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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떠올렸다.
날씨는 화창했고, 텔레비전에서는 스쿨버스 교통사고와 유명 배우의 이혼, 그리고 경제 붕괴로 인한 일본의 총선을 전달하고 있었다. 아나운서가 입에 담은 동양의 정치인은 이름이 낯설어서인지 외워지지 않았다. 쿠마인지 쿠헤인지 대충 그렇게 시작되는 이름이었다. 흥미를 잃은 제임스는 뉴스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며 달걀 스크램블 찌꺼기가 묻은 접시를 닦았고, 등 뒤에서 출근준비를 서두르는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돌려 세탁 세제가 다 떨어졌음을 알렸다.

안색이 어두웠던 로널드 무어는 이렇다 말이 없었다.
대신 깊게 한숨을 내쉬고 접시를 정리하는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째서인지 그날따라 로널드 무어는 아들을 향해 다녀오겠다는 인사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어쩌면 집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걸 내심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자살한 것일 수도 있다고 친척들이 말했다. 그러면서 보험금이 관련되어 있으니 혹시라도 누가 물어보면 아는 바가 없다 잡아떼라 훈수했다.
쓸데없는 훈수였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유서를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져봤던 제임스는 정말로 아는 바가 없었다. 유서로 보이는 메모지 한 장 나오지 않았고, 수첩에는 각종 공과금 납부일과 끝이 보이지 않는 연체이자에 대한 메모밖에 없었다. 숫자의 나열이었다. 세상과 연결될 수단은 오로지 숫자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낙담한 사내가 남긴 마지막 흔적은 세제 구입 영수증이었다. 가격은 13.85 달러였고 구입한 장소는 체인점 수퍼마켓 크로거였다.


생각에 잠겨 묵묵히 걷던 제임스는 잠시 제자리에 멈췄다.
영수증만 보았지 세탁 세제를 본 기억은 없다. 유류품으로 돌려받은 건 신발, 그리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손목시계였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13.85 달러를 지급하고 구입한 물건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아들인 그가 세제를 언급했을 적에 보험 손해사정사의 표정이 엄청 괴이해졌기 때문에 다시는 입에 담지 않았다. 세상은 그가 아버지의 죽음에 애도하기를 원했지 상표도 모를 세제 따위에 신경을 쓰는 모습은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남겨진 것보다 없어진 것이 더 많은 걸 가르쳐줄 때가 있다.

제임스는 전철역 실내화단 그늘에 숨은 사람들을 암시하면서 조지가 보였던 손동작을 기억해냈다.
엄지와 소지를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접었다.
그걸 따라하고 앤더슨 경위에게 이게 뭐 같아 보이느냐 질문했다.
『죽을래?!』
숫자 여덟을 의미하는 수화를 역시 몰랐던 경위는 일종의 욕설 제스처로 받아들인 것 같다.
뒷통수가 얼얼해지도록 후려갈기더니 고얀 놈, 혼잣말을 했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세를 낮춘 채 숨어있던 이들에 대해 제대로 말을 꺼내보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사실 그때까지도 앤더슨의 신경은 다른 곳으로 쏠려 있는 상태였다.
어느 편에 속한 건지 알 수 없는 드론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두울 적에는 못 봤던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 눈에 띄지 않았을 뿐이지 원래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들인지도 모른다.
안드로이드 편인지, 사람 편인지 짐작이 안 간다.
것보다 그 자신이 안드로이드 편인지, 사람 편인지 갈팡질팡 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이분법으로 나눠지지 않는 법인데 선택을 강요받는 기분이다.

「최악과 차악이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사이버라이프의 창시자 일라이저 캄스키가 넌지시 그 말을 흘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앤더슨 경위에게 말한 건 아니고 그의 애송이 파트너에게 그 말을 했다.
「두 가지의 악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니... 저라도 싫겠어요.」
분명 알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놈은 알고 있었다.
눈이 벌겋게 변한 앤더슨 경위는 홧김에 돌부리를 걷어찼다.
그리고 매번 그러했듯이 처절하게 후회했다.
『망할.』
엄지발톱이 잘못된 것 같다. 아픔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났다. 그렇다. 눈물은 통증 때문이다.

공중을 배회하던 드론 중 한 대가 건물 2층 높이까지 낮게 하강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카메라 렌즈로 이쪽을 유심히 쳐다보는 듯하더니 날개를 위아래 방향으로 흔들었다. 10초 정도 그렇게 저 혼자 오두방정을 떨고 홀연히 방향을 돌려 날아가 버렸다.

『방금 사진 찍어간 것 같던데, 통행금지 위반했다고 나중에 과태료 나오는 거 아닐까요.』
제임스가 옆에서 속 편한 소리를 했다.
얘에게 내전의 위기라는 건 강 건너 불구경이군.
드론이 날아간 방향을 쳐다보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속으로 끙끙 앓은 게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있잖아... 여기에 100만의 안드로이드가 있어. 그런데 걔들이 나랑 적이야. 앞으로 무기를 들고 서로 막 싸워야 해. 그런 상황에서 과태료가 문제가 될까, 아닐까.』
『문제가 됩니다.』
『어째서---!!』
『일단 부과된 벌금을 낼 능력이 없습니다, 경위님. 저금이 바닥났거든요. 법정에서 합의가 되지 않으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전이라 하셨던가요. 100만의 안드로이드와 인간이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싸우게 된다고 가정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안드로이드의 숫자는 100만이다. 하지만 인류는 최근 100억 명을 찍었다.
『애초부터 워렌 대통령이 안드로이드의 요구에 수긍을 한 게 비정상입니다. 이번 사태는 인간의 일방적인 학살로 시작되어 일반적인 학살로 끝났어야 정상입니다.』

제임스는 오래 전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되었다.
손해사정사의 기가 막혀하는 눈빛, 일그러진 눈썹... 방금 세탁 세제라고 하셨습니까.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건드려 톡, 톡 규칙적인 음률을 자아낸다. 그는 제임스를 똑바로 응시한다. 시선을 피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생각하고 눈에 힘을 준다. 원하지 않던 눈싸움을 지속하다가 제임스는 자신의 말투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목소리가 안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자연에서는 열 마리의 말벌이 꿀벌 삼만 마리를 일시에 학살합니다.』
혀를 안으로 말아 웅앵거리자 듣고 있던 앤더슨 경위의 눈썹꼬리가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꿀벌은 자신의 둥지에서 말벌을 키우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인간은 꿀벌이 아니고... 말벌은 어두운 색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천적은 오소리입니다.』
왜 항상 이 모양일까 낙담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너, 정체가 뭐야.』
경위는 손가락으로 제임스의 가슴을 찔러 밀쳤다.
『제 이름은 제임스 무어입니다.』
『이름을 묻는 게 아니잖아!』
『2011년 3월 1일 생입니다. 혈액형은 B형이고, 현재 무직이고, 미혼입니다. 주소는...』
『지랄하지 말고!』
머리가 이상한 놈인가. 모자란 놈인가. 아님 둘 다인가.
『약도 안 빠는 녀석이 말기 중독자보다 상태가 더 나쁘다는 게 말이 되?! 솔직히 불어. 너, 안드로이드지. 맞지. 야, 이 자식아... 사이버라이프에서 파견 나온 내 애송이 파트너도 너 같지는 않았다. 말 하는 거며, 하는 짓거리 하며... 인마! 어딜 튀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방금 튀려고 그랬잖아!』
『도망치려 한 건 맞는데... 안드로이드는 아니라고요.』
『아, 그쪽이었어요? 그거 참.』
화가 나면 손부터 나가는 건 나쁜 버릇이다. 알면서도 못 고치니 그는 나쁜 사람이다.
빡 소리가 나도록 상대방의 머리를 후려갈긴 뒤, 앤더슨 경위는 무기를 집에 두고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지고 있는 총이 있었으면 아마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까... 당겼겠지. 암.

Posted by 미야

2020/07/16 22:33 2020/07/16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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