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1-07

슬슬 가게 문을 닫고 화덕에서 불을 뺄 시간이었다.
엉클 밥 주점의 주인 로버트 소워스키는 언제나처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입고 입던 펑퍼짐한 앞치마를 벗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음에 짧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종교라는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요즘 같이 어려운 시대엔 기도라는 행위가 절실히 필요하다.
『삼촌.』
심부름 갔던 애덤이 돌아왔다. 호르몬이 날뛰는 것도 아닌데 소워스키는 조카를 끌어안고 뺨에 키스를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물론 아직 망령은 나지 않았기에 그러지는 않았다. 조카는 스물 셋의 청년이었고, 냄새나고 늙은 삼촌의 키스를 받기엔 너무 잘 생겼다.
『어서 오렴. 핀치 씨에게 타박상에 특효라던 연고를 잘 건네주고 왔니?』
활짝 웃고 있던 소워스키와는 대조적으로 애덤의 표정은 그늘지고 어두웠다.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저런. 많이 아프다고 하든? 설마, 단순히 멍이 든게 아니고 그 양반 종아리 뼈에 금이 간 것 같다거나... 의사에게 보여야 할 정도야?』
『아뇨. 그런게 아니고요.』

핀치는 집에 없었다.
늦은 시각이었다. 애덤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상대가 바람둥이 벤튼이었다면 치마 입은 여자를 꼬시러 외출했구나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거다. 하지만 상대는 벤튼이 아닌 핀치다. 그는 겁이 많은 사내다. 건강도 썩 좋지 않다. 데이트 보다는 빈둥거리며 침대에 눕는 편을 선호한다. 그런 핀치가 여자를 만나기 위해 집을 비웠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그렇게 꼼꼼한 성격의 사내가 무슨 까닭에서인지 현관문도 활짝 열어두고...
『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고.』
애덤은 차분하게 상황을 삼촌에게 설명했다.
『문이 열려져 있길래 고개를 길게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죠. 함부로 들어가진 않았고요. 슬쩍 봐선 물건이 좀 어질러져 있었지만 도둑이 든 것 같진 않았어요. 책장 서랍도 잘 닫겨져 있었고요. 그래서 10분 정도 밖에서 서성이며 핀치 씨의 이름을 불러봤는데요...』
『그런데 대답이 없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부근을 한 바퀴 돌았어요. 그리고 여기, 핀치 씨의 안경을 찾아냈습니다.』
『알았다.』
소워스키는 식료품을 넣어두는 찬장 쪽으로 다가가 하부장의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위쪽 선반에는 양파가 담긴 바구니며 흙 묻은 감자가 가득했지만 아래쪽에는 어른 팔 길이 정도의 장총이 한 자루 들어가 있었다. 그 옆에는 탄약 상자도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소워스키는 비장한 표정으로 장총을 집어들었고, 공룡이라도 잡으러 간다는 투로 두 다리를 벌렸다.

『워, 워! 쏘지 마십쇼! 접니다, 저. 경비병 시멘스키!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탄약을 장전하는 소리를 들은 시멘스키가 양손을 머리 위로 번쩍 올렸다.
『늦은 시간이야. 실수로 총에 맞아도 불평할 순 없을 걸, 시멘스키.』
인기척이 들린 입구 쪽을 곁눈질하며 소워스키가 말했다.
『영업은 방금 전에 끝냈네.』
『아이고, 아저씨. 제가 야식용 샌드위치를 사러 왔을 것 같습니까. 후스코가 안 보여요.』
『어.』
『애 아빠가 아들이 집에 아직 안 돌아왔다면서 이성을 잃었어요. 혹시 후스코 찡이 오늘 저녁 이후로 군것질을 하러 여기에 들린 적은 없습니까.』
『애덤 말로는 핀치도 안 보인다고 하네, 시멘스키. 그리고 핀치가 안경을 잃어버렸어.』
『젠장.』
움무다. 십중팔구 움무의 짓이다. 시멘스키와 소워스키는 욕설을 퍼붓고 주점 문을 박차고 나왔다.

깜빡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이 돌아온다 싶었다가 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몸을 웅크리고 흙바닥에 누운 상태에서 핀치는 두 팔로 몸을 감쌌다. 물기를 흡수하는 재질로 만들어진 겉옷으로는 아래서 올라오는 냉기를 충분히 막을 수 없다. 몸을 문질러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어금니가 딱딱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 경고 : 체온 저하
망막에 깨알처럼 작은 글씨들이 나타났다. 글자가 벌레처럼 느껴져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 외부로의 자동 구조 신호 발신
핀치는 귓속에 들어간 물기를 털어내는 요령으로 머리를 탁탁 쳤다.
- 사용자 권한에 따른 구조 요청 취소, 명령 정상 처리
그는 실소했다. 이런 건 정말이지 도움이 안 된다.

마지막 남은 기운을 전부 쥐어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모르겠다. 여전히 집 주변인 듯하다. 여러 번 뒹굴고 넘어지면서까지 달렸지만 그렇게 먼 거리까지 벗어난 것 같진 않다. 글쎄다... 노력은 했다. 결과까진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예상 외로 선전하여 상당히 깊은 숲속까지 들어왔을 수도 있다.
것보다 몇 시나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넘어지고 나서 30분 정도 기절한 모양이다. 당연한 애기지만 그보다 더 긴 시간동안 의식을 잃었던 것일 수도 있다. 새카맣게 어두워진 숲속에선 판단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는 지식이 월등히 많다고 해도 지금으로선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계곡인지 짐작이 안 갔다.
가지고 있는 손전등을 켜서 앞을 비춰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나 미친 짓이다. 어둠 속에서 불을 켜면「나는 여기에 있으니 어서 날 잡아가쇼」광고를 하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성이 욕구를 앞질렀다. 휴대용 손전등을 포기한 핀치는 대신 하늘을 빼곡이 채운 영광된 빛들을 쳐다보았다.

별들은 속삭였다.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핀치는 사큰거리는 통증을 호소하는 무릎을 손바닥으로 쥐었다.
「후스코가 어른들에게 알렸다면 마을 사람들이 날 찾으러 나설 거야.」
여러 상황을 가정하고 적절하게 판단하라. 차근차근 사실을 나열하며 생각을 정리해봤다.
「그런데 후스코가 겁에 질려 입을 다물었다면? 가능성 높아. 그 아인 맹꽁하니까.」
것보다 더 두려운 가설이 있다.
「움무 상인이 그 아이를 죽이기라도 했다면...」
평균 수명이 형편없이 줄어들고 인구수는 급감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어린아이는 이제 잘 태어나지 않는다. 몇 세기에 걸쳐 기계의 도움을 받아가며 임신과 분만을 태만히 한 탓에 인간의 육체는「생육과 번성」면에서 퇴화했다. 쉽게 말해 성욕은 그대로인데 불임률이 높다.
「어린아이가 귀하다는 건 누구라도 알아. 악당이라고 해도 함부로 죽일 수 없어.」
그런데 문제의 움무 상인이 보통의 악당이었던가.
「첫째, 글자를 안다. 둘째, 내가 하는 거짓말을 쉽게 알아차렸다. 셋째, 중앙 관료들이 손에 칩을 이식한다는 걸 안다... 넷째, 다섯째... 귀찮기도 하거니와 끔찍스러워서 이런 건 더 이상 생각하기 싫군.」
머리를 뒤로 젖혀 나무 기둥으로 쿵쿵 소리가 나게끔 박아댔다.

「하지만 내 집으로 들어온 건 움무들이 아니라 대머리 움무 한 명이었어. 그건 좋은 소식이지.」
대머리 움무만의 독자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움무들이 그를 데리고 이미 먼 곳으로 떠났을 거야」
원래 거래가 종료되면 움무들은 서둘러 다른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마을 사람들과 서로 무기를 들고 죽기 살기로 싸우기 싫다면 말이지.」
게다가 대머리 사내는 마을의 어린 소년에게 손찌검을 했다. 어쩌면 살해했을 수도 있다.
「날 잡겠다고 숲속을 뒤지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재빨리 도망가야 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무들이 숲속을 머물며 떠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나에게서 관료의 칩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했다면 한 번 해보자 이랬을 수도. 내 손을 잘라가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도 있겠군. 이런.」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에선 코앞으로 손바닥을 가져가도 그 모양마저 알아보기 힘들었다.
핀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가 없군. 나 같은 인간이 중앙의 관료 노릇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칩 같은게 어딨다고...』
다시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의식이 가물가물 흐려지는 가운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고보니 안경은 어디로 갔을까. 진짜지 한숨 쉴 일만 가득이다.

- 경고 : 외부 신호 포착
망막에 글자가 다시 나타났다. 핀치는 귀찮아하며 다시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탁 쳤다.
- 승인되지 않은 경로로 구조 요청에 대한 응답
이건 또 뭐여, 잠시 생각했다.
- 시그널 차단 실패. 위치 노출. 미확인 구조자가 구조 작업 전개
동시에 엉덩이 아래가 푹 꺼지면서 몸이 흙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핀치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12/08/24 12:58 2012/08/24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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