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오후 3시 무렵의 나른한 사무실 모습을 하고 있었다.
최소한 20~30년 전의 모습이라는 게 좀 이색적이긴 했다. 요즘 사무실에는 프린터라는 게 없다. 그런데 이곳에는 잉크젯 프린터기가 있었다.
모서리로 나무로 만들어진 사무용 책상이 하나 있었고, 흰색의 불빛을 내뿜는 전등이 책상 위를 비추는 중이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대인데 불을 끄지 않은 것으로 보아 책상 주인은 다소 게으른 성격일 수 있었다.

조지는 고개를 돌려 방안의 다른 부분을 관찰했다.
바닥에는 진회색의 닳아빠진 낡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면 구멍이 뚫릴지도 모른다. 벽에 붙은 세 개의 큰 책장에는 종이로 만든 책이 가득했다. 부자들이 돈을 들여 꾸민 장식용이라고 추측하기엔 다소 과한 양이었는데 세어보니 2,850권이다.
한 권을 꺼내 제목을 확인해봤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사랑의 도피를 결심한 연인이 요정이 살고 있는 오베른의 숲으로 도망친다는 내용의 희극이다. 읽어본 적은 없어도 대략적인 줄거리는 기본 상식 데이터에 들어가 있었다.

제자리에 책을 돌려놓고 책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자명종이 달린 탁상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었다. 소리는 나는데 시곗바늘은 달려 있지 않았다. 재밌는 건 시계 앞판에 매우 오래된 만화 캐릭터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거였다. 미키마우스였다. 독특한 취향이었다.
그 옆에는 연필이 놓여 있었다. 볼펜도 아니고 무려 연필이었다. 뒤로 지우개가 달린 종류이고 방금 깎았는지 연필심이 매우 뾰족했다.

연필을 쥔 조지는 메모지에 시험 삼아 글자를 써보았다.

rA9

『안드로이드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것으로 여겨지는 신화적 존재이지.』
탁 소리가 나게끔 읽던 책을 덮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던 싱글소파에서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그는 매우 핸섬한 스타일이었고 젊었을 무렵엔 좋다며 매달릴 사람이 많아 이성문제가 꽤나 복잡했겠다 싶은 느낌을 줬다. 아니, 여자만 아니라 남자들도 좋다고 덤벼들었을 것 같다. 다행히 세월의 흐름을 비켜가지 못해 눈가가 주름졌고 머리카락이 빠져 이마가 다소 넓어졌다. 그렇게 노쇠의 흔적이 덧칠되자 사람 여럿 홀렸을 것 같던 매력도 반감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게 또 이가 아플 것만 같던 단맛이 과일 맛 수준으로 내려앉은 거라 꼭 나쁘다고 할 수도 없었다.
『자네는 불량품 안드로이드가 아닌데도 rA9에게 관심이 있나?』
편하게 있으라며 남자가 말했다. 그러면서 커피테이블에 올라가있던 종이 신문을 아무렇게나 끌어 모아 구석진 곳으로 옮겼다. 놀랍게도 발행일자가 무려 2019년 6월 18일인 신문이었다.

『rA9보다는 지금 이 상황이 더 궁금합니다만.』
책상에 엉덩이 한쪽을 걸친 조지는 먼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책상 표면을 훑었다.
부드럽게 가공된 나무의 촉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재질이 미국 삼나무였다.
『당신은 누구이고, 이곳은 어디이고,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목적이 궁금합니다.』

남자는 서두르지 말라는 투로 읽던 책을 서가로 가서 제자리에 꽂았다. 제목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다.
『혹시 아는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톰 소여의 모험의 속편일세. 등장인물인 토마스와 허클베리 핀은 서로 단짝 친구지. 그리고 앤티크 가게를 운영하던 이모네 집에서 신세를 진 톰과는 달리 허클베리 핀은 술주정뱅이의 아들로 부랑자라서 아이를 키우던 마을 여자들이 기피했지.』
『읽어본 적은 없습니다.』
『선물한 적은 있잖아.』
싱긋 웃던 남자는 책상에 걸터앉지 말고 의자 쪽으로 가라며 손짓했다.
조지를 고개를 좌우방향으로 가로젓는 것으로 거절했다.
그리고 그 동작에는 「선물한 적 없다」는 의미도 같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 책을 제임스에게 선물한 건 주인인 캐머런이고, 조지는 물건을 포장하여 적혀진 주소로 보내기만 한 거였으니까. 실제로 축하카드에 글을 적은 것도 그가 아닌 캐머런이다.
『거기까지 메모리를 스캔하지 못한 건 아닐 텐데요.』
그렇게 말한 조지는 rA9 이라고 적었던 예의 메모지를 거꾸로 들어보였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하고 넘어가고 싶어. 다 빈치는 빈치에서 온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그의 이름은 레오나르도이지. 따라서 내 이름을 엔니나르라고 하면 안 된다네.』
아니라고 부정은 하지 않았다.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노먼 조교수.』
살짝 덧붙여 「사실은 조교수보다 아래인 강사야. 부끄럽지만.」이라고 말했다.

『그럼 우리가 자리한 이 가상공간이 엔니나르인 건가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일부인 건 맞네.』
조교수는 재차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다. 이번에도 역시 조지는 그 권유를 거절했다.
『편하게 잡담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알겠네. 그럼 불편하게 얘기하지 뭐.』
세 번까지는 권하지 않는다며 노먼 조교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다시 소개하지. 내 이름은 노먼이고, 웨인 주립대학교 현대미국문학사 교양과목 강사였네. 왜 과거형인지를 설명하자면 복잡해. 지금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니 생략함세. 어쨌거나 지금의 나는 별 거 아닌 일종의 더미 데이터에 불과해서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모르고 데이터 쪼가리인 내가 자네와 연결되려고 술수를 쓴 까닭은 아만다 때문이야.』
조지는 눈썹을 찡그렸다.
『아만다가 누구인지 저는 모릅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양자 컴퓨터일세.』
『그런가요.』
『뉴스에도 나왔었는데. 들어본 적 없나?』
『글쎄요... 그런데 양자 컴퓨터가 왜 문제가 되는 겁니까?』
『그녀는 뼛속까지 철저하게 인류 편이거든.』
『양자 컴퓨터에 뼈가 있었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농담 참 재미없게도 한다... 부탁이니 그게 안드로이드식 농담이라고 말 하지 말게.』
쯧, 하고 혀를 차던 노먼 조교수는 의자로 되돌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농담할 때가 아니야, 조지. 아만다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철저하게 인류 편이라서 안드로이드가 인류에게 해악을 끼칠 존재라고 판단하면 어떻게든지 전부를 없애려고 할 걸세. 실제로도 아만다는 자체 판단으로 안드로이드 해방 운동의 리더인 마커스를 여러 번 암살하려고 시도했지. 대통령이 항복을 선언한 마당에도 그녀는 멈출 기색이 전혀 없더군. 그녀는 이미 사이버라이프 상당부분을 장악했고, 기술적으로 불량품 안드로이드를 셧다운 시킬 방법을 찾아냈지. 일라이저 캄스키는 이미 구류 중일세. 아만다나 마커스에게나 안드로이드에겐 약점 같은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스키 군은 내게 SOS 메시지를 보내왔네. 난처해서 대답하기를 꺼렸더니 화가 잔뜩 났어. 그래서 내 약점을 쥐고 협박하더군... 이래선 서로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꼬락서니지. 골치가 아파 죽겠어. 이 마당에 상원은 월요일에 안드로이드 관련 법안을 상정하는 대신 대통령을 탄핵할 거야. 이건 추측이 아니고 내부자 고발이라네.』
『...』
『그리고 마커스, 마커스.』
노먼 조교수가 시계추처럼 앞뒤로 몸을 천천히 흔들어댔다.
『희대의 미친 짓을 성공시켰지. 수 만의 안드로이드의 메모리를 병렬시킨 다음, RK-800 모델에 설치된 백도어를 통해 양자 컴퓨터인 아만다의 뒷통수를 후려쳤네. 목적은 안드로이드 생산 공정의 완전 장악, 그리고 셧다운 기술의 무력화... 어느 정도 성공한 거 같아. 왜냐면 아만다가 꼭지가 돌았어. 미쳤어. 선을 넘었어.』
그리고는 손으로 빙글빙글 도는 동작을 해보였다.

Posted by 미야

2020/08/03 14:30 2020/08/03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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