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불식 중 도살장으로 끌려간다는 표현을 떠올렸다.
「그쪽」 세계에서는 부족한 원자재와 환경 문제로 도축된 동물의 고기를 더 이상 식용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돼지와 닭의 캐리커처 그림이 붙은 고기가 정기적으로 식탁에 올라왔지만 죄다 공장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들이었고 혀로 느껴지는 맛과는 달리 돼지나 닭의 살코기는 손톱만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고기로 만들어지기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의 이미지는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동물의 그림이 그려진 식료품 스티커를 포장지에서 떼어낼 적마다 목덜미로 소름이 돋곤 했다.


발아래서 파삭, 도자기 파편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낸 건 아니니 조심한다고 해도 실수로 작은 조각을 밟은 모양이다.
아이는 들숨처럼 신음했다.
그래도 상처가 생겼을 발바닥을 보겠다며 신고 있던 신발을 뒤집어 까지는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내려 발아래를 흘끔 쳐다보았을 뿐, 「아이고, 내 발!」 이러고 뛰지도 않았다.
머저리라는 아명과는 달리 귀족 앞에서 해야 할 짓과 하지 말아야할 짓을 그만하면 잘 구분하고 있었다.
그만하면 출발이 썩 좋다. 
기체릿이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지만 말고 안으로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인사해라. 소공자님이시다.』
『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응?』

양팔로 가슴을 감싼 채 한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는 인사법은 신관들의 예법이다.
시골뜨기 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보고 주워들은 것이 그리 많을 리 없으니 나름 열심히 궁리하여 높으신 분들이라 생각한 신관들의 동작을 따라한 모양이다.
이때 구부려야 할 무릎이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이어야 한다는 문제는 잠시 옆으로 미뤄두고 –
지금 뭐라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기체릿의 얼굴이 부풀어 올랐다.
『푸흐흣!』
서둘러 손바닥을 사용해 칠칠치 못한 당나귀 콧소리가 새어나오는 입을 틀어막았지만 소리를 내어 웃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이의 귀에도 웃음소리는 잘 들렸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웃기는 짓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어쨌든 변명하자면 진부한 역사극 따윈 취향이 아니었고, 따라서 아는 표현이라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와 「통촉하여 주시옵소서」가 전부였다. 전자는 감사합니다, 이고 후자는 미안합니다, 의 의미이다 –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 모르겠다. 후회한들 뱉은 말은 도로 주워 담을 수 없다. 애당초 망했다고 봐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자는 이 희극 같은 상황 앞에서도 웃지 않았다.
그래도 어처구니없어하는 건 쉽게 감춰지지가 않아서 답지 않게 입이 약간 헤 벌어졌다.

『내게 새로운 놀이친구가 생길 거라고 들었는데 알고 봤더니 재롱을 떨 광대를 얻게 되었군.』
『......』
『아니면 눈이 옹이구멍이던지. 네 눈엔 내가 머리 위로 왕관을 쓰고 있는 걸로 보이니? 보인다면 한 번 말해봐. 내 왕관의 색과 모양이 어떠한지.』
『저어.』
『장난으로라도 왕이 아닌 자에게 성은이 망극하다는 표현을 사용하면 반도의 무리다. 주의해라.』
『반도?』
『역모자, 반역자 말이다.』
야단을 맞은 아이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제 딴에는 제법 심각해져서 진지한 자세로 사죄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쩔 수 없었다. 아는 표현은 딱 두 가지밖에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리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죄송하다는 의미로 그리 말했더니 이번에도 기사가 옆에서 푸흐흣, 푸흐흣! 하고 듣기 싫은 숨 참는 소리를 냈다.

진짜지 전부 다 때려죽이고 싶다.
일로이 모젠 위니악은 무익하게 천장을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구두 앞코를 응시했다.
발가락에 힘을 주자 엄지발가락 즈음의 부드러운 구두 가죽이 발가락 모양으로 봉긋 솟아올랐다. 발가락을 도로하자 앞코가 도로 주저앉았다.
한탄할 일이다. 소공자 일로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겨우 이런 일 뿐이다. 구두 안에서 발가락이나 꿈질거리는 것,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는 것, 그 정도다. 멍청한 광대와 당나귀 소리를 내는 기사를 면전에서 치워버리는 건 그의 능력 밖이다. 섬멸 기사단의 일원인 기체릿은 아버지인 위니악 공작의 말만 들었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형인 위니악 대공자의 명령을 따랐다.

이를 악물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빈말으로라도 그가 신고 있는 구두보다 더 가치가 없을 아이를 노려봤다.

체구가 작았다. 못 먹어서 그럴 게다. 입술의 색이 붉지 않고 창백한 것이 가벼운 영양실조 상태로 추측되었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피부는 건조했다. 손톱이나 발톱은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상태일지 짐작이 갔다. 살집이 없으니 근육 또한 붙지 않았고... 발길질하면 동강이 나버릴 것 같은 뼈가 얇게 들러붙은 한 장짜리 피부 위로 도드라졌다. 앙상한 몸은 겨울의 바람에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연상시켰고, 그리고 감히 예언하건데 겨울잠에 빠진 들판엔 영원히 봄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한 대 치기만 하면 된다. 겨우 그 정도로 - 아이의 등뼈는 박살이 날 테니.

살기를 담아 아이를 쏘아보는 일로이를 앞에 두고 기체릿의 눈 또한 곱게 휘어졌다.
죽음을 친절한 이웃사촌이라 착각하는 저 섬멸의 기사는 소공자가 저 작은 머릿속에서 뭘 생각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아니면 익숙한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르겠다.
섬멸의 기사는 살기를 갗 구워낸 빵 냄새처럼 여기곤 했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좋다며 싱글벙글거렸다.

우리에게 더 많은 시체를.
그리고 신이여, 그 곱절의 죄책감을 우리에게 더하소서.

『무슨 꽃을 좋아하지.』
『네?』
갑자기 생뚱맞게 웬 꽃?
눈빛이 날카로운 도련님이 그리 멀지 않을 미래에 있을, 누군가의 장례식장에 쓰일 꽃의 종류를 물었다는 걸 알아차릴 리 없다.
갈팡질팡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짐작가는게 하나 있기는 했는데 그게 과연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언젠가 나란히 앉은 분들 앞에서 좋아하는 대중음악에 대한 질문을 듣고 땀을 한 바가지나 흘렸던 기억이 있다. 아니다, 대중음악이 아니고 좋아하는 작가에 대한 거였다. 그래서 대충 이거다 싶은 작가의 이름을 두 서넛 주워 담고, 책의 줄거리랍시고 한참을 횡설수설한 끝에, 주눅이 잔뜩 들어 독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면접관은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그럴 것 같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더듬거리며 입에 올렸던 소설의 줄거리는 영화 줄거리였고, 작가는 예술영화감독이었다.
「덕분에 창피한 꼴을 당했지. 최악의 취업 면접이었어.」
지금에 이르러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잘 생각한 뒤에 무난하게 답변했다.
『분홍색 꽃이요. 종류는 가리지 않아요. 꽃들은 전부 예쁘고... 저어.』
『분홍색 꽃이라. 기억해두지.』
무도회장도 아닌 무덤을 분홍색 꽃으로 장식하는 건 악취미다. 그래도 고인의 희망이라는데 제가 어쩔 건가. 풍성하고 화려하게 장미로 – 분홍색으로 준비해서 미르나무로 짠 관 위로 던져버리면 될 터.
조촐한 장례식을 상상하자 언짢았던 기분이 조금은 풀리려 했다.

여전히 영문을 알 길 없는 아이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저기요?』
『달리 할 말이라도?』
『그게 전부인가요? 왜 분홍색 꽃이 좋은지는 안 물어보세요? 아니면 분홍색 꽃의 종류를 읊어 보라던가...』
『물어야 하나.』
『아뇨.』
답답할 정도로 아까부터 대화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

아니, 따지고 보면 첫 단추부터 잘못 꿰었다. 그들은 서로 통성명조차 하지 않았다.
글쎄다. 이 몸이 평민이고 저쪽이 신분 높으신 귀족이라 그런 건지도.
대입하여 상상하면 이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관리과장이나 본부장 이런 사람들도 밑바닥을 구르는 시설 근로자의 이름이 뭔지 궁금해 하는 법이 없었다. 호칭은 늘 거기! 였다. 빨리 와! 이기도 했다. 위아래가 붙은 회색의 작업복 한 가운데로 플라스틸로 제작된 명찰이 달려 있었어도 아무도 그 명찰에 적혀진 이름 석 자를 소리 내어 불러주지 않았다.

갑자기 코가 시큰해졌다.
「내 이름.」
류 시화.

그런데 역으로 얘기하자면 류 시화 또한 본부장의 이름을 기억 못했다. 뚱뚱하고, 머리숱 적고, 기름진 피부에 배가 나온 마흔 중반의 아저씨 – 본부장님 – 그 또한 규칙에 따라 출입허가증을 겸한 플라스틸 명찰을 걸고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다. 류 시화의 명찰이 흰색이었다면 본부장의 출입허가증 색은 파란색이었다. 한 번 죽고 살아난 오늘에 이르러 본부장에 대한 기억은 기껏해야 명찰이 파란색이라는 것 정도다. 멱살이 잡혀 폭행까지 당해 제법 원한이 깊었음에도 떠오르는 거라고는 명찰의 빛깔이 전부... 본부장의 이름은 뭐였을까.

「나라는 인간은 어지간히 변화가 없군. 지금도 저 소년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궁금하지가 않으니.」
깨닫고 나니 만사가 시큰둥해졌다.

Posted by 미야

2017/10/27 13:45 2017/10/2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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