 11:29 2021/11/2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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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3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고소 남씨 문하생들이 데굴데굴 눈알을 굴려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신을 택무군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시선에 개의치 않아하며 나를 시집오는 새색시처럼 인도하며 구불거리는 길을 올라갔다.
쪽이 팔려도 어쩔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커 계속 자락을 밟아대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되었으니 발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친절한 신사분이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한손으로는 늘어진 옷자락을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는 택무군의 손을 잡고 종종 걸음을 했다.

“그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성은 없습니다. 이름은 걸람입니다. 뛰어날 걸(傑)에 산바람 람(嵐)을 씁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머리에 문제가 생겨 기억을 못하게 되었기에 친절하신 분이 그리 쓰라 바꿔주셨습니다.”
“좋은 이름을 주셨군. 그 친절한 분이 누구인지 기억은 하고?”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걸까 10초 정도 고민했다.
그러다 상대를 속이려면 이름부터 감춰야 했다는 늦은 깨달음이 왔다.
“효성진 도장님입니다.”
“효성진... 명월청풍이었군.”
다음부터는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걸람 대신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회사원 이름을 말해야겠다.
하지만 비루하한 비렁뱅이의 이름을 굳이 궁금해 할 사람도 없을 테니 그야말로 김칫국 드링킹이었다.

제자로 보이는 청년이 묵직한 부피의 책을 들고 가다 에스코트를 받아 걷는 나를 보고 놀라 들고 있던 걸 왕창 놓쳤다. 무려 법전 크기의 책이었다. 발등이 찍힌 그는 비명을 질렀고, 택무군은 상냥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운심부지처에서는 소란 금지다.”
저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택무군을 따라 대나무로 담장이 둘러진 정갈하게 정돈된 건물로 들어갔다. 오래된 절과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어서 사진으로 찍으면 새해 1월 달력 그림으로 아주 어울릴 것 같았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분위기는 더 살아나리라.
그런데 이런 곳에서 죄인(추정) 추문을 한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택무군이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며 다독였다.
“추문은 되었어. 그보다는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 혹시 좋아하는 차가 있나?”
그는 구름이 그려진 병풍이 있고 탁자와 방석이 있는 자리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가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건 눌린 방석의 자국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했다. 주인이 자주 앉는 자리는 상대적으로 납작 눌려있었는데 그 앞의 서안으로 책갈피가 끼워진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자주 보는 종류인지 표지 가장자리에 제법 손자국이 나 있었다.
“악보란다.”
오선지에 그려진 서양식 악보만 익숙했기에 그런가보다 여기고 넘어갔다.
표지에 적힌 한자 중 선(善)이라는 글자만 겨우 알아봤다. 글자가 모두 여섯이었는데 내 실력으론 겨우 글자 하나만 읽을 수 있었다.

탁자에 백옥으로 만든 피리가 보여 ‘여기 사람들은 흰색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피리도 흰색이네.’ 생각하고 맞은편 방석으로 가 앉았다. 양심상 다리를 편하게 하고 앉지는 못했다.
그보다 뒤편으로 놓인 서가가 인상적이었다. 제본의 방식이 달라 여기선 책을 눕혀서 보관한다.
각이 딱딱 맞게 정리한 책들의 모양이 어쩐지 눈에 익숙하다 생각하며 택무군으로부터 차를 대접받았다. 향이 짙으면 어색해할 걸 염두에 두었는지 물을 곱절로 많이 부어주었다. 입에 가만 물자 희미하게 꽃내음이 났는데 제법 입맛에 맞았다.

“망기... 그러니까 함광군이 그대를 곤란하게 만든 건 동생 대신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그건 죄를 묻는 추문이었잖아......요...?”
추문이 아니었나? 택무군이 짐짓 시선을 피하며 자신 몫으로 다른 차를 우려냈다.
내 것과는 달리 색이 무척 진한 색이었고 풀 냄새도 그만큼 짙었다. 녹차 티백을 한꺼번에 다섯 개를 넣고 센 불에 조려낸 느낌이라 맛이 굉장히 쓸 것 같았는데 취향이 그쪽인지 탕약 같은 걸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찻잔에 따랐다. 녹차에도 설탕을 넣어 마셨던 나는 보는 것만으로는 입안이 아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택무군이 찻잔에서 시선을 들고 내게 말했다.
“망기가 아니라는 내 말도 안 듣고 고집을 부린 건 자기가 그토록 원하는 걸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지. 그 애는 예전부터 외골수여서 한 번 그래야겠다 정하면 쉽게 뜻을 굽히질 않아서... 그래도 본인이 착각했음을 깨달았으니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난 뒤엔 더는 염치없이 구는 일은 없을 거야.”
“......?”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겠다는 눈치인데 이해가 안 가도 그냥 그런 줄 알고 있게.”
동생을 대신하여 사과를 한다면서 해명은 대충이었다.
나는 여상히 굴었다. 높으신 분이 아랫사람에게 이유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짓는 건 익숙한 일이다. 고생하여 만든 기획이 엎어졌을 적에 부장님은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만 했다. 계급사회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중요한 건 함광군이 뭔가를 오해했고, 지금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 둘은 각자의 차를 마시며 각기 딴 생각을 했다.
옆에서 보글보글 따뜻한 소리를 내고 물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서 그대를 처음 봤을 적에 공자는 혼백의 모습이었지.”
기습 공격이었다. 입속에 담고 있던 차를 힘차게 뿜었다.
“니눼에?”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했으면서 정작 본인이 더 놀라 서가에서 책을 들어 던지려 했어.”
“아... 콜록. 잠깐만요?!!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저 구석에 있는 네발 향로의 모습이 낯익다. 고급스런 외관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었다. 고개를 휙 돌려 대나무 발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피톤치드! 빼곡하게 자란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공기가 서늘했다. 구석에 고금이 있었고... 입구 앞쪽에는 사령이 나타났다며 손가락질을 하며 허둥대는 흰옷의 소년들이 있었다.
“그렇군. 확실히... 여긴 내가 예전에 죽었을 때 나도 모르게 와보았던 장소 같군요.”
내 말을 들은 택무군의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짝 쳤다.
기억난다. 그때 택무군은 지금과 달리 연한 푸른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럼 얘기가 한결 편해지겠군. 지금 자네 몸은 어떻게 된 건가. 숨을 느리게 쉬고 있지만 생기가 없고, 맥이 천천히 뛰고 있으나 온기가 없군. 나와 망기는 한눈에 알아보겠지만 수련이 낮은 자들은 자네를 사람이라 여기겠어. 단, 건강하지 않고 아픈 사람으로.”
“그야 전 흉시니까......요?”
“그렇지 않아. 전장에서 흉시를 여러 번 보았는데 그들 전부가 자네 같지 않았어.”
“그래요?”
“알려지지 않은 술법을 써서 부활했는데 온전하게 부활을 못한 것 같군.”
“그게 흉시잖아요?”
“아닐세.”
우리 둘은 거울을 마주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인상을 구겼다.

서로가 납득을 못했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 주제는 일단 넘기기로 했다.
목이 타는 느낌이 들어 찻잔을 들어 그게 독한 술이라도 되는 양 한 번에 들이켰다.
“소처럼 차를 마셔선 안 된다.”
“배움이 짧아 그러니 이해 좀 해주시죠.”
“앞으로 가르칠 게 많겠군...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그대가 이곳에 혼백으로 나타났을 적에 혼자가 아니었는데 기억을 하는가?”
대답을 하기 전 시선이 구석에 놓인 고금으로 향했다. 입술도 약간 오므려졌다.
택무군 또한 고금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때 고금의 줄이 저절로 튕겼고, 그것만으로 힘을 전부 써버린 혼백이 거품처럼 흐트러졌었다.
그렇게 혼백이 깨져 버렸으니 환생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먼저 죽임을 당했고, 다음으로 수사가 죽었다. 사실 내 입장에선 비명소리를 들은 게 전부지만 아무튼 설양이 용월을 죽였다. 그리고 시변하게 만들어 상씨 저택 참변의 미끼로 써먹었다.
기억을 하고 말고.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서 적절하지 않은 상대에게 목숨을 잃은 그는 고소 남씨의 문하생이었다.

“이름이 용월이었어. 조금은 고지식한 성격이었지.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있어 다른 선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 그래서 항상 혼자 다녔고...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고민을 했고, 부족한 재주라도 어디서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 그런 식으로 가버릴 거라곤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을 거야.”
“저에게 당과를 줬었어요.”
“그랬니?”
약간 초췌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택무군이 희미하게 웃었다.

시변하여 문제를 일으킨 용월의 시신은 부분으로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다시는 죽은 채 걸어 다니지 못하게끔 약양의 상씨 가주 상평이 그녀의 몸을 모두 여섯 부분으로 잘라 도륙했기 때문이었다.
상평의 입장에선 용월이 수행을 하는 몸으로 시변하였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해는 갔다만 치욕적이었다.
남씨 사람들은 따져 묻기 이전에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장례는 입고 있던 겉옷을 관에 넣어 간단히 행해졌다. 친한 지인이나 가족이 없었기에 유품은 모두 불에 태워졌다.

“나는 용월이 급사한 까닭부터 차분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변했다는 결과를 두고 다들 원인은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버렸지. 그 몸이 시변을 한 건 수행의 정도가 낮았기 때문이니 문하생의 신분으로 고소에 큰 폐를 끼친 거라고들 말했어.”
그리고 상씨 집안이 하룻밤 사이에 심상치 않은 방식으로 몰락했다.
상씨의 멸문과 고소 남씨를 서로 연계시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운심부지처에서는 긁으면 부스럼이 난다며 문하생 용월의 이름 자체를 입에 담기를 꺼리게 되었다, 택무군이 그렇게 설명했다.
“다들 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내게 진상조사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몇 명의 수사를 모아 은밀히 초혼을 했어. 하지만 대화는 불가능했고 용월의 혼백은 이미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져 산들바람만 불어도 사라질 지경이었지.”
단지 몇 마디를 묻고자 그 가엾은 혼을 가루로 만들 수는 없었다고 택무군이 얘기했다.

그게 전부야? 그걸로 끝이야?
죽은 이의 혼백을 부르려 했고, 그나마 그 일에 실패하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끝이냐고.
문하생의 죽음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저편에 묻어버리자고 그리 쉽게 결정내려질 만한 거였나.

입가가 뒤틀리는 걸 손등으로 입을 닦는 척하여 감췄다.
지금이라도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달편(達片)의 거짓을 읊어댔다.
“용월 수사는 택무군이 그리 신경을 써준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말하는 내 목소리는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고저가 없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27 10:56 2021/11/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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